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편
<-- 2. 굳이 그녀를 환영해야 할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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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닷 타닷’
빗방울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 쉴 새 없이 창문을 두드렸다. 창문 앞에 의자를 끌고 앉아 턱을 괴고, 그칠 생각이 없어 보이는 비 내리는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어우, 착시 생길 것 같아.
“언제 잠잠해 지려나”
하늘이 어두워 시간의 흐름도 잊어버렸다. 그 탓인지 머슨도 평소보다 늦게 까지 침대에 누워 곤히 단 잠을 즐기고 있었다. 어젯밤, 괜히 애를 혼자 두고 갔던 것이 계속 마음이 쓰인다. 낮은 숨소리를 규칙적으로 내뱉으며 편안하게 잠 든 모습이 어딘가 모르게 보호본능을 자극했다. 오구 오구 푹 자.
머슨에게 다가가 가슴 밑으로 훌렁 내려간 이불을 턱 바로 아래까지 끌어 올려주었다.
“...비 따위가 무슨 상관이냐”
굵고 거친 빗줄기가 빠르게 땅으로 쏟아지는 것이 체닌과의 단판을 짓기에 썩 어울리는 날씨였다.
“내가 처리 하고 온 다.”
집 안에 하나 밖에 없는 검은 우산을 세게 쥐었다. 아, 마치 어느 영화의 클라이막스 장면에서 숙적을 앞에 두고 검을 쥐는 주인공의 모습 같기도 하다.
휘이잉-!
문을 열자 비바람이 집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바닥 젖겠다! 빨리 우산을 펴고 집 밖으로 나섰다. 그런데 우산이 다 무슨 소용이야. 앞, 뒤, 옆 심지어 밑에서도 빗물이 치고 들어 왔다.
“비 따위에 물러설 내가 아닛 퉤, 퉤퉤”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말 하는 건 자제 해야겠다. 결국 우산을 접고 허리춤에 끼워 넣은 채로 걸었다. 전쟁을 앞둔 용맹한 기사 처럼!
‘쾅! 쾅!’
‘똑똑‘ 이 아니라 ’쾅쾅‘ 이다. 주먹으로 힘껏 문을 두드렸다. 휘이잉- 머리카락이 자꾸 뺨을 때려서 너무 아팠다. 문 좀 빨리 열어 주세요.
“뉘슈?”
“촌장님, 에리나 예요”
“비가 억쑤로 오는디, 먼일이여?!”
집 안으로 들어서자 온 몸에서 물이 뚝뚝 흘렀다. 본의 아니게 촌장님 집 현관에 작은 우물을 만들었다.
“웬 거지? 아, 에리나양.”
네 이년...
체닌이 거실 쇼파에 앉아 몸을 깊게 기대며 여유로운 자세로 날 맞이했다. 바로 앞자리에 촌장님의 흔들의자가 옮겨져 있는 거 보니 둘이서 마침 대화를 하던 중이였나 보다.
“촌장님 죄송해요. 소, 소중한(말하기 진짜 힘들었다.) 손녀딸 분한테 한 마디좀 하겠습니다.”
“잉? 뭐시여?”
체닌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며 눈짓해 보였다.
‘어디 지껄여봐’
오냐, 그리 해주마. 한국인의 언어가 어떤 것인지 네 년에게 똑똑히 보여주마! 난 빗물이 집 안으로 더 고여들까 차마 움직이지는 못하고 그 자리에서서 호흡을 크게 먹었다.
“이 장마에 생리 같은 년아, 빡통이 무식하면 양심이라도 있어야지. 어디 순진한 애한테 약을 먹여서 니 더러운 욕정을 풀게 해?! 아스팔트에 갈리고 싶지 않으면 당장 가서 사과해. 백작 부인은 무슨! 씨발 엿같은 신분제! 동학농민운동 만만세다 이 개같은년아! 민주주의 회초리로 종아리 불쌀라 볼래?! 어?!”
“...”
“...”
“더 말해도 돼요?!”
내가 다시 호흡을 먹자 촌장님이 팔을 들어 날 다급하게 말렸다. 아니 놔 봐요. 잠깐만.
“...허! 어디 상스러운..”
“내가 상스러운게 뭔지 보여줘?”
내가 우산을 들고 달려가자 체닌이 움찔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때 내 허리에 촌장님이 매달리며 달라붙었다.
“아이고, 젊은 새댁 진정해! 진정해!”
빗물에 축축히 젖은 내 옷 때문에 촌장님의 옷에도 물이 스며들어갔다. 애원하듯 말리는 촌장님을 무시 할 수 없어. 나는 우산을 내려놓았다.
“촌장님 젖어요.”
촌장님의 어깨를 잡고 나에게 떼어놓았다.
