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편
<-- 2. 굳이 그녀를 환영해야 할까요...? -->
하루 이틀 지내다 돌아 갈 줄 알았던 체닌은 예상외로 마을에 오래 머물렀다. 촌장님이 그리워서 세자인에 온 건 아닌 것 같고 고향의 향수 때문에 온 것은 더더욱 아닌 것 같았다. 그럼 대체 왜 온 거야? 여러 사람 귀찮게. 아, 촌장님 서운해 하시겠다. 방금 생각한 말은 취소 취소!
체닌은 연신 짜증나를 반복 하면서도 매일 같이 마을 이곳 저곳을 둘러 보았다. 그럴 거면 얌전히 방안에서 고상하게 티타임이나 즐길 것이지 왜 굳이 사서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다. 뭐 체닌이 마을을 구경하던 불평 불만을 하던 그게 나와 무슨 깊은 상관이 있겠냐만은... 지금 같은 상황에선 있었다. 상관이.
“손 좀 잡아 줄래요?”
우리도 그녀와 함께 동행 한 채였으니까. 마차가 지나 갈 수 없는 길목이 나오자 체인은 분노를 억누르는 한숨을 쉬더니 어쩔 수 없이 엉덩이를 떼었다. 머슨이 내리고 내가 뒤를 따르려는데 으엇, 옆으로 툭 밀어졌다.
“...저게”
체인이 엉덩이로 날 밀어 버리곤 호호 소리를 내며 마차 입구에서 어정쩡 몸을 구부렸다. 그리곤 하얀 레이스 장갑을 낀 손을 우아하게 뻗었다.
“어서요”
머슨이 가만히 서있기만 하자 체닌이 재촉했다. 묘한 줄다리기가 시작되고, 시간이 좀 흘렀는데 누구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내가 체닌의 뒤에서 손을 잡아주라는 제스쳐를 보냈다.
그냥 손잡고 내려줘! 나도 내리자 좀!
머슨이 눈을 빛내며 나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드디어 팔을 뻗어 체닌을 잡아 내려주었다. 체닌이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올리며 ‘고마워요’ 라고 짧게 인사했다. 고상한 귀부인처럼.
으휴, 갇혀 죽을 뻔 했네.
“어, 어어? 야!”
내리려고 하는 순간에 허리가 잡혔다. 자각할 틈도 없이 머슨 에게 안겨 내려왔다. 그런데 아직 발이 땅에 닿질 않았다. 음... 놔줄래?
“흠흠!”
체닌이었다. 머슨의 팔을 툭툭 쳤다. 이제야 발밑으로 단단한 바닥이 느껴진다. 체닌이 몹시 불쾌한 눈빛을 노골적으로 보냈다. 흥! 소리를 내며 앙칼지게 또각또각 걸어갔다. 구두 불편할텐데.
아니나 다를까 우린 10분도 채 되지 않아서 마차로 다시 돌아왔다. 그것도 머슨이 체닌을 업어서 말이지. 체닌은 은근 슬쩍 우리 머슨의 가슴팍을 터치했다. 그거 성희롱!
뿐만 아니라 체닌은 모든 일정에 우리를 데리고 다녔다. 뭐, 나는 얼떨결에 끼게 된 거고 본래는 머슨만 같이 행동하길 원했을 것이다. 체닌이 촌장님에게 오랜만에 마을을 오니 낯선 것도 있고 소소하게 대화 할 사람도 있으면 좋겠다고 머슨을 지목했다. 촌장님은 손녀의 흑심을 모른 채 머슨과 ‘나’에게 동시에 부탁했지만 말이다.
나야 한 없이 귀찮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체닌과 머슨이 함께하여 기분 상할 일이 줄었다. 폴아저씨가 수확해 온 복숭아를 그 자리에서 한 입 먹어보라고 청했을 때 체닌의 표정이 벌레씹듯 구겨지는 것을 난 보았다. 그러나 체닌은 머슨의 눈치를 한 번 보더니 억지로 웃으며 그것을 베어 물었다. 이것 뿐 만이 아니었다. 크리에타 아주머니가 피부에 좋은 약초를 입욕제로 쓰라며 곱게 빻아서 건내 주었을 때도 체닌은 약초 고유의 풀냄새를 맡더니 그것을 손으로 툭 쳐버렸다. 머슨이 매정한 투로 ‘주워’ 라고 얘기하자 체닌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어머, 손이 미끄러져버렸네?” 하곤 주워 올렸다. 감사하다는 인사도 빼먹지 않고.
