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3 회: # 에필로그 -- >
"으음……."
잠결에 숨이 막혀왔다. 좀 더 편하게 숨을 쉬기 위해 고개를 이리 저리 돌려보았지만 이상하게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졸린 기색이 다분히 묻어난 눈빛 그대로 눈을 뜨며 나는 내 몸 위로 올라 날 덮친 이를 쳐다보았다. 입으로 입을 막고 혀로는 입술을 핥으며 손으로는 거의 벗은 거나 다름없는 얇디얇은 실크 잠옷 속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자기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한 남자가 바로 눈앞에 보인다.
"그……."
그만두라고, 한 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수가 없었다. 물론 입이 막혀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입으로 전해지는 열기가, 목선을 타고 내려오는 뜨거움이, 가슴을 움켜쥔 손아귀에 담긴 열망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덩달아 몸이 달아오르는 기분이랄까.
"그만, 해요."
그래도 발버둥 한번 쳐본다. 애써 달아오르려는 몸도 차갑게 내치고.
"하자."
"싫어요."
잔득 흥분한 뮤가 자신의 몸뚱이를 내게 밀어붙여 오며 은밀한 제안을 했지만 나는 냉정하게 그런 뮤를 밀어냈다. 나도 어지간하면 받아주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 요즘은 받아주고 싶어도 받아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그 확고한 이유를 떠올리자 더 냉정하게 거부해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온힘을 다해 뮤의 품 안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쳐대기 시작했다. 그런 내 반항 따위, 사실 뮤의 입장에서는 우스운 것이겠지만 하지만 뮤는 절대 내 허락 없이 나를 취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못한다. 어느 순간부터 뮤는 그랬다.
처음에는 그냥 좀 받아달라는 듯 장난스럽게 마구 짓눌러대던 뮤가 계속되는 내 거친 반항에 결국 기나긴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제야 자유로워진 몸을 추스르며 나는 원망스런 눈으로 뮤를 쏘아보았다. 뮤에게 짓눌린 어깨가 뻐근하게 아파왔기 때문에. 몸을 천천히 일으키며 노골적으로 어깨를 주물러대자 그래도 양심은 남아있었는지 머쓱한 표정으로 내 시선을 회피한다.
저렇게 금방 꼬리를 내릴 거면서 왜 '그 문제'에 대해서는 그리도 고집을 피우는 건지!
'그 문제'를 떠올리자 절로 심기가 꼬여왔다. 그에 한층 더 날카로운 눈빛으로 뮤를 쏘아보자 이제는 완벽히 몸을 일으킨 뮤가 내게서 조금 물러서기까지 하지 않겠는가. 몸을 사리는 그 태도가 내게 꼼짝도 못하는 남자의 표본 같아 기특하기도 하건만 참 이상한 일이다. 왜 내 눈에는 그 모습이 더 얄미운 건지. 방안은 이제 냉기가 돈다 여겨질 만큼 싸늘한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나는 힐끔 눈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에 떠있는 달의 존재가 아주 선명하게 빛이 나는 시간. 아직 어둠의 장막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시간. 그랬다. 지금은 밤이었다. 아주 늦은 밤.
순간 이 시간까지 일하다 이제야 방으로 온 건가 싶어 뮤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얼굴이 좀 피곤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마음은 애써 꾹꾹 눌러 담았다. 지금은 절대 마음이 약해지면 안 되니까.
안되지, 안되고말고!
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아주 조금은 어쩔 수 없이 약해져 버렸나보다. 나는 어느새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로 뮤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피곤할 텐데 얼른 쉬어요."
그리고는 내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쳐보였다. 그제야 다시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린 뮤가 뚱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피식 웃어버린다. 이미 풀어헤쳐진 셔츠 사이로 매력적인 가슴골이 훤하게 드러난 상태 그대로 뮤가 내 옆에 털썩 자리 잡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눈을 감는 폼을 보아하니 옷도 갈아입지 않은 상태로 잠들 심산인 것 같아 나는 손가락으로 뮤의 어깨를 꾹꾹 찔러대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뮤, 옷은 갈아입고 자야죠."
"꼭?"
"그게 편하지 않겠어요?"
"편하기로 따지자면 그냥 다 벗어버리는 편이 낫지."
"……그러면 벗고 주무시던가요."
"괜찮겠어?"
"……뭐가요?"
"내가 다 벗고 자도."
"……절 건드리지만 않으면요."
그런 내 말에 못마땅했던 걸까? 감았던 눈을 다시 치켜뜨며 날 올려다는 보는 뮤의 눈빛엔 불만의 기색이 무척이나 노골적으로 새겨져 있다. 그에 무안해져 이번에는 내가 황급히 뮤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려야했다. 하지만 그렇게 애써 외면하기 무색하게도 곧 내 몸은 뮤의 손에 이끌려 그의 품안으로 쏙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건드리지만 않으면 이러고 자도 상관없다는 말?"
"……이런 행동 자체가 건드리는 거라고요."
"누구 기준으로?"
"누구의 기준으로든요!"
"이상하군. 내 기준으로 이 정도는 건드리는 축에도 못 들어가는데 말이지."
