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1 회: # 11-11 그 남자 -- >
똑똑.
하지만 뮤에게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동시에 치켜뜬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을 냈다. 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갔다 오마."
쉬이 떨어지지 않는 하얀 얼굴에서 가까스로 눈을 떼고 뮤는 그대로 문을 나섰다. 뮤가 나오자 문 밖에서 대기 중이던 젠이 고개를 천천히 숙여보였다.
"어디지?"
"지하 감옥입니다."
젠의 말에 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앞장서 걷는 뮤의 딱딱한 등에 잠시 시선을 두던 젠은 옆에 서 있던 새론에게 눈짓을 보냈다. 새론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유나가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문이 닫히고 젠은 다시 뮤의 등에 시선을 두다 오래지 않아 그 시선을 돌렸다. 안 그래도 날카로울 주군의 심기에 거슬리지 않도록. 그는 그저 그 뒤를 조용히 따를 뿐이다. 그리고 생각했다.
오늘부로, 또 하나의 가문이 사라질 것이다. 이 나라에서 그리고 이 세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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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죽여."
"그래도 될까요? 최소 몇 명 아니, 한 둘은 남겨두고 뭐라고 캐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필요 없어. 모두 죽여."
"모두 죽여 버리면 황실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사키가 조심스레 의견을 피력해 보았지만 뮤는 단호했다.
"황실은 나서지 않을 거다."
그 확답에 사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손가락으로 콧잔등을 거칠게 문질러대더니 곧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의 입장에선 기라면 기어야지. 어쩌겠는가. 사키가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휘이잉~. 열린 창문 사이로 바람이 들어왔다. 바람결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그저 내버려둔 채로 뮤는 집무실 의자에 앉아 멍하니 밖을 내다보았다.
요즘 루벤스 제국의 수도에는 계속되는 커다란 사건으로 인해 흉흉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노르젠 후작 가(家)의 반역 행위가 밝혀짐으로써 그 일가가 하룻밤 사이에 몰락했는가 하면 얼마 전에는 배롤린 남작 가(家)가 알브레히트 공작 가(家)에 의해 완벽히 그 이름을 세상에 지워야 했다. 게다가 그 후로 며칠 뒤, 아무런 문제도 없어보였던 겐두라 백작 가(家)가 노르젠 후작 가(家)의 반역행위에 동조했다는 그 은밀한 관계임이 밝혀졌고 그에 따라 겐두라 백작 가(家) 역시 황실에 의해 멸문되었다. 철저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황실은 겐두라 백작의 그 어떠한 씨앗도 남겨두지 않았다.
그 와중,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사실 하나. 겐두라 백작은 황실이 백작 가(家)를 치는 과정에서 죽었다고 공표되었지만 진실은 그게 아니라는 것. 겐두라 백작은 알브레히트 공작 가(家)의 현 공작인 뮤와르노와에 의해 목이 잘려나갔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그리 죽었다는 소리다. 목이 잘리기 전까지의 과정이 무척이나 길었다는 말도 있었지만 그런 말은 곧 사그라졌다.
불과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시간에 무려 세 가문이 멸문을 당하자 백성들은 불안해했다. 자기들이 모르는 무언가 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동요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들의 반역 행위에 대해 황실에서 명확한 증거를 내놓아 대대적인 공표를 함으로써 백성들의 불안을 달래주었으니까. 그 와중에 함께 멸문을 당한 배롤린 남작 가(家)의 파멸에 대해서는 그 죄목에 대해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었지만 워낙 배롤린 남작 가(家)의 평판이 좋지 않았던 데다가 그 부자로 인해 상처를 받았던 사람들, 그 중 특히 여성들과 그 여성들의 가족들이 배롤린의 파멸에 대해 기뻐했기에 사람들은 뭔가 그들이 큰 죄를 지어 황실에서 내친 것이겠거니 자연스레 생각하고 있었다.
유나는 아직까지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라일의 말에 의하면 상처는 이미 오래전에 다 나았다고 한다. 사실 처음부터 생명에 지장 있을 정도의 상처가 아니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깨어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본인 스스로가 깨어나기를 원치 않아 수면 상태에 놓인 것 같다고, 라일은 조심스레 자신의 생각을 뮤에게 전했다. 그 말에 뮤는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의 반응이었다. 라일은 그 말을 들은 뮤가 격렬히 분노하거나 화를 낼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뮤는 유나가 아직 깨어나고 싶지 않다면 당장 억지로 깨어나도록 하고 싶지 않다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하루 이틀 삼일. 시간이 지나고 또 지날수록 초조해지는 기분은, 뮤 역시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라니 토킨이 애원한다 해도, 뮤 앞에서 무릎 꿇고 빈다 해도 뮤는 배롤린은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절대로.
