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편
<-- 6. 거짓말쟁이 -->
기억이 되돌아와 에리나를 죽이겠다 생각했던 마왕은 다음 날도 ‘머슨’인 채로 에리나 옆을 지켰다. 신기했다. 그녀와 보낸 두 달 가량의 짧은 기억들이 수천년의 세월을 덮을 만큼 강렬했다. 우연이라도 손끝이 스칠 때면 심장 박동이 제멋대로 빨라졌다. 머슨이라 부르는 목소리가 머리를 흔들만큼 듣기 좋았고, 순박하고 고운 얼굴에 미소가 피어오를 때면 그녀의 발 밑에 전 대륙을 바치고 싶은 충동도 들었다.
휘몰아치는 감정을 막을 길이 없었다. 가녀린 몸으로 따뜻하게 안아주던 감각을 잊을수 없다. 마왕은 혼란스러워 하면서도 결국 그녀의 옆에서 기억을 잃은 척 연기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신의 어지러운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그녀를 소멸시키는 것을 미루는 것이라고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강한 결심을 가지고 소멸 시키기 직전 까지도 갔었다. 그러나 ‘머슨’ 이라며 불러오는 그 목소리 하나에 치밀하고 높게 쌓아올려진 탑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은 절대 그녀를 헤치지 못 할 것임을. 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그녀를 헤치게 하는 일같은 건 하지 못하게 할 것임을.
마왕의 하루는 에리나로 시작해서 에리나로 끝났다. 마왕이 부러 어리숙한 티를 내면 쏜살같이 달려와서 챙기는 모습이 귀여웠다.
“머슨, 나중에 먹으려고 그렇게 빵부스러기를 붙여 놓는 거야?”
에리나가 식사를 하다 말고 몸을 일으켜 마왕의 얼굴을 매만졌다. 마왕의 입꼬리가 숨길 수 없이 치켜 올라갔다. 적안 가득 에리나를 담으며 부드러운 손길을 느꼈다. 마왕의 입가에 집중하며 열심히 털어내던 에리나가 그의 시선을 느끼고 눈을 마주쳤다. 멈칫. 에리나의 손이 굳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왜, 왜 그렇게 웃고 있는 거야?!”
그녀의 귀가 빨갛게 변해있는 것이 보였다.
“예뻐서”
“뭐?”
“에리나가 예뻐서 웃음이 절로 나와.”
‘쿵!’
난데없이 에리나가 식탁위에 이마를 내려찍었다. 마왕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덕분에 의자가 밀려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에리나?”
“...심장에 안 좋으니까 그런 말 하지마.”
부끄러워 하고 있는 것이다. 여느 소녀들답지 않게 방법도 독특하다. 에리나는 감정이 얼굴 위로 족족 들어나는 편이였다. 속마음이 빤히 읽힐 정도로. 원체 그녀가 솔직하고 당당한 성격이라 천성적으로 거짓말을 잘 못하는 듯 싶었다.
세자인에서 처음 맞는 여름. 엄지손가락 만 한 바퀴벌레가 날아 든 적이 있었다. 저도 벌레가 무서워 얼굴이 하얗게 질려 놓고는 오히려 마왕을 안심시켰다. 마왕은 그것이 너무나 미약하고 보잘 것 없는 생명체라 창틀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먼지를 바라보듯 했다.
“머, 머슨! 걱정 하지마! 내가 곧 잡아… 으아악! 벌레 새끼야! 얘 나나? 날아?!”
“날아서 들어 왔잖아”
“오, 신이시여. 바퀴야 좋은 말 할 때 그냥 다시 돌아가. 아니 돌아가주세요”
숨을 쉬는 것 만큼이나 쉽게 벌레를 잡을 수 있었으나, 도중에 신을 찾는 에리나의 말이 빈정을 상하게 했다. 마왕을 옆에 두고 신을 찾다니. 물론 에리나는 종교도 없었고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었지만, 사랑에 빠져 모든 것이 큰 의미로 다가오는 남자에게는 그렇지 않게 들린 모양이다. 마왕은 조금 골려줄 생각으로 가만히 뒤에서 에리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빗자루를 검처럼 쥐고 마왕을 보호했다. 부들거리는 팔이 등 뒤로도 느껴졌다.
에리나는 연신 ‘내가 지켜줄게! 걱정마!’를 외쳤다. 마왕은 여기서 궁금해졌다. 그녀는 왜 그토록 자신을 보호하려 하는가?
바퀴벌레로 인해 에리나의 얼굴에 눈물이 떨어지기 직전 마왕이 벌레를 밖으로 튕겨내버렸다. 물론 마법을 썼기에 에리나는 스스로 날아가 버린 줄로만 알았다. 더위에도 창문을 꼭 내려잠갔다.
마왕은 기회를 보다가 에리나에게 슬쩍 물었다. 왜 날 지켜줘? 긴장으로 숨을 몰아쉬며 아직까지 놓지 못하는 빗자루를 멍하니 바라보던 에리나가 고개를 갸우뚱 해보였다.
“넌 약하니까.”
피식. 그렇구나. 그러나 마력을 떠나 체격상으로만 봐도 마왕이 힘으로는 월등해 보였다. 에리나가 침대에 풀썩 주저 앉으며 말을 이었다.
