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4 회: # 에필로그 -- >
"아얏!"
"왜 그래?"
내가 약한 신음을 내며 손가락 끝을 웅크리자 뮤가 재빨리 손목을 잡아채갔다.
"또 물집이 잡혔군."
"어쩔 수 없죠."
낮은 목소리로 변명 아닌 변명을 해보자 뮤가 삐딱하게 날 내려다보았다. 그런 그의 눈빛에는 방금 전과는 다른 불만의 기운이 가득했다.
"직접 하지 않으면 되지."
직접 하지 말라니. 그게 말이 안 되니 직접 하는 것이 아닌가. 나보고 화단 일을 하지 말라거나 꽃에 손을 대지 말라는 말은 즉 내 취미생활을 하지 말라는 말과 다름없는데. 에비에비. 그럴 순 없다. 물론 하루 종일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수는 없다는 것 정도는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하루 종일 화단 일만 하는 것도 아닌데 이런 식의 반대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 게다가.
"이 문제는 이미 예전에 서로 합의 본 것 같은데요?"
그랬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뮤와 말을 끝내놓은 상태였다. 그것도 오래전에. 내 손 끝에 상처가 날 때마다, 손바닥에 자잘한 노동의 흔적(?) 등이 남을 때마다 뮤는 이런 식의 억지를 부려댔고 그 때문에 서로 의견 충돌이 일어나 우리는 싸우기도 엄청 싸웠더랬다.
"그리고 제 손에 신경 써주는 그 반의반만큼 만이라도 류의 손에도 신경 써주면 참 좋을 텐데요, 안 그래요?"
"……."
아휴, 답답해.
내가 류의 이름을 언급하자 뮤의 입술이 다시 굳게 다물려져버렸다. 그 모습이 얄미우면서도 어쩐지 다 큰 어른이 고집을 부리는 것 같아 귀엽기도 하지만-.
그래도 절대 그런 내색을 해줄 순 없지.
나는 일부러 아주 길게 숨을 내뿜었다. 불만이 가득하다는 뜻으로. 또 내 불만 좀 알아달라는 듯이 아주 노골적으로.
"류 손바닥 봤어요? 그게 어디 어린애 손바닥이에요? 완전 울퉁불퉁, 여기저기 물집이 가득가득. 게다가 몸 여기저기에 상처는 또 얼마나 많아."
"원래 그러고 크는 거야."
"누가 그래요?"
"나도 그렇게 컸어."
"당신이 그렇게 컸다는 건 내가 본 적이 없으니 못 믿겠네요."
"하아. 그래도 류가 그깟 상처 때문에 아프다 투정부린 적은 없잖아. 나름 견딜 만하니까 가만히 있겠지."
"하! 걔가 그럴 성격이에요? 그럴 성격이었음 애초에 그렇게 엄하게 훈련하지도 않았겠죠. 하여튼 류는 완전 당신 판박이예요. 당신, 당신이 엄청난 고집불통인 건 알아요? 이번 일만 해도 그래!"
"아아, 그건 유나 네가-."
"시끄러워요."
또 다시 내 핑계를 대려는 것 같은 그의 웃기지도 않는 변명 따위는 듣고 싶지도 않아 잔인하게 말을 끊어내자 이번에는 뮤 역시도 조금은 불만인 듯 못마땅함이 가득한 얼굴로 입을 다물어버린다.
에잉, 뭘 잘했다고!
나는 사나운 기색으로 그런 뮤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곧 불만이 가득한 얼굴은 사그라뜨렸지만 그래도 뭐가 그리 당당한지 내 눈빛은 담담히 받아내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한층 더 날카롭게 쏘아보자 오래지 않아 곧 뮤가 길고 긴 숨을 내뱉는 것으로 잠시의 휴식 시간을 요청해왔다. 이제는 안다. 저런 식의 제스처가 무얼 의미하는 건지.
"불리하면 맨날 다음에 얘기하재."
하지만 이미 불만이 쌓일 대로 쌓여있던 나는 뮤의 요청 따윈 거들떠보지도 않고 또 이런 식으로 상황을 벗어나려하는 뮤의 행동을 비난했다. 그런 내 비난에도 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그저 웃고 말았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뮤는 어지간하면 '그 문제'를 그대로 진행하려 한다는 것을.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아, 들어와."
누구냐고 묻기도 전에 뮤가 들어오라 명한다. 그 말은 지금 문 밖에 서있는 이가 누군지 안다는 말이겠지. 즉, 뮤가 누군가에게 뭔가를 명령했다는 소리. 이 방으로 오기 전에 그가 명령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뮤의 허락에 들어온 사람은 바로 새론이었고 그런 새론의 손에는 나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포션이 들려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내 손을 보고 뮤가 마법으로 명령한 모양이다.
"마님."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새론은 내게로 바로 다가왔다. 딱히 야한 짓을 하고 있지도 않았고 옷차림에도 흐트러짐이 없었지만 침대에서 뮤와 함께 있는 모습 자체를 내보인 것이 조금 쑥스러웠다. 그래서 뮤에게서 조금 떨어지고자 몸을 일으키자 어느새 덩달아 일어난 뮤가 내 등을 감싸듯 껴안아 왔다. 그리고 양손을 잡아 새론에게 내밀었다.
