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편
<-- 1. 일단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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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로 떨어진지 2년이 지났지만 이렇다 할 변화는 없었다. 오히려 책 속의 세계가 맞나 착각이 들 정도로. 몬스터는커녕 그들의 배설물 조차 본 일이 없었고(소똥은 이젠 어떤 소가 쌌는지 알아볼 정도로 봐왔다.) 용이라던가, 정령, 마법도구 따위도 구경조차 못해봤다. 분명 책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실존한다고 나왔었는데... 아마 여기가 깡촌오브깡촌 이기에 그런것들과는 거리가 먼 듯 싶었다. 아, 여기서 내가 판타지 책 속에 빨려 들어 갔다고 생각하게 해주는 유일한 증거가 현 직업 머슴 전직 마왕인 머슨이었다. 점점 마력이 늘어가는지 이제는 시도때도 없이 마력을 사용한다. 하지만 그 순간에야 편하지만 후에 정기를 주는 것이 무척이나 힘이들고 또 머슨의 내부에 공허함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마력사용을 자제하라고 권하는 중이다. 물론 말은 더럽게 안처먹지만.
그리고 마을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로 마력사용을 금했다. 이 세계에서도 마법을 쓰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사과와 같은 과일 하나를 공중에 띄우는 것만 해도 작은 마을에서는 대 마법사라고 칭송 받기도 한다는 소설 속 내용을 기억한다. 사과는 우습고 집 한 채도 손가락 하나를 까딱 거리는 것만으로도 들 수 있는 머슨을 본다면 마을 사람들은 기절초풍 아주 까무러칠 것이다. 그냥 지금처럼 소소하게 농사일을 돕는 젊은 부부정도가 생활하기에 딱 좋았다.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우리의 할 일도 굳혀졌다. 눈을 뜨면 산을 올라 나무를 베고(머슨이), 장작으로 쓸 용도로 잘게 쪼겐 후(머슨이),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었다.(아, 이건 나도 간다. 물론 빈손이지만.) 짜투리 시간에는 마을사람들에게 부탁이 들어오면 가서도와주고 용돈 정도의 할당량을 받았다. 중고 침대를 하나 사기 위해 석 달을 일했으므로 그 돈이 얼마나 소량인지 대략 짐작 할 것이다.
요즘은 텃밭 가꾸는 데에 재미가 들려 짬짬이 텃밭으로 달려갔다. 여름이 오니 고추들이 새빨갛게 무르익고 가지와 방울토마토가 고유의 빛깔을 띄우며 대롱대롱 열렸다.
막 물을 주고 난 참이라 열려있던 방울토마토 밑으로 물방울이 맺혔다. 오오 귀여워! 조심스럽게 검지로 톡 건드리자 방울토마토가 작게 흔들리며 물방울을 내게 뱉는다. 조금만 기다려 곧 언니가 다 먹어줄게! 오랫동안 구부정한 자세로 숙이고 있어서 허리가 아릿하게 아플 즈음에 뜨겁고 촉촉한 것이 뺨에 깊숙이 닿았다가 떨어진다. -쪽
“머슨?”
“이젠 날 좀 봐줘”
뾰루퉁. 난 허리를 펴며 으아아앗 소리를 내었다. 우지끈 뼈맞춰지는 소리가 들리고 시원함을 느꼈다. 알았다는 의미로 머슨의 등을 토닥이고 그를 지나쳐 집 안으로 들어왔다. 쟤는 지치지도 않나봐. 2년 동안 참 한결 같다.
“으앗!”
쿵! 쿵! 큰 발소리를 내며 따라온 머슨이 내 팔을 강하게 붙잡고 몸을 휙 돌렸다. 허리를 구부려 못마땅한 눈빛의 적안이 내 바로 앞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머슨의 이마에 있지도 않은 글자가 보이는 것 같았다. ‘나.삐.졌.음’
하하...
“에리나”
“응”
“나야, 그 텃밭이야”
이럴 줄 알았다. 이제 막 열매를 맺기 시작하는 텃밭을 지켜보는 것이 하루의 낙이 되어 머슨을 신경 쓰지 못한 게 사실이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이런 질문은 좀....
“텃밭? 아앗!”
내 팔을 붙잡은 머슨이 손에 힘을 주었다. 아파! 그리곤 울 것 같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영혼도 베어버릴 만큼 날카롭다고 생각했던 붉은 눈동자에 어울리지 않은 물기가 어린다. 아아! 미안해 미안!
“장난이야! 울지마. 당연히 너지”
엄지로 살살 눈 밑을 문질러주었다. 잉 마음아파. 내가 잘못했어.
머슨은 여전히 표정을 풀지 않은 상태로 내 두 뺨을 감쌓다. 손이 워낙 큰 탓에 얼굴이 잡혀 먹어가는 느낌이었다.
쪽! 쪽! 쪽! 쪽!
짧은 입맞춤을 입술위에 계속 찍었다. 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울상, 짜증, 불만, 너 미워! 였다. 머슨의 손 위에 내가 손을 겹쳐 올려 스륵 내렸다. 그리고 발꿈치를 들어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내가 여기에서 너 말고 누굴 더 아끼겠어.”
가끔 생각 한다. 머슨 없이 나 혼자 이곳에 뚝 떨어졌으면 무섭고 외로워서 반쯤 미쳐버리지 않았을까 하고.
머슨이 느릿하게 허리를 감싸 왔다. 좀 마음이 풀어진 것이다.
“그럼 텃밭 보다 날 더 많이 봐줘”
“아니 이제 막 열매가… 아읏, 생각 해 볼게. 아악!”
