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편
<-- 7. 수도에는 미인이 많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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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째잭 짹 짹’
이른 아침. 먼저 눈을 떠 하루를 시작하는 새들의 소리는, 듣는 날이 어떤 날인가에 따라 다르게 다가왔다. 내가 부지런을 떨어 평소보다 일찍 외출을 하는 날에는 활기를 가져다 주었고, 해가 서쪽으로 기울 정도로 느지막하게 게으름을 피고 싶은 날에는 창문을 걸어 잠구어 버릴 정도로 거슬렸다.
그렇다면 오늘, 바로 지금 들리는 새소리는 전자인가? 후자인가? 음… 사실 아무래도 좋다. 지금 내가 눈을 떠야 하는 상황임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고, 누군가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음을 감지했기에 새 소리 같은 건 불쾌하지도 유쾌하지도 않았다.
손이 포개어져 따뜻했고, 얼굴로 내리 쫴야 할 햇빛이 가로 막혀 있었다. 대신 그것 보다 배는 뜨거운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음을 느꼈다.
“머슨?"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흐린 초점 사이로 그가 보였다. 내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꽉 붙들고는 긴장되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분명 머슨의 이름을 정확히 부른 것 같았으나, 소리는 웅얼거림으로 퍼져 나간 것이 내 귀에도 들렸다. 흐려진 시야가 점점 또렷해지더니 머슨의 빼어나게 잘생긴 얼굴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머슨은 용케도 자기 이름을 알아 들었는지 침대 맡에 끌고 와 앉아있던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에리나, 괜찮아?”
괜찮고 말고 할 게 어딨…
기껏 떠올렸던 눈꺼풀이 반쯤 내려갔다. 잠깐, 어제…. 머슨이 떠났고, 마족 하나가 되돌아 왔다. 무어라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였는데 하나는 알아들었다. 날 죽이겠다는 것. 난 분하면서도 무기력함을 느끼며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쳤다. 아무리 입을 크게 벌려도 숨이 쉬어지질 않고, 턱이 빠질 듯 목을 강하게 쳐올리던 고통.
“에리나가 일어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어.”
머슨이 가볍게 포옹했다. 부드러운 손길이 내 등을 쓰다듬는다. 그래. 죽음으로 몸이 젖어들고 있을 때 네가…
“네가, 날 구했어?”
물음에 머슨이 고개를 도리질 치는 것이 어깨 위로 느껴졌다.
“난 에리나를 받아 준 것 뿐이야.”
나를 품에 안고 다정하게 보듬어 준건 역시 너였구나.
“그럼, 날 구한 건 누구야?”
“에리나 야.”
머슨의 품에서 벗어나 그를 마주 보았다.
“무슨 소리야?”
아, 설마 내가 의식의 밑으로,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제2의 자아가 나타나 나도 모르는 엄청난 힘을 발휘해 마족을 물리쳤다 이건가?
“에리나의 분노가 느껴졌어. 살고자 하는 의지도. 그것도 아주 강렬하게. 그리고 그 자식도 곧 알게됐지. 에리나가 어떠한 감정으로 그 상황을 마주하고 있었는지 말이야.”
뭐라는거야. 그러니까, 내가 눈으로 욕하는걸 그 마족이 알아채고 겁먹어서 도망갔다고?
머슨의 말 뜻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어 표정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머슨이 피식 웃으며 내 이마에 자기 이마를 가져다가 콩 찌었다.
“에리나가 이겼어. 다시는 그런 일은 없을 거래. 앞으로도.”
“그걸, 어떻게 알아?”
“엉엉 울면서 도망갔으니까.”
“갑자기?”
“응. 갑자기.”
말하면서 그가 짧게 입을 맞추었다. 날렵하고 반듯한 콧날이 내 코 옆을 비벼왔다. 마치 짐승의 구애처럼 느껴졌다.
“확실해. 절대 어젯밤과 같은 일은 두 번 생기지 않아.”
‘하늘은 파랗다. 설탕은 달다.‘처럼 아주 당연한 것을 이야기 하듯 그가 확신에 차 말했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떨어도 돼.”
떨어? 누가?