“...어제 일 때문에 그래? 참나! 그 약 불량이야.”
“뭐?”
“먹자 마자 바로 신호가 와야 되는게 정상인데, 아무리 먹여도 눈 하나 꿈뻑 안하던데? 안타깝게 됐어. 그치? 아니면... 머슨의 거기가 문제가 좀 있다거나?”
저 샹년이
촌장님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결국 난 주먹을 꽉 쥐는 것으로 분노를 다스렸다. 이때 체닌이 겁도 없이 내 앞으로 또각 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걸어 왔다.
“할아버지, 제가 말씀 드린 대로. 내년에 세자인을 싹 비워 주셔야해요?”
이건 무슨 개소리야. 체닌의 말은 촌장님을 향했지만 두 눈은 나를 바라본 채 였다. 마치 나한테 이야기 하듯이.
“아가, 이 마을 사람들 여서 나고 자랐는디 어디로 가라는 거여”
“뭐, 그건 그 사람들 사정이구요.”
체닌이 몸을 돌려 촌장님 가까이로 다가갔다. 눈썹을 내리며 비련의 여주인공 같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쥐뿔 가진거 없는 내가 어떻게 백작가로 시집 갈 수 있었겠어요? 다 이 땅 하나 때문이라구요. 내가 백작가에서 쫒겨나서 또 버림받는 꼴을 보고 싶으세요?”
촌장님이 대꾸하지 못하고 입을 앙 다물었다. 그의 눈빛에 수만가지의 감정이 교차하는 듯 싶었다.
“잠깐, 이 땅을 왜 니가 맘대로 주라 마라야? 다른 마을 사람들 허락은?!”
답하지 못하는 촌장님 대신 내가 나섰다.
“그걸 내가 왜 맡아야 하지?”
“뭐? 그거야...”
집 주인들 이니까. 라고 얘기 하려다 내가 아주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여긴, 소설속 안 이라는 것. 우리가 지금까지 편하게 촌장님 촌장님 불렀지만 사실 그는...
“이 땅이 전부 할아버지 영지인데 내가 왜?”
그래, 영주님이구나. 그리고 마을 사람들 전부 농노나 소작농. 촌장님의 낯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말했어요. 내년 까지요. 이 땅만 얻으면 시골에서 굴러들어온 첩이라는 호칭 다 떼고 백작가에서 어깨 좀 펴고 다닐 수 있다구요. 네? 할아버지!”
체닌이 왜 귀찮아 하면서도 마을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는지 알겠다. 자신의 유일한 무기가 될 이 땅을 눈에 익혀두고 잘 파악해서 백작에게 넘겼을 때 필요의 존재가 되고자 했던 것이겠지. 그리고 그녀가 백작에게 사랑 받지 못하는 부인이라는 사실도 이제야 알아차렸다. 명색이 백작부인인데 시중들어줄 사람 하나 없이 마부 한명 딸랑 보낸다는 것이 대표적이고, 눈에 불을 켜고 땅을 가져다 바치려는 게 두 번째다.
“이봐, 체닌. 너 혼자 편하자고 여기있는 마을 사람 전부를 내쫓는 다는 건 좀 이기적이지 않아?”
“이기적? 내가 누릴 수 있는 거 누리겠다는게 그게 뭐가 이기적인거야. 오히려 자기 것도 아니면서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뻔뻔하고 이기적인 거겠지”
“평생을 이 땅을 위해서 일 하신 분들이야. 니가 쓰다 버린 장신구 하나에도 기뻐하면서 고마워 하신 분들이라고”
“그들의 낮은 수준을 내가 굳이 동정해야 할 필요가 있나?”
탐욕에 눈이 멀어 양심과 도덕이라는 글자가 지워진 것이다. 교과서에 나올 법한 교훈적인 말로는 저런 멘탈을 뜯어 고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대학 4년동안 수많은 조별과제를 하면서 느낀 결과지. 그럴 때 답은 하나다. 본때를 보여주는 것
“...내가 촌장님 봐서 참으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니가 참아 봤자...아악!”
한국 드라마에서 다년간 학습해 온 솜씨로 난 체닌의 머리 채를 잡아 끌었다. 체닌이 놀라며 내 손을 떼려 손톱을 박아댔다. 하지만 너의 솜방맹이 같은 반격은 나에게 통하지 않아!
========== 작품 후기 ==========
연참입니다! 아니... 맙소사 ㅠㅠ 선작수랑 코멘트 수 보고 진짜 한 편 더 올리지 않을 수 없었어요!! 상에 행복해서 날아갑니다 훨훨~~
앗, 그리고 후,후원쿠폰이라는 걸 받아보게 되다니! 〈BANBAN23 님 청루화 님〉 감사합니다!
너무 기쁘니까 한편 더 올리게요!! 다음편으로 슝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