39편
<-- 7. 수도에는 미인이 많나요? -->
머슨이 무리해서 사용한 마법 덕분에 야외에서 자는 것 치곤 아늑한 잠자리에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벌레에 물리지도 않았고, 새벽서리에 몸을 떨 일도 없었으며 예상치 못한 풀독에 밤새 피부를 긁어내려야 할 필요도 없었다. 단, 보기 민망할 정도로 온 몸에 피어있는 붉은 꽃 자국과 다리 사이에서 느껴지는 뻐근한 통증이 아늑한 잠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편안하게 잠을 이룰 수 없었던 어제 일을 상기시켜 주었다.
“으으… 나 죽어”
언제나와 같이 관계 후 정신을 차렸을 땐 내 몸을 비롯해 주변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장소만 두고 보자면 정사의 흔적같은건 찾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가볍게 입술을 부비는 머슨에 의해 억지로 눈을 떴다. 움직이자니 다리 사이가 아려왔고, 서자니 발목이 욱신거린다. 결국 어제처럼 머슨에게 안긴 채로 출발해야만 했다.
가방을 뒤져 말린 육포와 비스킷을 꺼내 머슨에게 안긴 상태로 아침을 해결했다. 손을 쓸 수가 없는 머슨은 내가 입가로 올려다 주는 것을 고개를 내려 넙죽 받아먹었다. 어느 정도 배가 불러오니 그제서야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 위까지 녹음이 우거진 거리를 지나 황량한 대지가 보였다. 훌쩍 자라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잡초들은 생기가 없어 보였다. 갈래가 나뉘어 있는 길목에는 드문 드문 집들이 보였는데, 4계절의 풍파에 낡고 기운 모습이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스산한 기운을 풍겼다. 귀신이라도 튀어 나올까 싶어 머슨의 옷자락을 꼭 쥐었다. 이때 우연처럼 바람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투욱!’
발 밑으로 무언가 떨어졌다. 목재로서의 단단함을 기대 할 수 없을 정도로 부패되어 있는 나무토막 이었다. 거뭇한 표면 위에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이 보여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을 노려보았다. 뭐라고 쓰여있는 거야?
“...호... 홀든?”
홀든?!
냉수를 맞은 듯 온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났다. 어딘가 낯이 익다 했더니 이 곳은 베넌이 틀림 없었다. 책 속에 빨려 들어와 처음 발을 디딘 곳이기도 하면서, 머슨을 만난 곳. 발길을 조금 옮겨 ‘베넌 대학살’이 일어났던 곳으로 향했다. 시체는 모두 수거해 갔는지, 그때 보였던 흔한 핏자국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이 곳에서 에리나를 봤었어.”
묵묵하던 그가 입을 열자 죄 지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다. 아, 따지고 보면 죄가 맞을지도 모르겠다. 폭행, 납치, 감금 뭐 비슷한거…
난 어색하게 하하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 응”
“내 기억의 시작이 여기이기도 했고.”
“...”
“난 왜 여기에 있었을까? 그리고 에리나는 또 왜 이곳에 있었지?”
개 망했다. 태양이 구름사이에 숨어 버려 볕이 뜨겁지는 않았지만 등줄기로 땀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식은땀이었다. 2년 전에는 제발 목숨 한번만 구제해 주십사 하고 싹싹 빌었던 마왕인데 지금은 머슴취급을 받으며 나를 마님대접하고 있다. 이 이질적인 상황에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냥 확 전부 이야기 해버릴까? 싶다가도 나를 원망하며 훌쩍 떠나버릴 까 그것이 무섭다. 처음에는 마왕이 나에게 복수한다며 달려들지는 않을까 하여 숨긴 것이었지만 지금은 거짓말의 이유가 사뭇 변해 있었다.
“에리나, 어디 아파? 안색이 안 좋아”
“그, 그래? 더워서 그런가”
“오늘은 시원한 편인데”
“이상하게 몸에 열이 좀 나네. 하하. 신경쓸정도 아니야. 괜찮아”
“그럼 벗을까?”
“미쳤냐?!”
머슨이라면 진짜 벗길 것만 같았다. 당황해 그를 휙 노려보자 적안에 장난기가 가득하다. 입가에 미소가 걸려 떨어질 줄 몰랐다. 뭐야, 나 지금 놀림 당한건가, 그것도 머슨 한테?
덥다고 말한 것이 우습게도 뺨에 빗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하늘 아래로 손을 뻗자 손바닥 위에 작은 물방울 들이 느껴졌다. 비는 점점 더 거세게 쏟아질 것 만 같았다.
