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7 회: # 11 -- >
유나!
그때였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은. 그 소리는 방금 전까지와는 달리 아주 선명하고 분명한 것이어서 착각이라 더는 모른척할 수도 없는 그런 것이었다.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
온 세상이 빛으로만 가득한 이곳에 단 하나 남겨진 것이 있다면 나와 이 꽃뿐이리라.
황금빛의 꽃이 환하게 빛을 내며 온 몸을 떨구고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조금씩 몸을 꽃에게 향했다. 내 가까움이 기꺼웠는지 꽃이 한껏 더 격렬하게 몸을 떨었다.
"너 누구야?"
내가 물었다. 그러자 꽃이 마치 나를 향해 손가락질 해대듯 꽃잎이 하나같이 다 내 쪽을 향하게 가늘게 경련을 일으켜댔다. 그건 무언가를 오랫동안 기다린 것에 대한 보답을 받는 것 마냥 기꺼움이 가득한 움직임과도 같았다. 내게는 분명 그렇게 느껴졌다. 그 떨림은 한 번에 그치지 않고 두 번, 세 번, 네 번, 여러 번 계속되었다. 마치 자기의 존재를 알아달라는 듯이 그렇게 꽃잎을 떨어대고 또 떨어대며 내게 반응을 이끌어내려 하고 있었다. 나는 머뭇거렸다. 하지만 한없이 머뭇거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올려 꽃잎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리고 그런 내 행동은 꽃이 원하는 것이 맞았던 모양이다.
"아!"
내 손에 맞닿은 꽃잎이 마치 녹아내리듯 손끝으로 스며들었다. 한 잎 한 잎 모든 꽃잎들이 그렇게 모두 스며들고 이제 이곳에 나 외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여겨질 그때,
"어? 어어?"
갑자기 내 손끝에서부터 강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방금 전까지 꽃이 내뿜었던 그 빛이 이제는 내 손끝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내 온 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심한 갈증에 허덕임을 느낄 만큼, 이대로 타올라 죽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만큼 체온이 오르고 또 올랐다. 호흡이 가빠졌다. 심장이 미칠 듯이 두근거려댔다.
갑갑해. 여기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두 손으로 가슴을 마구 쳐대기 시작했다. 마치 그렇게 하면 불을 품고 있는 심장에서 열기가 빠져나가기라도 하듯이. 아무 소용도 없었지만 딱히 다른 어떤 것을 해야 좋을지 몰랐기 때문에 나는 무작정 그렇게 가슴을 때리고 또 때려대기만 했다.
그래도 열기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왜, 왜 이러지? 왜 갑자기 이렇게 뜨겁지? 나 이렇게 죽는 건가? 엄마, 아빠! 나 좀 도와줘! 나 좀 살려줘! 갑자기 왜 이렇게 된 건지 도무지 모르겠어!
잠시 멈추었던 눈물이 다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온 몸이 너무 고통스럽고 아파서 울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던 탓이다. 나는 엄마 아빠의 이름을 계속 부르며 나를 좀 도와달라고 외치고 또 외쳤다.
유나!
"헉!"
그때였다. 나는 화들짝 놀랐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가슴에서부터 일어나는 줄 알았던 불꽃보다 더 강한 열기가 손등 위로 떨어졌던 것이다. 얼마나 뜨거웠냐 하면 온 몸을 휘감았던 지옥불과도 같았던 것이 순간 아무 것도 아니라고 여겨질 만큼의 아주 강력한 세기였다. 그 뜨거움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계속해서 이어졌다. 처음은 손등 위, 그리고 손바닥을 맴돌던 그것은 이제 내 목덜미로 올라오고 내 볼을 올라와 내 입술을 덮치기까지 했다.
그리고 나는, 더는 그 뜨거움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
눈을 떴다.
나를 감싸고 있던 막이 깨어졌다.
