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편
<-- 2. 굳이 그녀를 환영해야 할까요...? -->
“촌장님, 장작이요!”
‘똑 똑’
10분째 문 앞에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라면 곧장 문을 열고 우리를 반겨야 할 촌장님이었지만 문 너머가 무섭도록 잠잠했다.
“어디 가셨나?”
그런데 어떠한 언질도 없었다. 집을 비웠을 땐 항상 미리 얘기를 해주셨는데 말이지... 설마 그래선 안 되지만 좋지 않은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머슨도 비슷했는지 우리 둘의 시선이 공중에서 맞부딪혔다.
“머슨!”
외치자 머슨이 몸통박치기로 문을 부셔버렸다. 잔해가 떨어지고 연기가 피어올랐다. 촌장님이 걱정되어 서둘러 들어가려는 것을 갑작스레 머슨이 팔을 들어 막아섰다.
“왜?!”
깔끔하게 부셔지지 않아 뾰족한 것들이 신경 쓰였는지 발로 툭 툭 치며 위험한 모서리들을 다 없애버렸다. 지금 그게 중요하냐? 난 머슨을 밀어내고 다급한 발걸음으로 문을 넘어 갔다. 거실의 낡은 흔들의자에 즐겨 앉으시던 촌장님의 모습은 없고 방금의 충격으로 혼자서 끄덕 거리며 움직이는 의자만 보였다. 불안감이 표정위로 까지 올라왔다.
머슨도 당황했는지 주먹으로 온 집안의 문을 부섰다. 야! 여긴 안잠겨 있으니까 손잡이 돌리면 되잖아!
집 안이 쑥대밭이 되어가고 있는데도 촌장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하나 남은 방문을 거칠게 열어 젖혔다. 제발!
“어라?”
다급했던 내 손길이 무색할 정도로 나는 오도카니 자리에 못 밖힌 듯 서있었다. 깜빡깜빡
아이씨 눈에 먼지가 들어갔나? 헛것이 보이네?
“에리나!”
내가 미동도 없자 머슨이 달려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이내 내가 바라보는 것을 저도 바라보자 머슨의 손이 내 어깨 밑으로 툭 떨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촌장님?”
촌장님이 있었다. 확실히. 다쳤냐고? 쓰러지셨냐고? 노노 절대 아니. 지금... 내가 보고 있는건... 저 망측한건... 그래 요가다 요가. 짜잔! 문 뿌시면서 들어왔더니 촌장님이 요가를 하고 계시네!
엉덩이 뒤쪽으로 양손을 짚고 살짝 구부려 땅에 닿은 발꿈치를 들면서 무릎도 들어 올린다. 그 다음에 오른쪽 왼쪽으로 휙 휙 몸을 꺾었다. 와 촌장님 팔 힘짱!
촌장님은 불러도 불러도 아무런 반응이 없이 눈을 감고 동작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벗은 상의에서 드러난 상체가 안쓰러웠다. 얄상하게 가죽만 달라 붙은 살집과 축 처진 뱃살이 인상적이다. 내가 앞으로 다가가 촌장님 얼굴에 휘휘 손을 내저었다. 인기척에 촌장님이 그제서야 눈을 떴다.
“하이고! 우째 들어왔는가?!”
문 뿌셔져 있던데요. 머슨이 그런 것 같아요.
내가 황당하다는 듯 표정을 짓고 있자 촌장님이 허겁지겁 탁상을 더듬어 주황색의 콩알만한 것을 귀에 꽂았다. 보청기?
“요것이 없으믄 잘 안들려가꼬...”
“보청기예요?”
“보텅키? 그게 뭐시여?”
“아니아니... 보통껴요? 라고 했어.요 아직 그거 발동이 안됐나 잘 못들으시네 허허”
...보청기는 이 세계엔 없는 물건인가 보다. 그럼 저건 뭐야?
“우리 손녀딸이 보내줬는디, 그... 젊은 새댁이 알까 몰라 마력이라는 걸 담은 물건이여”
“마력이요?”
“잉- 음성증폭기라고 사람맬이 똑띠 들리는 물건이여”
이 세계의 보청기 인가보다. 그건 그렇고...