"죽어버려, 이 짐승아!"
하지만 다행이도 라니 토킨은 뮤에게 감히 배롤린을 향해 용서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 치료를 받고 정신을 차린 즉시 공작성으로 달려온 라니 토킨은 뮤에 의해 온 몸이 난자되어있는 론 배롤린을 보면서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소리쳤다.
죽으라고. 이미 넌 잘못을 너무 많이 했다고. 내 가족은 네가 아니라 유나라고.
그렇게 라니 토킨은 소리치고 또 소리쳐댔다. 울부짖고 또 울부짖었다. 그 옆에서 라니 토킨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안절부절 못하던 루이가 결국 혼절해 쓰러진 라니 토킨의 몸을 받아내던 그 때까지 뮤는 라니 토킨에 대한 예우로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을 맘껏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그것으로 뮤는 라니 토킨에 대한 배려는 다 해준 셈이다. 뮤의 입장에서는 아주 후할 정도로.
문제는 황실이었다. 사사로운 이유로 가문을 멸망시키는 일을 황실이 허락할 리 없었다. 하지만 뮤는 황실이 그의 분노를 풀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대로 감행할 작정이었다. 이미 허락도 없이 겐두라 백작의 목을 쳤다. 물론 그 일로 황태자 레브레인이 며칠 난리를 쳐대긴 했어도 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감히 그의 여자를 건드린 죄, 그 죄 값은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보여주리라 결심했기에 망설임 따윈 없었다. 겐두라에 대한 분노가 하늘 끝까지 솟구쳤다. 더불어 황후에 대한 분노 역시도.
뮤를 건드릴 수 없으니 그의 여자를 건드리겠다?
마지막으로 세운 계획이 그 따위의 것이었더냐. 고작 그 따위의 계획으로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희생시켜?
겐두라는 쓰레기였다. 그런 한낱 찌꺼기에 불과한 이의 목을 쳐내지 못할 이유 따윈, 지금의 뮤에겐 존재하지 않았다.
배롤린의 일 역시 마찬가지다. 황실에서 뮤의 행동을 묵인한다면 그것은 그저 뮤가 움직이기 좀 더 자유로울 뿐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니 황실의 허락 따위는 애초부터 뮤에겐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그에겐 그저 유나를 건드리려했던 모든 것을 깨끗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의무만이 있었을 뿐이다.
마치 그리 해야만 유나가 눈을 뜨기라도 한다는 듯이.
툭툭. 툭툭.
뮤의 손가락이 책상 위를 아무 의미 없이 노닐었다. 그때 무심하기만 했던 눈이 한순간 날카로워짐과 동시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그러곤 뮤의 허락도 없이 문이 열렸다. 호세였다. 물론 호세가 그런 예의 없는 짓을 하지는 않았을 터.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어이."
차라리 예의 없는 짓을 한 이가 호세였다면 좋았을 걸. 안타깝게도 호세는 귀찮은 무언가를 달고 왔다.
억지로 시선을 그쪽으로 한번 힐끗한 뮤는 이내 귀찮다는 듯 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쩐 일이십니까?"
"그렇게 대놓고 불청객이라는 표시를 하면 내가 섭섭하지 않겠나."
짓궂게 웃으며 집무실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황태자 레브레인의 모습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개구쟁이의 그것과도 같았지만 그래도 지금 그는 나름 신중히 뮤의 기색을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뮤는 그저 시큰둥한 얼굴로 고개를 까닥거려댔다.
"적당히 앉으시죠."
하지만 뮤가 그리 권하기도 전에 이미 레브레인은 소파에 앉은 상태였다. 그 앞쪽에 마주 앉으며 뮤는 호세에게 나가도 좋다는 신호를 보냈다.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던 호세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아마 레브레인을 막기에 호세는 역부족이었으리라. 사키였다면 또 모르겠지만. 보지 않았어도 빤히 보이는 상황에 뮤는 다시 한 번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런 뮤 앞에 앉은 레브레인만이 싱글싱글 의미도 없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