머슨이 내 목덜미를 아프게 깨물며 원하는 답이 나올 때까지 놓아 주질 않았다.
“난 너 없이 살 수 없어, 에리나.”
제발 알아줘.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 같았다. 난 그의 등을 토닥였다. 나도 느끼고 있어.
“나도 머슨, 니가 없으면 안 돼”
머슨이 내 허리를 더욱더 꽈악 끌어 안았다.
내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너와 세르데벨라의 만남이니까.
*
‘탁! 탁!’
손가락으로 책상위를 의미 없이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마왕성의 집무를 총괄하고 마왕을 바로 옆에서 보좌하는 레이넌 크슈 프라브레히는 때 아닌 마왕님의 걱정으로 아무일도 하지 못한채 전전긍긍이었다.
레이넌은 이마 아래로 거추장스럽게 흘러 내리는 은발을 신경질 적으로 묶었다. 은발과 어울리게 광이 나는 하얀 피부위엔 거무튀튀한 다크서클이 깊게 내려 앉아 있었다.
“도대체 어디로 사라지신 겁니까?! 도대체에!!”
허공을 향해 소리쳤다. 마침 상부에 보고를 하기 위해 집무실로 들어오던 피에르가 혀를 끌끌 찼다.
“마왕님 성애자, 스토커, 변태, 잠재적 범죄자”
“아니야! 아니라고!”
레이넌이 아니라고 소리치는 건 피에르가 붙인 호칭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마왕님은 지금 납치 당하신거라고!”
“아이고야- 이거 큰일이네요. 그 전에 결제건 사인 좀”
피에르가 고의성이 다분한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러던지 말던지 레이넌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 뜯으며 고민에 빠졌다. 애써 묶어 올렸던 머리칼이 또 다시 흐트러진다.
“사인 좀 해달라니까요? 아, 설마 어제 올려드린 결제 서류도 안하신 겁니까? 정말 대책 없는 민폐 월급도둑이로군요”
억양의 변화가 딱히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피에르는 무덤덤하게 악담을 퍼부었다.
“레이넌님 이러실거면 그냥 회개하세요”
마족에게 천족의 규율을 따르라는 것은 모독중에 모독이었다. 그러나 레이넌은 부하가 자신을 향해 욕을 하건 말건 개미의 각선미 만큼이나 신경 쓰지 않았다.
“잘 들어봐 피에르. 무려 2년 동안 마왕님이 소식이 없다는게 말이 돼?”
“되는데요?”
마족의 수명은 최소로 잡아도 인간의 몇 십배 였다. 하물며 불멸의 존재인 마왕에게 2년이라는 시간이 어떤 가치인지는 그의 긴 인생사를 생각해 보자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답이 딱 나온다.
게다가 마왕은 마왕성에 소식을 알리지 않고 행적을 감추는 일이 허다했다. 말 그대로 잠수가 취미인 마왕인 것이다. 그러나 마왕성 안의 사람 중 누구도 마왕을 걱정하진 않았다. 왜냐고? 마왕이라니까, 그것도 짱 쎈. 마왕의 행적이 묘연해 졌을 때 걱정하는 것은 단 하나 뿐이었다.
또 어느 지역을 지도에서 없애시려나? 아 참 마왕성 안의 모든 사람이 마왕 걱정을 안하는 건 아니었다. 바로 지금 유난을 떨며 반폐인 상태로 엉망이 되어버린 레이넌만 빼고.
“아니야. 그래도 어느 마을이 쑥대밭이 되었다던가, 어떤 왕국의 왕이 바뀌었다던가, 하루 아침에 산이 사라졌다던가! 그런 마왕님의 흔적이 있어야 하잖아. 하지만 근 2년동안 마왕님의 자취를 찾아 볼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마왕님 덕질 할게 떨어졌다 이건가요?”
저런... 피에르는 고개를저었다. 그리고 이어 말을 덧붙였다.
“베넌 마을이 씨가 말랐다면서요. 그게 흔적이죠 뭐”
“그거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렇지.”
“아니 어떤 미친놈이 감히 마왕을 납치해요”
“천족놈들!”
“허? 천계인 전부가 떼로 덤빈다면 가능성이 있을 수 있겠네요. 그런데 이렇게 잠잠하게?”
들을 가치도 없네요. 피에르가 결제서류가 쌓여있는 책상을 쿵! 두드렸다. 일이나하세요.
“마왕님의 흔적을 찾기 전까지 나 파업이야.”
“미치셨어요?”
“마왕님을 위해서라면 미치는 것 쯤이야.”
“일처리 하나도 안 된거 알면, 이번엔 목 잘리실걸요? 목은 재생기간 7개월 인거 알죠?”
“으윽! 그러니까 같이 좀 찾아줘!”
“제가 왜요?!”
“결제 안 받고싶어? 나 뿐만 아니라 너도 가만 두지 않으실걸? 마왕님께서 우리 세트로 묶어 놓으셨잖아.”
레이넌이 비릿하게 웃었다. 피에르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이 나타났다. 저 새끼 죽일까? 일은 잘하지만 쓸데없은 잡걱정이 많아 사고를 치는 레이넌에게 마왕은 지나칠 정도로 이성적인 피에르를 붙여놨었다. ‘레이넌이 사고치면 너도 죽는다.’ 라고 이야기 하며.
피에르는 자신의 이마를 턱 하고 잡으며 몇 초간 고민하더니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레이넌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찾을 방법이나 있습니까?”
레이넌이 결의에 찬 미소를 지으며 과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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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슨 도망가 이제 너 잡으러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