문제는 틈만 나면 머슨의 몸을 더듬고, 그를 유혹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는 것이었다. 일부러 헐렁한 원피스 잠옷을 입고 나와 한쪽 어깨를 드러낸다던가, 넘어지는 척 하며 머슨의 팔을 붙잡아 가슴을 들이미는 행동등 말이다. 내가 보지 않고 있을 때도 분명 더한 짓을 했겠지. 그러나 머슨은 길가에 돌멩이 바라보듯 일말의 관심도 반응도 보여주지 않았다. 이젠 그만 포기할 법 도 한데 체닌은 오기가 생겼는지 그럴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급기야
“머슨 씨만 있어주면 돼요. 에리나씨는 가보세요”
방 가구배치를 다시 하고 싶다면서 머슨을 붙잡아 두는 것이었다. 아니, 뭘 믿고 우리 토끼같은 머슨을 혼자 둬? 절대 안 되지!
“조금이라도 도와줄게요. 머슨 혼자 두기에도 좀 걱정되고”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니고 걱정은 무슨, 유난이라는 생각 안 드시나봐요? 그리고 가구만 옮기는 거라 여자는 필요 없어요.”
가구만 옮기기는 개뿔! 촌장님도 집에 안계시고, 부엌에 순백의 테이블 보는 왜 깔아 두는데? 얼씨구 테이블 위에 와인잔은 왜 두 개야?!
“그래도 혼자 보단 여럿이 하는게…”
“말했잖아요, 여자는 필요 없다고. 그리고 아쟈 아주머니께서 부르신다니까요?”
이건 웬 진부한 개구라야
“어머 표정이 왜 그러시죠?”
나도 모르게 썩은 표정을 지었나보다. 난 허리에 손을 척! 올리곤 머슨 앞을 막아섰다.
“안 갑니다. 안가요!”
“푸흡”
웃어? 체닌이 눈으로 내 뒤를 가리켰다. 뭐, 왜
“젊은새댁! 하도 안 오길래 뭐하나 했더니 여기 있었구먼, 우리집으로 후딱 오라는 말 못들은겨?”
“네? 아 그... 진짜 였어요?”
“그럼 가짜여? 언능 따라 오드라고!”
아쟈 아주머니가 빠른 발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아씨, 어쩌지? 머슨은 아무 생각이 없는 건지 도통 알 수 없는 얼굴로 날 바라만 볼 뿐이었다. 아쟈 아주머니를 보면 정말 바쁜일 인 것 같고.... 으으!! 머슨의 어깨를 양 손으로 잡았다.
“머슨, 가구만 옮겨주고 곧바로 집으로 와 알겠지?”
“응”
그리고 그의 옷깃을 내 쪽으로 당기었다.
“절대 마력 쓰면 안 되고, 응?”
작게 이야기 하자 머슨이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
“그럼, 이따 봐”
“잠깐, 에리나”
머슨이 한쪽 무릎을 꿇더니 내 신발을 톡톡 털기 시작했다.
“뭐야?”
어디서 나온 건지 흰 가루들이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흔적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부엌 바닥에 가루 뭉텅이가 쏟아져 있는 게 보였다. 내가, 저걸 밟았구나.
“뭐해요?! 안가요?!”
아씨 깜짝이야. 갑자기 큰 목소리로 훅 들어오는 체닌 때문에 어깨가 들썩 거리며 놀랐다. 알았다. 간다 가!
“이제 그만해 머슨. 나 늦겠다. 꼭 조심해”
불편한 마음을 뒤로 하고 아쟈 아주머니 댁으로 달렸다.
가구 수가 몇 없기에 바로 옆집이라 하더라도 족히 5분은 걸렸다. 발에 모터 단 듯 뛰어 도착하자 이미 마을 여자들이 다 모여 있었다.
“무슨 일이예요?”
“젊은 새댁 어서 앉아봐”
빈 의자를 찾아 아주머니와 할머니들 틈바구니에 쏙 껴들었다. 동그랗게 원을 둘러 앉아 있는 그녀들은 모두 한 곳을 바라봤다.
“히익, 이게 다 뭐예요?”
“촌장님 손녀딸이 잔뜩 가지고 왔어, 우리 나눠 쓰라고”
화장품이며 장신구, 손수건, 옷 등 온갖 사치품들이 한 상자 였다. 물론, 새 것은 아닌지 모두 손 떼가 타있던 것이지만. 그래도 다들 좋으신지 이것 저것 구경하는 감탄사가 끊이질 않았다.
“옷들은 싹다 젊은 새댁이 입어야 겠구먼”
두 벌 뿐이지만. 난 엉거주춤 그것들을 받아 들었다. 근데...
“이거 때문에 그렇게 급하게 부르신 거예요?”
“잉, 뭐 딴 것이 있겄어?”
“이런 건 내일 보여 줘도 되잖아요.”
“오늘 안 가져가면 내일 싹다 버려분다는디, 언능 쟁여가야제. 그리고 촌장님 손녀딸이 꼭 젊은 새댁이 써줬으면 좋겄다고 촌장님한테 당부를 당부를 했는가벼, 젊은새댁이 입은거 꼭 보고 싶다고.”