“그럼 그 자세는 뭐에요? 음성증폭기도 빼놓고”
“아아... 몸을 좀 맹들라고 손녀딸이 그러잖여. 비실비실 한 거 뵈기 싫다고. 손녀딸이 편지에 요로코롬 하라고 써갔고 보냈응게 해야제. 근디 막 몸을 회까닥 뒤집응게 요것이 자꼬 빠져가꼬, 빼놔 부러찌”
“그 손녀딸도 참 대단…”
“하이고메! 촌장님 집이 쑥대밭이 돼부렀구만!”
아뿔사!
“잉? 고것이 뭔 소리여?”
촌장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 밖을 나가자마자 히에엑- 이라며 생전 처음 듣는 비명을 질러대신다. 죄송해요...
마을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폐허가 된 집을 구경했다. 난 왜 집 문을 부실 수밖에 없었는지 구구절절 이야기했다. 촌장님이 무슨 일 생기 신줄 알고...
내 말을 듣던 동네 아주머니들이 깔깔 웃어 재꼈다.
“촌장님 손녀딸 온다고 운동도 다하시고 팔팔하시네!”
“손녀딸이 와요?”
“3년 만에 오는 거지. 백작가로 시집간 후에 통 못봤응게. 촌장님이 얼마나 그리워 하셨는디”
아 그래서 오랜만에 보는 손녀딸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운동을 하고 계셨구나. 납득했다. 그런데 손녀딸 이야기를 하는 아주머니들이 서로 무언의 사인을 주고 받으며 표정이 탐탁치 않게 변해갔다. 묘한 공기가 감돌다 크리에타 아주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빨래 널어놓은걸 깜빡혔네, 해지기전에 걷어야하니께 담에 봐여들”
“아이고 나도 가야뎌 같이가”
마을 사람들이 빠지자 머슨이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그의 옷자락을 잡아 당겼다.
“뭐해? 우린 치워야지”
“...마력”
“안 돼”
촌장님의 손녀딸이면 마을사람들과도 꽤 친분이 두터울 텐데. 반응이 영 미덥지근 하다. 설레 하는 촌장님을 앞에 두고 차마 하고 싶은 말을 못 꺼내는 느낌이 역력했다. 하긴, 연세 지긋하신 할아버지한테 보기 싫다고 억지로 요가 시키는 손녀딸이 정상은 아니지. 게다가 무려 3년 만에 찾아오는 거라니.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깊지 않은 애가 확실했다. 그러니 마을 사람들이 보기에 촌장님이 퍽 안쓰러웠을 것이다.
이러한 마을사람들의 마음은 일절 알 길이 없는 촌장님은 손녀딸이 온다고 마을에 잔치를 벌일 계획을 하고 있었다. 아침댓바람부터 촌장님의 집으로 소환당한 마을사람들은(나와 머슨 포함) 졸린 눈을 비비며 촌장님의 말을 억지로 귀에 담고 있었다.
“우리 체닌이 복숭아를 영 좋아했응게 과수원 댁에서 가져오고, 예쁘장한 옷 한 벌 입히고 싶은디, 아쟈가 수선을 실하게 하잖어? 요 분홍색 꽃모양으로 다가 부탁혀. 그리고 방은 아 취향에 맞게 아기자기 하게 인형도 좀 갖다 놓고 아 레이스도 달아야겄네 이건 젊은부부가 좀 맡아줘야겄어. 그래그래 현수막도 커다랗게 맹글어가꼬 나무에다가 딱 걸어 놓는게 좋겠구먼”
뿐만 아니라 아침 점심 저녁의 식단 메뉴부터 목욕할 때 어떤 입욕제를 넣어야 하는지, 마을에서 가장 예쁜 나무를 집 앞에 옮겨 심는게 어떤지 까지 꼼꼼히 계획했다. 촌장님이 열의에 차 침까지 튀기며 이것 저것 이야기를 하는데 마을 사람들은 하품만 뻑 할 뿐이었다. 야 머슨, 대놓고 자지는 마. 머슨의 허벅지를 살짝 꼬집었다.
다들 하기 싫어하는 티를 숨기지 못한 채 였어도 촌장님이 말 한 대로 척척 움직여 주고 있었다. 머슨이 힘을 써 나무를 뽑아 들어 왔고(누가봐도 비상식적인데 마을 사람들은 힘이 장사라며 좋아했다.) 할아버지가 부탁한 분홍색 꽃모양 으로 아쟈아주머님이 옷을 정성스럽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입욕제, 과일, 음식 까치 척척 일사천리였다. 하루 일을 공치고 촌장님의 손녀딸 체닌을 맞을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당일 날.