“기억을 잃으면 무서울거야. 텅 빈 백지 한 장만 주고 다짜고짜 세계지도 그리라고 하면 얼마나 막막하겠어. 몸은 어른이지만 생각은 이제 막 태어난 거나 다름없을 거 아니야. 그러니까 몸도 정신도 어른인 내가 지켜줘야지, 안 그래?”
마왕의 가슴 속에 따뜻한 것이 피어 올랐다. 꽃잎이 만개 하듯 화사했고 향이 풍기는 것 같았다. 마왕은 멈추지 않고 에리나에게 더 물었다. 그렇다면 왜 에리나가 날 지켜주는거야?
그녀의 눈동자가 오른쪽 위를 향한다. 머리를 긁적이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당황하여 무슨 대답을 할지 판단이 서질 않는 것이었다.
“...그니까”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옆 자리를 툭툭 쳤다. 마왕이 그녀의 옆에 앉았다.
에리나가 팔을 들어 목을 감싸 앉았다. 목 위에 닿는 맨살의 피부가 자극적이었다.
“미안해. 난 네 인생을 망쳤어.”
각인의 증표를 깨트린 일을 말하는 것임이 분명했다.
“미안하다는 말로 해결 되지 않는 다는 거 알아. 근데…… 미안. 난 나빠. 나중에, 좀... 나중에 말이야. 기억을 찾으면 …”
그녀가 힘을 주어 안는다. 생각이 복잡한 듯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가 불편한 숨과 함께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난 거짓말쟁이야.”
‘머슨’이 실은 마왕임을 속이고, 왜 기억을 잃게 됐는지 설명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말한 것이었다. 마왕은 그 속뜻을 정확하게 눈치채고 있었다. 에리나의 허리를 끌어 안으며 그녀의 어깨에 턱을 부비었다.
“괜찮아.”
그가 이야기 하자, 에리나가 바람빠진 헛웃음을 짓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곤 마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마워”
고맙긴 뭘. 더한 거짓말은 마왕 그가 하고 있으니. 딱히 고마워 할 필요는 없다고 그는 속으로만 이야기 했을 뿐이다.
마왕은 처음부터 기억이 돌아 온 것을 숨길 생각은 아니었다. 감정을 깨닫고 시간이 좀 흐르자 그녀에게 솔직히 다 말 할 생각이었다. 기억이 되돌아 온 것이 알려지면 지금 같은 보살핌은 확연히 줄어들어 아쉽겠지만, 깜짝 놀라할 그녀의 얼굴도 궁금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기억이 되돌아 온 것 같은 말이나 표정을 지을 때면 그녀의 얼굴이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공포로 인한 것이라기 보다는 불안, 초조 따위의 감정과 더 비슷했다. 언뜻 상실감도 비춘다. 몇 번이고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같은 표정을 짓는다. 두려워 할 것 없다고 안아주려 하면 금방 꼬리를 자르고 도망칠 것 같았다.
그녀는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는 듯 했다.
‘아직 때가 아니야.’
그 애처로운 모습에 마왕은 다시 ‘머슨’으로 돌아갔다. 그럴때면 에리나가 그의 몸을 힘주어 와락 끌어안았다. ‘미안해! 미안해!’를 외치면서. 일부러 그녀의 포옹을 받으려 기억이 돌아온척(?) 연기할 때도 종종있었다.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자 마왕은 기억이 되돌아 왔다는 것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마력이 부족한 척 힘들어하는 기색을 보이며 마법을 썼던 처음과는 다르게 이제는 눈치 보지 않고 마법을 남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의 순수한 에리나는 마력이 고갈될까 전전긍긍하며 입술을 내어준다.
잠시 지난 날의 감상에 젖어있던 마왕이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공포로 인한 눈물자국이 안쓰러웠다. 잘 덮여 있는 이불을 괜히 다시 들추며 그녀의 몸에 꼭 맞게 덮어주었다.
“우응”
에리나가 마왕의 품으로 파고 들며 깊게 안겼다. 두려운 기억은 잃고 좋은 꿈을 꾸는지 편안한 표정이었다.
마왕이 손을 튕기자 여름 곤충의 지저귐도 멎고 새벽바람의 수다도 잠들었다. 고요한 적막 속에서 그녀의 숨소리만이 유일하게 울려 퍼졌다. 집 안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커튼이 닫힌다. 에리나가 행복한 꿈을 오래 꿀 수 있도록 마왕이 그녀만을 위한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녀를 담은 적안에는 강한 소유욕과 더불어 이질적인 따스함이 베여있었다.
========== 작품 후기 ==========
*머슨 너어어~? 기억 되돌아왔으면서!
*독자님 : 머슨에게 연기 대상을!!!
작가 : 잘생겨 돈많아 존나세 이면서 연기 대상까지 받다니!(부들부들!)
*독자님 : 완결은 언제인가요?
작가 : 40%정도 진행되었습니다!
*독자님 : 머슨 기억이 돌아온지 모르는 여주는 삽질중인가요?!
작가 : (끄덕)(안쓰러움)
에리나 : 왜? 나 뭐, 나 불렀어?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후원쿠폰 주신 박베리 님! 암흑속에사는뱀 님! 희야^^* 님!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