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0 회: # 11-11 그 남자 -- >
우두둑!
"잠시만 비켜주십시오."
갑작스럽게 불려왔으나 이미 오면서 상황을 전해 들었는지 유나를 내려다보는 라일의 표정엔 그 어떤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그는 재빨리 뮤를 옆으로 살짝 밀어내고는 유나의 상태를 세밀히 살펴보았다. 민망하게 노출된 상체는 깨끗한 천으로 절묘하게 가리고 피가 흘러나오는 부분을 먼저 확인해 보더니 뮤에게 고개를 조아린다.
"먼저 단검을 빼내야 합니다. 최대한 깨끗하게 부탁드리겠습니다."
물론 라일이 직접 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라일은 그것을 뮤에게 맡겼다. 그에 짧게 고개를 끄덕인 뮤가 가까이 다가와 유나의 옆구리에 박힌 단검을 살벌하게 노려보더니 한손으로 단검을 쑥 빼내었다. 라일이 원한대로 다른 곳을 전혀 손상시키지 않을 만큼 정확하고 빠른 속도였다. 단검이 빠지자 단검에 의해 막혀있었던 핏덩어리가 그제야 꾸역꾸역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 엄청난 피의 양에 놀랄 겨를도 없이 라일은 그곳에 포션을 아낌없이 부어댔다. 물론 피를 먼저 닦아낸 다음 포션을 사용하는 것이 훨씬 더 포션을 절약할 수 있는 현명한 사용법이라는, 그런 아주 사소한 사실을 라일이 몰랐을 리 없다. 하지만 그는 단지 지금 그의 눈앞에 누워있는 사람의 가치가 그깟 포션의 것보다 훨씬 더 중대하다는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포션이 스며들자 겁 없이 쏟아져 내리던 핏덩어리들이 한순간에 그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라일은 깨끗한 천에 소독약을 묻혀 그 부분을 닦아내고는 다시 포션을 쏟아 부었다. 그러자 환부는 곧 애초부터 아무 흔적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사라졌다. 가장 큰 상처를 해결하자 나머지는 간단한 것들뿐이었다. 사실 처음부터 라일이 굳이 나서야 할 만큼의 큰 부상이 아니었다. 라일이 아니더라도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어쨌든 라일이 상처를 해결하자 그 뒤는 새론의 몫이 되었다. 새론은 유나의 몸무게는 존재하지 않는 듯한 괴력으로 유나를 들어 욕실로 데려갔다. 그리고 손수 깨끗이 씻기고는 그 새 시트를 갈아 깨끗해진 침대 위로 유나를 올려놓았다.
"……."
뮤의 눈앞에는 이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하게 누워있는 유나의 모습만이 남겨졌다. 다른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더는 남아있지 않았기에 그들은 모두 조용히 방을 나서야만 했다. 새론이 더 남아있어 보려 해보았지만 뮤의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젠의 눈짓에 새론은 누워있는 유나를 잠시 걱정스런 시선으로 바라보다 방 밖으로 나서야 했다.
달칵.
이제 방안에는 뮤와 유나 외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
오만이었을까? 지극히도 거만했던 오만.
망각했다. 오만이 불러온 비웃음이라는 녀석은 아주 작은 틈에서도 벌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바보처럼 무시했다. 역사 속 위대한 이들의 죽음 중 가장 많은 사례가 아주 허무한 이들의 손에 이뤄졌다는 것을. 그것을 익히 알고 있었음에도 뮤는 그 사실을 간과했고 그래서 그 대가는 아주 컸다. 지금 이렇게도.
"……유나."
낯선 목소리가 뮤의 입에서 삐쭉 튀어나왔다. 그제야 뮤는 자기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만큼 마음도 가라앉는다. 동시에 뮤의 모든 것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유나."
쉬운, 아주 쉬운 사랑을 할 줄 알았다. 인생의 모든 것이 그에게는 쉬웠기에, 그것이 무료해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해도 한없이 허무하다 해도 끝까지 그런 인생을 살다 죽을 줄 알았다.
뮤의 인생은 너무나도 쉬웠다. 하고자 하는 건 뭐든 할 수 있었고 이루고자 하는 것 역시 뭐든 이룰 수 있었다. 뭐든지 조금만 노력하기만 하면 손아귀에 넣을 수 있었다. 게다가 뮤가 원하는 것이 있기도 전에 이미 모든 것이 뮤의 앞에 놓여있었다. 그래서 뮤는 지금까지 무언가를 원하다는 것의 감정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모두가 뮤에게 무언 갈 주지 못해 안달이었고 또 그만큼 뮤에게 원했기에 사람들의 감정이란 뮤에게 귀찮은 것 그 이상도 이하도 되질 못했다.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 과도한 관심이 짜증나고 귀찮기만 할 뿐 좋았던 적도 없었다. 물론 무시하면 그만이기에 지금까지 그리해왔다. 결혼도 그리 생각했다. 적당한 사람을 만나 살다 아이를 낳고 아이가 크면 자리를 물려주면 되는 것이라고. 지금까지 그래왔고 또 앞으로도 그러겠지. 물론 재미야 없겠지만 물 흘러가듯 그리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그리 생각해왔다.