“장마가 또 오려나?”
비를 피하기 위해선 방금 전 지나쳐 온 그 으스스한 베넌 마을 사람들이 살.았.던. 집 으로 돌어가는 방법밖엔 없었다. 이 앞으로는 아무리 멀리 내다본다 해도 무성한 잡풀이 우거진 들판밖에 없다.
“으… 진짜 싫은데.”
귀신 딱 질색! 물론 내 몸을 바쳐 들고 있는 인물의 정체가 마왕이라지만 싫은 건 싫은 거였다. 게다가 소나기 라면 잠깐 비를 피했다가 간다 치지만 장마라면 이야기가 또 달라진다. 상황을 봤을 때 소나기는 아닌 듯 싶었다. 어젯 밤부터 꾸준히 몰려오던 먹구름이 금방 걷힐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냥 수도로 바로 갈까?”
“감기 걸릴 껄”
“비 안 맞으면 되지.”
“우산도 없잖아. 행여나 나무 판자 떼서 머리에 이고 갈 생각이라면 그만 둬. 금방 눅눅해져 버릴 테니까.”
“난 에리나가 원하는 대로 해. 비 안 맞고 수도로 빨리 가는 게 좋은 거지?”
“할 수만 있다면 그게 최고지.”
날씨 조절하는 능력이 있어서 비를 멈추게 한다면 모를까… 비 안 맞고 수도로 지금 당장 출발 한다는 것은 상황 상 불가능이다. 우선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기에, 조금 (사실 많이) 찝찝하긴 했어도 빈 집 아무 곳이나 골라잡아 들어가 있는 게 나을 것 같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머슨, 일단 돌아…악!”
으아악! 대학 2학년 때 대한민국에서 가장 무섭다는 바이킹을 탄 적이 있었다. 그때 당시 나를 공포에 떨게 했었던 것은 90도에 가까운 경사나 아찔할 정도의 높이가 아니었다. 바로 내장과 몸이 분리 되는 듯한 감각이 그토록 끔찍하고 공포스러웠었다. 주야장천 멀미를 하고 걷기 힘들정도로 후유증이 심해서 다시는 바이킹을 타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고 졸업을 앞둔 4학년때 까지도 잘 유지해 왔는데, 지금 그 감각을 똑같이 경험하고 있었다.
“머슨!”
검은 빛이 순식간에 시야를 덮쳐왔다. 작은 빛들이 백사장의 모래처럼 반짝 거리는 것이 언뜻 은하계 한복판에 떨어진 착각도 들게 했다. 후욱- 중력을 거부한 채로 몸이 붕뜨는 감각에 머슨의 목을 꽉 잡고 안겨 들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감은 눈 위로 빛이 뿌려지고 주위의 소란스러움이 느껴졌다. 서서히 눈을 뜨자 그의 탄탄한 가슴팍이 보였다.
“다 왔어. 수도야.”
“뭐라고?“
어안이 벙벙한 채로 그의 얼굴만 바라 보고 있는데 ‘대앵-’ 종이 크게 울렸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우리가 서있는 외진 담벼락 너머로 우뚝 솟아있는 시계탑이 보였다. 상아색의 벽돌들이 빼곡하게 쌓아 올려져 있었으나 신기하게도 때 하나 타지 않고 말끔했다. 주위로 용을 연상시키는 금장식 들이 탑을 휘감고 있어 굳이 조명 없이도 시계탑 하나만으로도 거리가 반짝반짝 빛을 내어주는 것 같았다. 수도 트렌시아의 상징이며 모든 이의 만남의 장소이기도 한 곳이었다.
“저 시계탑…”
그 책에서 묘사한 것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우와! 성덕이 있다면 바로 내가 아닐까? 소설속 중요한 장면들이 바로 이 시계탑 아래서 일어났었다. 세르데벨라에게 무릎을 꿇고 고백하던 황제라던지, 세르데벨라가 자신 때문에 다투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며 더 이상 아무도 자신을 찾지 말라고 선언하던 장면이라던지, 또… 마왕 케일하르츠가 세르데벨레와 다시 재회하던 장면이라 던지.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누구를?”
“체, 체닌이지 누구겠어”
괜히 머슨의 가슴팍을 퍽퍽 쳐댔다. 그나저나 비도 안 맞고 수도로 빨리 갈 수도 있다는 방법이 텔레포트 였니? 머슨의 뺨에 손을 얹었다. 빗방울이 그의 머리카락 끝에 걸려 똑 떨어진다.
