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편
<-- 1. 일단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
*
증표를 깨트리자 빛이 쏟아졌고 난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 날 깨운 것은 그 마왕이었다.
놀라 비명을 지르며 않은 채로 마왕에게 멀어졌다. 마왕은 미간을 좁히며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오지마 오지마!
“왜 피하지?”
“...그거야”
내가 널 엿 먹였으니까!
마왕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느새 내 머리위에 그늘을 만들고 마왕은 날 멀뚱히 내려다 보았다. 힘이 없어져서 그런가? 어딘가 모르게... 변한 것 같다. 샘솟던 살의가 사라지고 동글동글하고 말랑해진 느낌. 이유가 뭐든 난 지금의 기회를 잡아야 했다. 삼십육계 줄행랑!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고쳐 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분명히 일어섰는데 마왕은 아까와 같은 자세로 날 내려다 보고있었다. 마왕씨 키 엄청 크네요?
슬금 슬금 눈치채지 못하게 몇 발자국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귀신같이 알아채고 정확히 내가 이동한 만큼 마왕도 다가왔다. 아 왜이래 진짜! 거미줄을 쳐야 벌레를 잡듯 마왕과의 거리가 좀 떨어져 있어야 도망이든 뭐든 칠 텐데 집요하게 따라 붙는다.
“스탑! 스탑! 다가오지 마요 진짜. 나 무서운 여자예요!”
우뚝- 그가 거짓말처럼 멈췄다. 왜 멈췄는지 따위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나는 계속 뒷걸음질 치며 도망 갈 곳을 살폈다. 마왕의 모습이 손톱만큼 작아졌을 때 그대로 등을 돌려 잽싸게 튀었다. 아직 긴장이 덜 풀린 다리 때문에 몇 번이고 바닥에 얼굴을 박을 뻔 했지만, 살고자하는 의지가 내 몸을 단단히 붙잡았다. 이 바퀴벌레처럼 질긴 생명력 박수다 박수!
바닥에 흩뿌려진 핏자국들이 보이질 않게 되고 텅비어버린 주인 없는 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로 가야 하지?”
그제서야 내 상태가 궁금해졌다. 허리가 편한 고무밴드가 착장되어 있는 최신식 달린 무릎 나온 트레이닝 바지에 과 티셔츠 한 장 입고 있었던 것과 달리 허리가 예쁘게 조여진 밤색 원피스 차림이었다. 그 위에 덧입은 검회색의 조끼를 뒤졌다. 주머니가 뭉툭한 것이 다행히 아무것도 없진 않았나 보다. 꺼내어 보니 꾸깃한 편지 한 장이 들어있었다.
“베른, 헤일던길 17B 홀든가. 에리나 홀든 양에게”
당연하지만 놀랍게도 주소가 적혀있었다. 일단 이곳으로 가보자. 그런데 나 이 곳 글을 읽을 수 있네? 처음 보는 문자들이었지만 머릿속에서 그것을 읽어 내리는 것은 숨 쉬는 것 만큼 이나 쉬웠다. 정말 책 속의 인물이 되어 버린 것 같잖아. 하하
집을 찾는 것은 쉬웠다. 타고난 길치였기에 조마조마 했지만 다행이 마을이 크지 않아 갈래 길도 적었고, 덩그러니 놓여 있는 집들 사이에 주소가 잘 적혀 있어 어려움은 없었다. 원목의 투박한 문을 밀고 들어가자 쾌쾌한 곰팡이 냄새가 진동했다. 하다 못해 거대 부호가 된 평민 상인의 딸로 빙의 될 순 없었나? 누가 봐도 지긋지긋 한 가난이 온 집안을 물들이고 있었다.
유령이라도 튀어 나올 것 같은 으스스함에 몸을 움츠렸다. 지금이 해가 쨍쨍하게 떠있는 낮이 아니었다면 감히 들어가는 것을 포기했을 지도 모른다. 바닥을 딛고 움직이는 내 발걸음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거실을 배회하다가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낡은 침대와 옷장 그리고 바닥의 짙은 고동색과 같은 책상하나가 있는 방을 발견했다. 조심스레 옷장문을 열자 내가 입고 있는 것과 비슷한 원단의 옷들이 즐비해있었다.