“...그러면 내일 버리지 말고 날 따로 주지”
“그 성품이 어디 가겄어? 젊은 새댁 마음에 드는거 있으면 언능 챙겨가드라고”
“아뇨 전 옷으로도 충분해요. 다른 분들 고르세요”
억지로 웃어보였다. 그냥, 날 머슨과 떼어놓으려는 속셈 이였구나. 속으로 이를 빠득 갈았다. 다시 돌아갈까 했지만 계속해서 말을 걸어 오는 아주머니들 탓에 쉽게 나갈 기회를 찾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가만히 앉아서 아주머니랑 할머니들 을 보니 마음이 아릿하게 아파왔다. 세월과 일에 쫓겨 예쁜 옷 하나 제대로 입을 날도 없었기에 더욱더 신이나신 듯 했다. ‘내가 다음에 맛있는 것도 많이 사주고 호강시켜 줄게!’ 이 이야기가 갑자기 왜 떠올랐을까? 곧 떠나야 하는 내가 꺼냈다가는 무책임한 헛소리가 될게 뻔한 이 이야기가 말이지.
싸구려 장신구 하나에도 어색한 모습으로 몸에 대보며 즐거워하는 모습이 뭉클한 감정을 들게 하면서도 굉장히 따뜻했다. 소소한 행복이 집 안에 가득 들어찼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나도 옆에서 거들었다.
“이 목걸이는 레테 할머님 하시면 딱 어울리겠다. 눈동자가 에메랄드 빛이라 어울릴 것 같아요. 난 레테 할머님한테 한 표!”
“아따, 젊은 새댁이 역시 보는 눈이 있구만? 나는 뭐시 어울린단가?”
“자네는 요 빨간 스카프가 괜찮다니께”
“음, 안목이 있으시네요”
결국 상자는 바닥을 드러내고 모두들 한 두 개씩 공평하게 나누어 가졌다. 촌장님도 안계시고 마을 사람들도 많이 모여서 기회가 된 김에 난 궁금 하던 것을 조심 스럽게 물어봤다.
“체닌이요, 백작가로 시집가고 왜 3년이나 안 온거래요?”
“부모가 사고로 가고 촌장님 손에서 컸는디, 어릴 때부터 시골 싫다고, 할아버지 창피하다고 떼를 써대더만 결국 나이가 서른 살이나 많은 놈이랑 덜컥 결혼까지 한 아가 뭐가 좋다고 오겄어”
“서, 서른살이요?!”
“도시로 나간게 좋았는지, 결혼 하고 딱 한번 오더니 그 후로는 연락도 없다가 이번에 온 겨. 나도 갸가 왜 왔는지는 모르겄지만”
그러면서 다들 한 마디씩 거두었다. 시작 된 수다는 끝을 모르고 달렸다. 결국 정리하자면, 원래 수도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던 체닌은 도적떼에 의해 부모님을 잃고 촌장님이 있는 시골로 내려와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았다고 한다. 19살 혼인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무작정 혼자 수도로 떠나 저명한 백작가의 첩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세자인에 있을 때도 그저 바르기만 한 아이는 아니였는지 사고란 사고는 다 치고 다녔고 그럼에도 촌장님은 체닌에게 꾸중 한 번 내질 않았다. 부모 없이 자란 자신의 손녀딸이 안쓰럽고 딱해서 모질게 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이 많은 백작과 결혼 할 때에 촌장님은 그 해가 지나 도록 눈물로 밤을 보냈지만 정작 체닌은 만족해 하고 좋아하니, 촌장님도 마지못해 체닌의 결정을 존중했다.
뭐, 본인이 행복하다면 된 거지... 이렇게 이해 하려는데 시원하지가 않았다. 수다를 마치고 선선한 여름밤 공기를 맞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촌장님 집 앞을 요리조리 보았으나 이미 소등을 한 듯 싶었다.
머슨 무사히 집에 갔을까?
어느 순간 내 발걸음이 빨라져 있었다. 멀리서 보이는 집 창문에 희미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집에 왔구나.
“머슨!”
빛이 새어나오는 내 방으로 향했다. 머슨은 얌전히 두 다리를 뻗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별 일 없었... 너 왜이래?”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를 넘겨주는데, 손에 닿은 이마가 불덩이다. 눈이 번쩍 뜨였다. 몸 이곳 저곳을 만져봐도 온통 뜨겁다. 이러다 타죽는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심각했다.
“...에리나”
“어떻게 된 거야?! 아니, 잠깐만 있어봐”
========== 작품 후기 ==========
끄앙 ㅠㅠ 생각보다 집에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ㅠㅠ 이제야 올리네요 죄송합니다!
선작,추천,코멘트 감사합니다 ㅠㅠ 와 진짜 들어올때마다 기쁨의 맥썸노이즈8ㅅ8!!!!!
늦었으니 한 편 더 올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