이불 밖으로 드러난 내 손이 사시나무 떨 듯 바들거리고 있었다. 하나를 자각하자 백이 몰려온다. 손 뿐만이 아니였다. 내 어깨며 치아며 신체의 모든 것이 어제의 공포를 잊지 못하여 떨고있었다.
이것은 내 의지도 아니었고, 내 정신으로 통제할 수 도 없었다. 당황스러움에 머슨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다 괜찮다는 듯 다정했고, 따뜻해보였다. 그것을 보자 심장이 녹진하게 풀어지는 것 같았다. 여파로 눈에도 눈물이 고이고 울컥 한 것이 목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괜찮아, 에리나. 정말. 날 믿어”
그가 내 눈가에 키스했다. 눈물이 맺히기 전에 입술로 빨아 드려 뺨 위로 흐르지 못하게 막았다. 날 달래어 주는 말과 입맞춤이 계속 되자. 어느새 편안하게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있었다.
“고마워.”
이럴 때 옆에 있어 줘서.
가만히 그의 체향을 맡고 있노라면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어떠한 무모한 짓을 해도 괜찮을 것 만 같은 이상한 자신감도 불어 넣어 준다.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든든하고 마음의 빈 공간이 채워지는 것 같은데, 혹여나 영영 못 볼 수도 있었다는 걸 생각하니… 응?
“가만...”
퍽! 소리가 날 정도로 어깨를 치곤 머슨을 밀쳐냈다. 어째 내 손이 더 얼얼한 것 같지만. 자존심상 아프다는 소리는 꾹 참았다.
머슨이 내 의도를 알아차린 듯 싱글 벙글 꽃 웃음을 피웠다. 뭘 잘 했다고 웃어?!
“너 왜 여기 있어?”
“우리집 이니까.”
꼭 말을 두 번하게 만든다.
“마왕성으로 가야지! 왜 여기 있냐고”
“안 가도 돼”
머슨이 침대위로 올라오며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키스하기 위해 고개를 내리자 손으로 그의 입을 막곤 밀었다.
“누구 마음대로?!”
“안 가도 된다고 했었잖아.”
“그건 네 희망사항 이지!”
“원하기도 했지만, 곧 사실 이기도 했는데”
기회를 노려 자꾸만 키스하려는 머슨 때문에 난 결국 침대에서 벗어났다. 지금 키스가 문제가 아니야!
“바른 대로 말해”
“에리나가 생각하기에, 마왕성으로 이동됐던 내가 자력으로 여기까지 다시 올 수 있을거라고 봐?”
“아니, 전혀!”
조금만 마력을 써도 정기를 달라고 징징 거리는 너인데, 무슨 수로 그 마족을 이기겠냐?
내가 단칼에 대답하자 그가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침대에 앉은 채로 미소 지으며 나를 올려다 보는 눈에는 사랑이 가득해 보였다. 그, 그렇게 쳐다보지 마!
“맞아. 하지만, 좀 고민이라도 하고 이야기 해주면 안 돼?”
그가 웃음기 어린 말투로 이야기했다. 고민하고 말고가 어딨어? 사실인데.
“...그럼 그 마족이 진짜 보내줬단 말이야?”
머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내 말에 대답을 하기 위해서 라기 보다는 나를 보고 즐거워 하는 것이 주고 내 질문은 부인 느낌이었다.
“왜 그냥 보내줬어?”
“소멸 당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꿀꺽. 침이 넘어갔다. 발 끝 저 밑에서부터 환희가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진짜? 정말?
“확실해?”
“에리나가 말했잖아. 나 혼자선 다시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맞다. 다시 생각해도 머슨이 마족들을 뚫고 도망쳐 나오는 것은 상상도 되지 않는다. 만약 천운이 따라주어 도망쳤다 해도 마족들이 다시 데리러 오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그렇다면 머슨의 주장대로 소멸당하지 않음을 알고 풀려(?)난 것이 진짜란 말인가? 하긴, 그것 말고는 다른 방법은 없었다.