“여기가 이 몸 주인의 방인가 보네”
먼지와 핏방울로 가득 뒤덮인 옷을 구석에 벗어 놓고 넥 라인에 단추가 달려 갈아입기가 편해보이는 남색의 원피스로 갈아입었다. 이어 책상을 조금 뒤지자 여러 책들과 함께 양피지에 말려있는 지도가 나왔다.
“대박”
그것을 황급히 펼쳐 자세히 들어다 보았다. ‘헤이던길’ 이 붉은 펜으로 표시되어 있었고, 지도 이곳 저곳에 짧은 글귀가 적혀있었다. 이를 테면
“콘타나. 4계절 여름 타 죽을 수 있으므로 X.”
호오 유용한데? 아마도 이 몸의 원래 주인은 이 마을을 떠나 다른 곳을 누빌 계획을 가지고 있었나 보다. 내 예상을 뒷받침 해주는 증거로 아까 전에 본 편지도 한 몫했다. ‘테론’ 이라는 남자(로 추정)가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을 자랑 하면서 꼭 놀러오라는 내용의 편지였다. 말 하자면 펜팔과 비슷해 보인다.
덕분에 이 주변에 대한 정보를 간략하게나마 습득 할 수 있었다. 우선, 이 몸을 지킬 보금 자리를 찾아야 했기에 지도를 자세히 들추어 보았다. 아 물론, 순식간에 백 명 이상이 죽어나간 이 마을은 당연히 논외다. 그러다 문득 눈에 들어오는 곳이 한 곳 있었다.
“세자인. 시골 중의 시골, 정보랄 것도 없음. 가면 거기서도 농사꾼 신세. X”
깡촌오브깡촌이라... 차라리 그런 곳이 나았다. 괜히 북적 거리는 수도로 나가 봤자 신분 검사에 귀족 노예나 될 바에야 범죄 적고 고즈넉한 시골에서 차분히 생각 할 수 있는 편이 좋았다. 그리고 시골 인심이라는 것도 있지 않는가? 서둘러, 조금은 대충 목표지를 정하고 지도를 말았다. 에리나는 탈피를 꿈꾸던 소녀였으므로 마침 들고가기에 딱 좋은 배낭도 마련되어 있었다. 지도를 넣고, 몇 가지의 옷과 자잘한 음식들을 챙겨 집을 나왔다.
으스스한 이 마을에서 어서 해가 지기 전에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행동이 급박했다. 배낭을 들춰 메고 발걸음을 빨리 하여 문을 열었다.
“꺄아아악-!”
문을 열자마자 나타난 사람의 형태에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어우씨 깜짝아 뭐야, 벌써 귀신이야? 인간 적으로... 아니 귀신적으로 밤 12시 이후에 나타나라 좀!
그러나 내 앞에 있는 것은 귀신 보다 더 한 것이었다.
마왕
“여긴 어떻게...”
놀라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 나를 향해 마왕이 허리를 숙여왔다. 섬칫-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곤 팔목을 휘감는 부드럽고 강한 힘에 몸이 불쑥 들리더니 어느새 그의 앞에 서게 되었다.
“괜찮아?”
“...”
걱정스레 물어오는 그의 말에 귀를 의심했다. 지금 내 걱정을 한 거니? 이봐.
내가 눈을 깜빡이며 대답이 없자 마왕의 눈썹이 불쌍하게 치켜 내려간다. 그리곤 몸을 휙 휙 돌리며 다친 곳이 없나 살폈다. 어머, 거긴 엉덩이야 만지지 말아줄래?
일부러 느긋 하게 엉덩이를 쓰다듬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손등을 짝 때렸다. 놀란 마왕이 황급히 손을 떼었다. 갑작스레 성희롱 당한 이 상황이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
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순진한 표정은 뭐야? 나 놀리는 건가.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고 마왕을 지나쳐 집 밖으로 걸어 나갔다.
역시나 처럼 마왕은 내 뒤를 졸졸졸 따라 왔다. 마치 처음 본 사람을 제 어미라 착각하는 새끼오리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