“...마력은?”
“아직 괜찮아.”
요즘 들어 부쩍 마력을 사용하는 횟수가 늘어가서 걱정이다. 난 머슨의 고개를 당겨 내 쪽으로 향하게 했다.
“이리로 와.”
잠시 정기를 내어주어 공허함을 채운다 생각하고 입을 맞추었다. 반대로 나는 힘이 빨려가지만 어차피 안겨만 있으니 딱히 상관없었다. 차가울 거라 생각했던 그의 입술이 화로에 달구어진 듯 뜨거워 내심 놀랐다. 서로의 입술이 비벼지고 혀가 찾아들었다. 거칠지도 강압적이지도 않은 한없이 부드러운 키스였다. 누구의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타액이 입술 사이로 질척하게 늘어진다. 머슨은 그것마저 핥아 올리곤 끊임없이 입술을 찾았다.
“흐읍… 자, 이제 그만”
머슨이 아쉽다는 듯 욕망으로 젖은 눈을 빛냈다. 내가 완강하게 고개를 도리질 치자 이마에 입술을 한 번 내려찍는 것으로 고개를 거두어 갔다.
큰 길로 나오자 빗줄기가 점점 강해졌다. 세자인의 외길 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원형의 광장에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갔다. 품격 있는 어느 귀족의 마차들도 심심치 않게 보였고, 비를 피하려 여기 저기 달음질을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상점 앞에 내어 놓은 물건이 비에 젖지 않도록 서둘러 천막을 치거나 안으로 들여 놓는 상인들의 움직임도 분주해 보였다. 그러나 나와 머슨이 광장의 중간으로 들어가자 눈코 뜰 새 없이 각자의 일을 하던 사람들이 동작을 멈추고 우리를 바라보았다. 뭐, 그래. 정확하게 말하자면 머슨을 바라 보았다. 마차에 달려 있던 조그마한 창문들이 드르륵 소리를 내더니 일제히 열린다. 그 안의 귀부인 혹은 영애들이 머슨의 얼굴을 뚫어지게 감상했다. 과일 바구니를 이고 가던 소녀는 “어머나” 소리를 내며 발 밑으로 사과를 데굴 데굴 떨어트리기도 했다.
머슨의 완벽하고도 잘난 외모에 넋이 나가있던 사람들이 어느새 그의 품에 폭 안겨있는 내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저 허접한 건 뭐야?”
뭐라고? 여기 체닌이 한 둘이 아닌가 보다. 고개를 휙 돌려 쳐다보니 아예 고개를 빼 놓고 우리를 구경하던 귀부인의 모습이 보인다. 아줌마 비 맞아요. 들어가세요.
결국 지대한 관심에 내가 백기를 들었다. 계속 비를 맞고 있을 수도 없으니 일단 이 거리에서 벗어나 허름한 여관이라도 들리고자 했다.
“머슨, 우선 숙소를 잡자.”
머슨이 고개를 끄덕이고 발길을 옮겼다. 여전히 따라오는 시선들이 몹시 불편했다. 그렇게 한가하면 나 대신 체닌이나 좀 잡아와라.
나라의 수도답게 여관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시세를 모르니 난감했지만, 일단 돈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니 가장 먼저 보이는 여관으로 망설임 없이 향했다.
“저기 앞에 보이는 곳으로 가자”
"꺄아악-!"
목적지를 정한 그 순간이었다. 등 뒤에서 가녀린 여성의 비명이 울렸다. 머슨의 몸이 움찔 굳는 것이 내 몸을 통해서도 느껴졌다.
========== 작품 후기 ==========
*정신없어서 ㅠㅠ 이번화도 확인 못하고 올립니다 ㅠㅠㅠ 내일 오후에 수정할게요!
*독자님 : 머슨 사흘은 더 해야 할것 같은데여?(므흣)
작가 : 지당하신 말씀입니다(므흣)
*독자님 : 머슨 속마음 모를땐 귀여웠는데, 지금은 교활 한 것이 딱 마왕이군요!
작가 : 더... 활개처라.. 교활함이여...
에리나 : 너 나 싫지?
*독자님 : 전 여잔데도 머슨의 만렙스킬이 부러워여 ㅠㅠ
작가 : 무슨...스킬을 말하시는거죠? 정확히 어떤...(음흉)
*독자님 : 어워드 투표 했어요〉〈
작가 : 투표해 주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몸 둘바 를 모르겠네여 8ㅅ8!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후원쿠폰 주신 암흑속에사는뱀 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