만세! 안도의 기쁨이 터져나왔다. 고질적인 문제가 뻥 뚫린 듯 시원했다. 외로워 하지 않으려, 그리워 하지 않으려 굳게 닫아 놓았던 마음의 문이 발길질 한 번에 후드득 잠금쇠가 무너져 내렸다. 난 앉아 있는 머슨의 양 뺨을 잡고 얼굴 곳곳에 잘게 입을 맞추었다. 쪽 쪽 쪽 큰 소리를 내며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머슨의 입술 위에 닿았을 때는 움-아! 소리를 내며 길게 맞추었다.
“머슨! 그럼 나랑 수도도 같이 갈 수 있고, 억지로 헤어지지도 않아도 되고, 가능 하다면 세자인에 다시 돌아왔을 때 마을 사람들 웃는 얼굴도 같이 볼 수 있어”
“가능해”
웃으며 그의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그리곤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 할 말을 속으로 중얼 거렸다.
책의 흐름대로 세르데벨라와도 만날 수 있게 됐어.
욱신- 마음 한켠이 아려왔지만. 애써 무시하며 감정의 깊은 곳으로 밀어 넣었다. 지금은 그냥 당분간 머슨이 옆에 있을 수 있다는 걸 안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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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재회라고 하기에도 우스울 정도지만, 둘 만의 뜨거운 재회를 하고 짐을 꾸렸다. 바로 수도로 갈 채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세자인이 가구수가 적어서 이기도 하지만 워낙에 소문이 빨라, 나와 머슨이 수도로 가 체닌을 데려온다는 것을 안 마을 사람들이 여러 가지 것들을 챙겨주었다. 타지에서 다치면 큰일 난다면서 기본적인 약재를 담아 놓은 주머니부터, 빵, 과일, 말린 육포 등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마을 사람들 끼리 주머니를 털어 7골드를 주었다.
“와, 나 금색 동전 처음 봐.”
받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많은 양이였다. 낡은 중고 침대 하나를 사는데 1골드가 들었는데(그것도 네 달을 모아서 샀다.) 무려 7골드라니. 감히 받아도 되나 싶어서 두 손에 얹어진 상태로 어쩔줄 몰라 하는데, 크리에타 아주머니가 그것을 집어 머슨의 품 속으로 넣어버렸다.
“젊은 색시는 돈 쓸 줄 모르는 것 같응게, 젊은 남편이 가지고 있는 것이 났것어”
마을 사람들이 맞장구를 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아, 그리고 무기도 받았다. 세자인과는 너무도 안 어울리는 단어였지만 확실히 무기였다. 뭐, 이가 좀 빠지고 과일 하나 썰리나 싶을 정도로 날이 닳아 있는 단검이었지만 없는 것 보다는 나았다. 무기를 준 촌장님한테 출처를 묻자 낫 대신 벼를 벨 때나 썼다고 한다. 순간 할 말을 잃었지만. 여하튼 감사합니다.
옷장을 뒤져 옷을 정리하다가 체닌이 주고 간 드레스가 보였다. 발을 덮는 치마 밑자락 까지 치렁치렁 달린 레이스와 덧대어진 많은 안감으로 입기에도, 들고 가기에도 몹시 불편해 보였다. 딱히 입을 일도 생길 것 같진 않고 말이야.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한참을 고민 하다가 결국 손 도 대지 않고 옷장 문을 닫았다. 혹여나 체닌이 세자인에 왔을 때 입으라고 다시 돌려 주지 뭐.
편한 원피스 몇 벌과 잠옷을 챙기고, 머슨의 셔츠와 바지 까지 꼼꼼하게 배낭에 담았다. 그러다 문득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완전히 새카맣게 잊고 있었던 것. 2년 전 안 쓰는 상자 구석에 넣어 두고 한 번도 꺼내 보지 않았던 것. 바로 마왕의 망토 였다.
하얗게 먼지가 쌓인 상자를 후 불자 얼굴 위로 마구 피어 올랐다. 콜록, 콜록. 손을 휘저어 날려 보낸 뒤 망토를 꺼내 들었다. 지난 2년간 비도 오고, 무더위도 찾아왔던 지라 곰팡이라도 폈으면 어떡하나 싶었으나 걱정이 우스울 정도로 망토는 멀쩡했다. 검은 빛깔에 윤기가 흐르고 박혀 있는 보석들이 제 모습을 뽐내며 빛을 내었다.
“뭘 보고 있어?”
머슨이 옆에 쪼그려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