그러면서 내 허리를 더 강하게 끌어안는 폼이 더는 양보하지 않겠다는 의지 같아서 나는 대신이라고 하기엔 너무 약하지만 이 상황에 대한 불만을 길게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내 심정을 표현하고는 그대로 그의 품 안에 안겨있어야 했다.
말똥말똥. 이미 잠기운은 멀리멀리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제법 또랑또랑해진 눈으로 뮤의 품에 안겨 멍하니 밤하늘의 달을 올려다보았다.
아, 예쁘다. 지금 당장이라도 하늘에서 떨어져 나와 내 품에 안길 것처럼 보이는 저 커다란 달이 나는 참 좋았다. 이 계절엔 달이 유난히 가까워져 어쩔 때는 위협적으로 보이기까지 했지만 그래도 내 눈에는 마냥 예쁘기만 했다.
요즘은 열기가 조금 누그러져 날씨가 제법 선선했지만 그래도 창문을 조금 열어 두라하길 잘한 모양이다. 작게 열린 창틈 사이로 밀려들어오는 기분 좋은 바람이 온 몸으로 부딪혀왔다. 차가웠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등 뒤로 맞닿은 뮤의 체온이 바람에 비해 무척이나 뜨거웠기 때문에. 그 온도차가 싫지 않았다. 뮤는 따뜻하다. 그의 체온은 늘 나를 기분을 좋게 만들어준다. 안심이 된다. 그건 뮤에게 익숙해진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이 따스함은 감히 농담으로조차도 싫다 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내게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었다.
그래도.
'음,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조금씩 몸을 움직여 꽁꽁 싸매다시피 나를 안고 있는 뮤의 팔에서 벗어나 헐렁한 공간을 만들어보았다. 약간 답답했으니까. 뮤는 습관처럼 내 몸을 꽁꽁 싸매듯 안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 습관이 언제부터 생긴 건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한 건, 초기에 그 버릇을 잡지 않은 건 엄청난 실수였다는 것이다. 물론 이제와 땅치고 후회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그래도 가끔 나는 생각한다. 이런 버릇은 초기에 제대로 잡았어야 했다고.
"가만히 있어."
애써 빠져나와 내 공간을 확보한 내가 이제야 숨 좀 편하게 쉬려나 싶으면 그런 내 노력을 우습게 만드는 뮤 때문에 이런 생각을 안 하려야 안할 수가 없다. 다시금 몸을 끌어당기는 강하고 든든한 팔에 나는 뮤의 품안으로 빈틈없이 빨려 들어가듯 안기고 말았다.
"어?"
그런데 오늘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한손으로 내 턱을 붙잡아 자기 쪽으로 시선을 맞추려드는 행동까지 보인다. 일단은 순순히 그가 원하는 대로 그리해주자 언제부터 눈을 뜨고 있었는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시선 속에 내가 있었다. 피곤한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생생하고 아름다운 에메랄드빛의 눈동자 속에. 다정하고 따뜻한 눈빛이다. 언제나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고. 그 찬란한 빛에 절로 가늘어지는 눈으로 나는 뮤를 마주 올려다보았다.
탁!
방안을 은은히 밝혀주는 빛 덩어리가 꺼진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맞춰놓은 시간이 다 된 모양이지. 방은 순식간에 어두워졌고 내 눈은 어둠속에서 잠시 헤매었지만 달이 밝아서 오래지 않아 익숙해질 수 있었다.
"……내가 안 된다고 하지 않았나요?"
"나는 사랑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런 말을 들은 것도 같긴 하지만."
나는 다시금 옷 속을 파고드는 뮤의 손길을 냉정하게 쳐내며 새침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안 돼요. 정 하고 싶으면 제 요구를 들어주시던가요."
그렇게 말하며 또다시 뮤의 품에서 벗어나려 해보았지만 이번엔 뮤가 끝까지 내 몸을 놔주지 않았다. 그 대신이라고 하기는 뭣하지만 대신 뮤는 음흉한 손길은 멈추어주었다.
"하아. 정말 너무하는군."
"정말로 누가 너무하는 건지 하나하나 따져 봐요?"
어째 내 탓으로만 돌리는 말투에 기분이 나빠져 그렇게 쏘아붙이자 뮤가 바로 항복이라 말하듯 입을 꾹 다물어버린다. 그런데 그것도 어째 기분이 나쁘다. 그런 뮤의 행동은 내 말이 전적으로 옳아서 그렇다기보다는 그냥 져준다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하긴 이 남자는 결혼하고서부터 늘 이랬다. 자존심이 고고하고 또 고고해 절대 져준다거나 봐주는 일 따윈 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이 남자는 늘 내게 이리 대해주었다. 그냥 내게 져주었다. 어지간하면 모두 내 뜻대로 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내 응석도 웬만하면 모두 받아주었다. 또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이 있다면 그게 위험한 일이 아니고서야 하고 싶은 대로 모두 하게 해주었다. 가령 그의 곁을 오래 비워야 하는 일을 하고 싶어 한다거나, 예를 들면 술 파티나 여행 등등, 혹은 따로 자려고 하는 거라든가 등의 그의 맘에 들지 않는 일을 내가 하겠다 하는 것만이 아니라면 나는 뮤와 결혼하고 지금껏 쭉 내 맘대로 내 멋대로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그래, 약 한달 전부터 시작된 '그 문제'만 아니라면 말이다.
"아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