마을 입구에 높게 솟은 나무 사이로 거대한 현수막이 걸렸다. “(환)세자인의 자랑 세자인의 보물 체닌!(영) 내가 봤을땐 오로지 촌장님의 자랑과 보물같았지만... 뭐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촌장님의 손녀딸이 일찍 도착 한다 하여 아직 해의 따스한 기운을 받기도 전에 사람들이 마을 입구로 모였다. 아침의 단잠을 포기한 것만 해도 힘들 었을 텐데 다들 각자 집에서 가장 좋은 옷을 빼내 입어 체닌을 반길 준비를 해 왔다. 나만 너무 대충 왔나?
“하암-”
머슨은 머리에 까치집이 앉아 있고 셔츠에 단추도 제대로 맞지 않았는데 뭘. 진짜 대충 주워입고 왔다 너
“머리 숙여봐”
머슨이 졸린지 눈을 감고 내 앞에서 머리를 숙였다. 다들 귀찮아도 열심히 준비하고 나왔는데 우리도 최소한의 예의는 보여야 하지 않겠어?
손을 비비며 까치집을 없애려 머리를 만졌다. 머슨은 기분이 좋은지 흐음- 소리와 함께 더 만져달라고 난리다. 그리고 옷을 풀어 단추를 껴 맞춰주고 있는데 가까이서 함성 소리가 들렸다.
“체닌의 마차다!”
촌장님이였다. 촌장님이 어린아이처럼 펄쩍펄쩍 뛰며 마차를 반기었다. 난 단추를 넣는 손을 떼지 않고 고개만 돌려 마을 입구를 바라보았다. 호오- 귀티나는데? 두 마리의 말이 다그닥 소리를 내며 힘차게 걸어 왔다. 버건디의 깔끔한 외벽에 부담스러울 정로도 휘황찬란한 금장식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혹시 자살이 취미신가? 저 정도라면 산적이나 도적떼들에게 표적1위가 되기에 딱 안성맞춤이었다.
“여기가 시골이라 다행이지”
마부석 위 정중앙에는 흉측한 이 사이로 검을 물고 있는 곰 장식이 크게 박혀있었다. 아마 가문의 문장이겠지. 요즘 시대로 말하자면 번호판?
마차는 순식간에 마을 사람들 앞까지 도착했다. 마부가 워워 소리를 내며 말들을 진정시켰다. 촌장님이 두 손을 곱게 모으고 손녀딸이 내리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뭐셔, 문이 고장이라도났슈?”
아쟈 아주머니가 한마디 했다. 촌장님이 잠시 당황해 하다가 마차의 문을 똑똑 두드렸다. 이때 드르륵- 창이 열렸다. 손가락 두 개가 간신히 들어갈 만큼 좁게.
“안녕하세요. 먼 길 오느라 다리가 아파서, 일단 집으로 갈게요 할아버지”
“그려그려, 먼저 가서 쉬고 있어. 문 열어 놨응게”
탁. 문이 닫히고 마차가 출발했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고개를 저으며 표정으로 누구보다 심한 욕을 하고 있었다.
저런 우라질?! 싹퉁바가지 없는애를 봤나!
나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는 손녀딸 온다고 하던 일도 내팽겨치고 성대하게 맞을 준비를 했는데 뭐어어? 먼길 오느라 다리가 아파?! 하루 종일 마차타고 온 사람이 할 말이냐?! 내가 씩씩대자 머슨의 표정도 안좋아졌다.
“쟤가 에리나를 기분 나쁘게 한 거야? 죽일까?”
“아냐. 촌장님이 슬퍼 하실거야. 그럼 나도 슬퍼.”
“그럼 나도 그래”
우리는 다시 발걸음을 돌려 촌장님 댁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웬 거북한 금빛 의자가 눈에 띄었다. 쳐다보기도 눈 아프다. 그 의자엔 체닌이 고고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서 레이스 장갑을 뽐내며 부채로 코 아래를 가리고 있었다.
“오랜만 이예요.”
“밥은 혔는가?”
“물론.”
“아아, 아가 줄 것이 있어, 요 봐라 아쟈댁이 밤을 꼴딱 새서 맹근 것이여 이쁘제?”