"……유나."
그런데 이 여자, 지금 잠들어 있는 이 여자, 내 여자…….
"……유나."
그래, 처음 너를 만났을 때도 그런 내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너를 단순한 호기심에 안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무심코 안았던 네가 너무 달콤해서, 생각 외로 너무 마음에 들었기에 그것이 만족스러워 너를 내 곁에 두었다. 하지만 그것이 내 생각을 바꾼 것은 아니다. 그 뒤로도 한참동안 나는 너를 쉬이 안고 버릴 상대로만 여겼었다.
뮤의 심장이 메말라 갔다. 숨 속에 베인 기막힐 정도로 아릿한 향이 뮤를 견딜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뮤의 건조한 눈이 침대 위에 누워있는 유나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 눈이 따끔거린다. 아니 어쩌면 따끔거리는 건 눈이 아니라 심장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심장이 아니라 영혼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아니, 그것도 아니다. 어디가 아픈지 모르겠다. 그저 온 몸이, 영혼이 모든 것이 다 아픈 것 같았다. 보이는 상처 하나 없고 피조차 흘리고 있지 않은데도 뮤는 아팠고 그래서 견디기 힘들었다.
"……유나."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뮤는 유나의 눈물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보기 싫었다. 하지만 뮤 몰래 혼자 우는 건 더더욱 싫었다. 그래서 앞에서 울라했다. 혼자 몰래 울고 있는 유나를 끌어냈다. 그렇게 끌어내었지만 뮤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아니 뭘 어떻게 해줘야 하는지 몰랐다. 울고 있는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기만 하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가슴이, 가슴이 무척이나 불편하고 아렸다. 그런 감정들은 뮤에게도 정말이지 낯선 것들이었다. 왜 이렇게 짜증이 나는지 화가 치솟는지, 저 꼿꼿한 등이 왜 그렇게 얄미운지 뮤는 언제까지 혼자 버티나 두고 보자는 심정도 들었다. 그럼에도 가끔은 자기도 모르게 내밀어 버린 손에 한숨을 내쉬곤 했다. 특히나 가녀린 어깨가 흔들림을 애써 감추려할 때, 그때가 뮤의 속이 가장 많이 뒤틀려댔던 순간이었다. 뮤는 저 아이를 감히 저리 만든 것에 대해 분노했고 그것을 혼자서 감내하려고만 하는 유나의 행동에 못마땅했다. 불쾌했다. 그에게 기대려하지 않는 그 고고한 뻣뻣함에 열불이 났다.
나는 네게 의지가 되지 않나? 의지가 되지 않는 사람인 건가?
하지만 뮤는 몰랐다. 그가 의지가 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그에게 의지해도 되는지의 여부조차도 유나가 판단할 수 없었다는 것을. 그래서 뮤는 유나가 그를 애써 외면할 때마다, 그의 존재를 있는 힘껏 밀어내려 할 때마다 괜스레 더 그녀를 몰아붙이곤 했던 거다. 감히 그를 거절할 수 없다는 듯 여린 그녀의 몸을 누르고 짓밟고 거칠게 몰아붙였던 거다.
그런 나를 네가 어떻게 견뎌냈나? 응? 이 작은 몸으로, 이리도 쉬이 상처 입는 연약한 몸으로 어떻게 그런 흉포한 나를 받아냈나?
"……유나."
이제는 알겠다. 내가 네게 상처를 준만큼, 사실은 나 역시도 편치 않았었다는 것을. 편치 않았었던 정도가 아니라 매우 힘겨웠던 것을. 그것을 그저 바보처럼 너를 안고 또 안고 아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 해결하려 들었다는 것을.
하지만 그건 위안이 아니었다. 그렇게 해결하려 해선 안 되었다.
"유나."
나는 네가 미웠다. 아니 야속했다. 관계를 마친 후 매몰차게 돌린 등을 바라볼 때마다 서러웠다. 날 보되 보지 않는 네 시선이, 내 곁이 아닌 다른 곳에서의 삶을 꿈꾸는 네가 나는 서글펐다. 언제든 널 보내줄 수 있다 자신하였지만, 사실은 날아가지 못하게끔 빗장을 만들고 걸고 또 만들고 걸고 또 만들어댔다. 그리했음에도 내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진실을 꽁꽁 감추었다.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게끔 나를 숨겼다.
"유나."
침대 위에 누워 작은 미동도 없이 잠에 묻힌 유나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뮤는 쓰게 웃었다. 뒤늦게 후회하는 이들을 어리석다 폄하했던 말이 우습게도 지금의 자신이 그러하지 않은가. 의자에 몸을 깊이 뉘였다. 피곤하다. 너무나도 피곤하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몇날며칠은 거뜬히 잠도 자지 않고 버틸 수 있을 것 같던 체력이 한순간에 방전된 듯 온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이대로 유나 옆에 누워 잠을 청하고 싶었다. 유나가 지금 무슨 꿈을 꾸든 함께 꾸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