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9 회: # 11-11 그 남자 -- >
"아아."
그제야 알았다는 듯 뮤가 엉성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유나도 모르고 있는 그 그림자를 붙인 건 뮤 본인이었다. 호위를 대동하고 다녀야 한다는 사실에 질색하는 유나에게 뮤는 공작성의 안주인이 된다는 건 그만큼의 귀찮음을 감수해야 하는 자리라 단단히 봇 박았다. 그 말에 유나는 더는 호위기사가 필요 없다는 둥의 말은 하지 않았지만 대신 한 명만 붙여 달라고 했고 그에 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자는 기사가 아니니까. 속였다고 볼 수만은 없겠지."
나지막한 뮤의 변명에 젠이 고개를 들어 피식 웃었다.
"그들은 기사 작위를 받지 않았으니 정식으로 말하자면 기사는 아닙니다만, 그래도 공작성의 그림자들은 모두 웬만한 기사들의 실력을 웃도는 자들입니다."
"어쨌든 기사는 아니지 않은가."
비루한 변명의 말을 내뱉는 주군의 모습이 신기했던 걸까. 젠은 한동안 뮤의 얼굴을 어색하게 쳐다보다 다시 한 번 피식 웃으며 고개를 흔들어댔다. 주군의 저런 모습이 낯설기는 하나 나쁘지는 않았다.
유서가 깊은 가문일수록 그 가문에 딸린 그림자들이 다수 존재하는 법이다. 그들은 가문을 위해 암암리에서 활동하는 자들로 그들의 정체는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알고 있었다. 지금도 그들의 존재는 공작성의 가주인 뮤를 포함하여 몇 명밖에 알지 못했다.
"사실 새민 한명만 몰래 붙여도 일당백인데 말이죠."
"아아."
뮤는 평범한 갈색 머리칼의 주근깨가 가득한 한 소년을 떠올렸다.
"새론에게 직접 교육받은 아이라 하여 눈여겨보았었지."
"성취가 굉장히 빠릅니다. 재능도 탁월하지만 스스로의 의지도 제법 단단합니다."
젠은 새민이 사용하던 반달모양의 창을 떠올렸다. 그러자 본능적으로 몸에서 작은 전율이 솟구쳐 올랐다. 그 창끝에 새겨진 살벌하리만큼 예민했던 예기를 떠올린 탓이다. 이건 같은 무인으로서의 호승심이리라. 비록 아직 나이는 어리다 하나 새민은 대단한 실력자였다. 불과 16살의 나이에 공작성의 그림자에 소속될 수 있었을 만큼.
"새론이 직접 유나에게 붙여두었다고 하더군. 제대로 교육 시켰으니 제법 쓸 만할 거라고. 만에 하나 제대로 일을 못했을 경우에는 그냥 죽여 버리라는데."
"……친동생한테 살벌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대는 군요."
하지만 더 살벌했던 건 그 말을 바로 자기의 동생 앞에서 했다는 거다. 웃긴 건 친누이의 입에서 나온 그 말에도 새민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는 거지만.
그만큼 자기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건가?
"허나, 아직은 경험이 많이 부족해."
"이제 고작 17살에 불과하니까요. 그래도 무서운 성장세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보고 있자면 저조차도 한번 붙어보고 싶을 정돕니다. 어쩌면 저를 마구 밀어붙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젠의 엄살에 뮤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래절래 저어댔다. 저 성격에 잘도 저런 말을 입에 담는다 싶다.
그때 다시 노크소리가 들렸다.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젠을 만류하고 뮤는 들어오라 명했다. 그러자 빠른 속도로 문이 열리고 사키가 들어왔다.
"주군! 겐두라 백작의 사병으로 보이는 이들이 드디어 수도로 입성했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그 무리에 겐두라 백작이 포함되어있을 확률은?"
"거의 백프로라고 합니다. 겐두라 백작으로 추정되는 인물을 계속 주시하고 있으라 명령해 두었습니다."
사키의 말에 젠이 물었다.
"목표는? 황궁인가?"
"그건 아직 정확하진 않아. 뜻밖에도 지금의 이동경로는 우리가 예측했던 곳과는 전혀 다른 곳이거든. 하지만 그들의 목표가 루노 안에 있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아."
"그걸 어떻게 확신하는데?"
젠의 물음에 사키가 어깨를 으쓱였다.
"목표를 두고 있기에 보일 수 있는 움직임이야. 이동에 거침이 없어."
"그렇다면 그들의 목표물에서 황궁을 제외시킬 수는 없다는 소리군."
"황궁도 루노 안에 있으니까."
젠의 말에 사키가 당연하다는 어투로 말을 이었다.
"차라리 여기로 바로 쳐들어와 주면 우리가 편할 텐데 말이야."
그러곤 짓궂은 말투로 말을 뱉어낸 사키의 얼굴엔 곧 있으면 펼쳐질 싸움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어린아이와 같았다. 그 모양새가 웃겨 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일단 사병들을 집합시켜라."