"치료해."
"네."
창피함에 슬그머니 붉어지는 내 볼을 본 새론이 싱긋 웃으며 내 손에 포션을 뿌려댔다. 나는 어쩐지 새론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가 없어 새론의 턱 주위로 시선을 맞추며 얌전히 손을 내밀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 포션의 위력은 대단하고 또 대단하여 내 손은 마치 막 태어난 아기의 그것처럼 깨끗하게 바뀌었다. 비록 처음 보는 광경은 아니라지만 그렇다고 신기하지 않은 광경은 또 아닌지라 나는 깨끗해진 손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런 내 손을 감싸 쥐고는 뮤가 새론에게 고갯짓을 한다. 할 일 다 했으니 이제 그만 나가보라는 뜻이렷다. 나도 특별히 다른 할 말이 없었기에 그저 고맙다는 뜻으로 새론에게 살짝 웃어보였다. 새론도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하아."
새론이 나가자 뮤가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어왔다. 뜨끈한 입김과 함께 끈적끈적한 키스가 목덜미 위로 쏟아져 내렸다. 아무래도 이 남자, 오늘 밤을 그냥 넘기는 힘든 모양이다.
"그래도 소용없다니까요."
그러기에 이만 내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하면 얼마나 좋아.
나는 혀를 쯧쯧 차대며 팔꿈치로 뮤의 가슴팍을 쳐냈다. 작게 퍽! 소리가 났다. 그러자 뮤가 윽! 하며 웃기지도 않는 신음성을 뱉어낸다.
"살살 쳤거든요?"
어이없다는 듯 말해줬더니 오히려 더 아프다는 시늉을 하는게 웃겨 죽겠다. 정말이다. 나는 살살 쳤다. 절대로, 하늘에 맹세코 세게 치지 않았단 말이다. 그리고 설령 내가 온 힘을 다해 힘껏 쳤다 해도 이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에 전 재산을 걸 수도 있다. 그런데도 이 남자는 지금 내 앞에서 엄살을 부려대고 있었다.
"아파."
"안 아픈 거 알아요."
"정말로 아파."
"엄살 부리지 말라니까요."
절대 속지 않겠다는 듯 냉정하게 입을 열자 뮤가 피식 웃으며 내 말을 받아친다.
"방금 네가 친 곳이 아프다는 게 아니라 다른 곳이 아프다고."
"다른 곳이요? 어디요?"
어디 다치기라도 한 건가? 몸이 안 좋았었던 건가? 요즘 컨디션이 별로였나?
그제야 내가 관심을 가지며 묻자 뮤가 다시 한 번 더 아파 죽겠다고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그에 내가 그를 돌아보려 했지만 뮤가 나를 꽉 껴안고 있는 자세에서 힘을 풀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좀 놔 봐요."
하지만 뮤는 날 놔주는 대신 한 팔을 내 배에 두르고는 나를 더 세게 그의 품 안으로 깊이 끌어당겼다. 한 치의 틈 없이 맞닿은 등과 가슴에 서로의 온기를 나눈다. 하아-. 길고 달짝지근한 숨결이 목덜미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 간지러움에 온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왔다.
"대체 어디가 아픈 건데요, 네?"
몸이 슬쩍 달아올랐지만 그보다는 걱정이 앞서 애써 솟구치는 미묘한 열기를 무시하곤 다시 물었다.
이 남자와 아프다는 말은 잘 매치가 되지 않는 단어다. 또 아프다는 말은 그동안 들어본 적이 없는 단어이기도 했다. 그래서 혹여나 무슨 심각한 병이 있는 건 순간 걱정되기 시작했다. 물론 일이 많아서 피곤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리 많이 들어보진 못했다. 그런 말 자체를 쉬이 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실제로 그가 지니고 있는 체력이라는 것은 이미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게 어떤 건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새론의 말에 의하며 피곤한 그를 배려해주겠답시고 잠자리를 거부하는 등의 행동은 제발 하지 말아달라는 부탁 아닌 부탁을 결혼 초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왔더랬다. 뮤가 일에 치여 새벽에 들어왔어도, 잠자고 있을 때 건드린다 해도 어지간하면 그냥 받아주라고. 설령 일하는 도중 잠시 와서 안으려 해도, 바로 다시 일하러 가야한다고 해도 어쨌든 내치지 말아달라고. 그래야 다른 모든 이들이 살기 편하다나 어쨌다나. 아, 물론 억지로 받아주라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여기서 어지간하면 그냥 받아주라 말하는 새론의 말뜻은 뮤를 위한답시고 하는 그런 식들의 배려가 절대 배려가 아니라는 뜻일 뿐일 테니까.
"말해 봐요. 어디가 아파요? 네?"
그런데 이 남자, 하라는 대답은 안하고 계속 목덜미만 핥아대고 있다. 그런 뮤의 행동에 슬슬 짜증과 걱정이 동시에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대체 이 남자는 내가 하는 질문에 왜 재깍재깍 대답을 안 해주는 건지 도무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속으로 푸념하며 어디가 아프냐고, 제발 답 좀 해로라고 다시 묻기 위해 입을 떼려던 그 순간.
"!"
나는 깨달았다.
"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