촌장님이 수수한 하늘 원피스에 분홍 꽃무늬 패턴이 치마 밑단부분에 들어간 옷을 꺼내 들었다. 내가 봐도 이뻤다. 뭔가 여리여리 핏
“구려”
빠직- 어디선가 뼈가 어긋난 소리가 났다. 분명 아쟈 아주머니 있던 쪽이었던 것 같은데... 촌장님은 당황해 하며 옷을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
“한 번 자세히 봐봐. 영 이쁜게”
“치워요. 피곤하니까 좀 잘게요. 하암- 여기 온다고 너무 일찍 일어났어”
체닌이 또각 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방문을 열었다. 체닌의 뒤통수를 노려보는 눈빛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앗 뜨거! 이런... 내 눈에서도 불같은 분노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꺄아아악!”
뜬금없는 비명에 촌장님이 놀라며 방으로 달려갔다.
“아가 무슨 일…”
“방 꼬라지가 이게 뭐야? 구려도 너무 구려! 지금 나보고 이런 곳에서 자라고? 이 해괴망측한 곰인형은 뭐야?!”
체닌이 그것을 들어 바닥으로 내동댕이 쳤다. 앗, 그거 우리 머슨이 심사숙고해서 고른 건데... 안 가질거면 나줘!
“던지지 마”
“머슨?”
어느새 체닌 옆으로 성큼성큼 다가간 그가 곰인형을 다시 집어 올렸다.
“뭐?!”
제재하는 목소리에 기분이 팍 상한 체닌이 목소리를 한껏 치켜올렸다. 아 나 이거 알아 사극에서 많이 봤어.
“그리고 이 옷도 입어”
촌장님에게서 옷을 받아든 머슨이 체닌앞에 들이밀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성격이 단순한 탓인지 지금ᄁᆞ지 파악한 행동패턴으로 본다면 체닌이 머슨의 뺨이라도 올려붙여야 했다. 그런데...
“...입으려고 했어요”
왓?
체닌이 수줍게 옷을 받아들었다. 어라 얼굴도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머슨에게서 눈을 뗄줄 몰랐다.
“으흠! 그런데... 이 마을에 사세요?”
목소리가 가녀려졌다. 10대 후반의 수줍은 소녀로 둔갑했다. 머슨은 고개를 한번 끄덕임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체닌이 구불거리는 자신의 주홍빛 머리칼을 귀 뒤로 천천히 넘겼다.
“자주 뵀으면 좋겠네요”
머슨의 표정이 구겨졌다. 왜 날 자주 봐? 그러나 머슨은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고 등을 돌려 내 옆으로 다시 돌아왔다. 머슨이 자리를 뜨자 체닌이 방문을 닫았다. 체닌이 잠잠해지자 마을 사람들이 저마다 혀를 차며 촌장님댁을 나섰다.
“머슨, 우리도 밥먹으러가자”
“응”
누가 봐도, 대충 흘겨봐도, 스카이다이빙 하면서 봐도 체닌은 머슨에게 한 눈에 반했다. 뭐, 반하지 않는게 이상하지. 2년 넘게 같이 살고 있지만 이 비인간적인 외모는 나도 적응하기 힘들 정도니까. 새삼 그의 얼굴을 요리조리 뜯어보다가 머슨과 눈이 딱 마주쳤다. 적안이 일렁인다. 위험하다.
“지, 집에서!”
머슨이 내허리를 강하게 부여잡았다. 그리고 손가락을 한번 딱 튕기자 빛이 우리를 감싸더니 어느새 내 방 침대위로 툭 하고 떨어졌다.
“이젠 됐지?”
“아씨! 마력 쓰지 말라니까!”
퍽! 퍽!
말 드럽게 안들어 진짜! 베개로 머슨의 머리를 사정없이 후드려쳤다.
========== 작품 후기 ==========
선작이 200이 넘었..!!(기절) 에리나와 머슨은 뽀뽀만 하지 않습니다. 괜히 노블을 건게..읍읍! 시작이 더뎌서 그렇지 한번 터지면 홍홍.. 아시져?
아, 그리고 촌장님 집 부실때 머슨이 먼저 들어가서 문을 열어주면 에리나도 안전하게 들어갔을 텐데..... (뒤늦게 생각난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