"이미 준비는 되어있습니다만 주군, 행선지가 아직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는뎁쇼?"
"반은 대기시키고 나머지 반은 그들을 쫓으라고 해."
"넵, 알았습니다!"
뮤의 명령에 사키가 거수경례를 하며 신나게 대답했다.
"쫓는 건 제가 움직이겠습니다."
젠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그런 그의 손에는 방금 전까지 살펴보았던 서류가 들려있었다.
"굳이 네가 나서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어차피 그들은 우리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조금 쯤은 날뛰게 내버려 둬도 되지 않을까?"
사키가 배부른 소릴 지껄여 대며 낄낄거려댔다. 그 말에 질책을 가한 것은 뮤가 아닌 젠이다.
"괜한 이들이 다칠 수도 있다."
"에이~. 설마 칼을 아무렇게나 마구 휘둘러대겠어?"
"그런 제대로 된 정신이 박혀 있는 이들이었다면 애초에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들지도 않았겠지. 명분이 전혀 없는 반역이라는 일에 가담하지도 않았을 테고."
"……흐음. 그것도 그렇군."
그동안 암암리에 일어났었던 일련의 사태를 떠올린 사키가 그제야 입술을 꾹 다물며 긍정의 고갯짓을 보였다.
"그럼 일련의 사병을 꾸려 먼저 출발하겠습니다."
젠의 말에 뮤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언제든 바로 출동할 수 있도록 만발의 준비를 해놓겠습니다."
그 말을 이어 사키가 여전히 발랄한 목소리로 말했다.
뮤는 귀찮다는 듯이 손짓을 내저으며 그 둘을 내보냈다. 사실 젠이 사병을 끌고 그들의 뒤를 쫓든 말든 그건 뮤의 관심 밖의 일이다. 사키의 말대로 어차피 그들은 더 이상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아니, 처음부터 사실 그랬다. 그 사실을 그들만이 몰랐을 뿐. 혹은 모른 척 했을 뿐. 굳이 토끼몰이 하듯 이렇게 몰아붙일 필요가 없다는 사키의 말이 틀린 건 아니나 젠의 말대로 괜한 희생이 나올 수도 있으니 어물쩍 거리는 것 보다야 빨리 처리해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다. 귀찮은 일일수록 빨리 끝내버리는 편이 결과적으로는 더 편하다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다른 면에는 이 시점에도 이미 늦었다는 것을, 이때까지도 뮤는 알지 못했다.
♠♠♠♠♠♠♠♠♠♠♠♠♠♠♠♠♠♠♠♠♠♠♠♠♠♠♠♠♠♠♠
"유나?"
뮤가 유나를 보게 된 것은 그로부터 정확히 3시간 후였다.
공작성으로 옮겨진 유나의 모습은 불과 오늘 아침까지 그의 품 안에서 새침한 표정으로 뮤를 흘겨보던 유나의 모습이 아니었다. 적어도 뮤가 기억하고 있던 그런 유나의 모습이 아니었다. 감히 뮤의 여자가 해도 되는 모습 따위가 아니었다!
"……배롤린은?"
"……공작성으로 끌고 오고 있답니다."
옆에서 젠이 심통한 어조로 말을 뱉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마치 모든 것이 자기의 잘못 같아 젠은 감히 뮤의 앞에서 제대로 고개를 들 수조차 없었다. 조금만 더 일찍 그곳에 도착했더라면-이라는 이미 후회해봤자 소용없는 생각을 젠은 몇 번이고 되씹고 또 되씹어댔다.
뮤의 시선이 아프게, 아프게 유나에게로 떨어져 내렸다.
얻어맞은 흔적이 고스란히 새겨진 두 뺨, 찢겨진 입술, 눈물과 먼지로 뒤섞인 머리칼과 새하얗게 질린 얼굴.
"……."
온 몸을 꽁꽁 묶듯 감싼 누군가의 망토를 살짝 걷어내자 그 안에는 찢겨 형편없이 구겨진 옷 사이로 벗겨진 상체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온 몸을 덧칠하듯 여기저기 흥건히 묻어난 피자국도…….
우두둑!
이가 갈린다. 배롤린에 대한 살의가 강렬하게 솟아올랐다. 네 놈이 죽고 싶어 발악을 해대는구나! 그래 내 친히 널 죽여주마. 뮤의 두 눈이 시퍼렇게 달아올랐다. 허나 절대 쉬이 죽게 내버려두지 않으리라. 절대 편하게 죽게 해주지도 않으리라 다짐하며 뮤는 두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론 배롤린의 짓이란 것은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다. 애초부터 신중한 행동을 할 만큼 용의주도하지 못한 놈이라는 탓도 있었지만, 그것 외에도 바보 같은 론은 사방에 자신의 흔적을 너무나도 많이 남겨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