그러자 시야로 갑작스럽게 파고드는 빛이 너무 강해 나는 바로 눈을 찌푸렸다. 모든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 어느 하나도 뚜렷하게 보이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 무엇 하나 분명하지 않은 시야 속에서도 단 하나, 내 옆에 있는 사람의 실루엣만큼은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아, 나는 당신을 안다. 나는 당신이 누군지 알고 있다. 당신은, 당신은…….
"……뮤."
뮤.
뮤, 뮤.
뮤, 아름다운 사람.
뮤, 내 아름다운 남자.
뮤, 내가 사랑하는 당신.
내 옆에서 내 이름을 부르며 내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을 남자의 이름을 내뱉으려 애쓰며 나는 입을 열었다.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만져보려 애썼다.
"유나!"
뿌연 시야 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선명이 아주 선명하게 들려왔다. 아아, 그래. 이 목소리다. 바로 이 목소리였다. 방금 전까지 계속해서 내 이름을 불렀던 목소리는 바로 이 목소리였다. 나는 내게로 다가와 고개를 숙이며 나를 안아오는 남자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흐느꼈다.
바로 이 남자다.
바로 이 남자가 나를 다시 이곳으로 데려왔다.
"흑흑."
서러움에 눈물이 났다. 왜 서러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만 지금 나는 너무 슬프고 서럽고 아팠다.
"유나."
이 목소리가 나를 다시 이곳으로 데려왔다.
"유나."
당신이 나를 다시 이곳으로 데려왔다.
"흑흑."
어쩌면, 어쩌면 나는 다시 이곳으로 오고 싶어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어쩌면 나는 이 남자를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포기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너무 대단한 남자라서, 당신이 너무 아름다운 사람이여서, 나는 당신이 환히 빛나는 그만큼 아파했을 지도 모른다. 내겐 너무 과분한 당신이었기에 당신이 내게 진심을 품을 리 없을 거라, 처음부터 그리 여기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바보처럼 당신 곁을 떠날 수 없었지만.
적어도 겉으로만이라도 내 곁에 있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나는 그리 여기며 살았을 거다. 언젠가는 당신에게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날 수도 있겠지. 그래도 한쪽 곁엔 내 자리를 남겨놔 준다면 그걸로도 나는 살아갈 수 있다고, 나는 견뎌낼 수 있다고 그리 생각했었다. 애초에 내가 당신을 온전히 갖는다는 것 자체를 나는 믿지 않았기 때문에, 아니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불안한 내 마음을 다독이며 당신 곁에 남았었다.
"뮤."
그런데 그런 당신이 내 곁에 있다. 끝까지 내 손을 잡아주고 있다.
아니 아니, 나는 이미 당신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모든 것이 끝이라 여겼던 그 순간, 나는 당신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슬펐다. 그때가 되어서야 겨우 알아차린 당신의 마음에 나는 너무 많이 슬펐다.
"유나."
"당신 목소리가 들렸어요."
목소리가 심하게 갈라져 있었지만 말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내 말에 나를 끌어안고 있던 뮤가 몸을 들어 올려 나와 시선을 맞춰온다.
"날 부르는 목소리."
"……."
"그 목소리를 들었어요."
"……."
"그 소리에 깼어요."
그 말에 뮤가 웃었다. 그가 웃자 순간 주위가 환하게 빛이 나는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내 눈에는 그 웃음은 아주 많이 아파보였다.
"알아요."
"……."
"당신이 나 사랑하는 거."
"……."
"그런데 바보처럼 당신은 아직도 그 사실을 모른다는 거."
"……."
"알아요?"
뮤의 떨리는 손길이 내 볼이 조심스럽게 닿았다. 그 따뜻함에 나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뮤가 다급하게 내 이름을 부른다.
"유나. 눈을 떠라."
마치 눈을 감으면 두 번 다시 눈을 뜨지 않을 것처럼 뮤는 내게 눈을 뜰 것을 재촉했다. 그 말에 나는 가까스로 눈을 떴다. 사실 피곤했다. 빛도 너무 강해서 눈을 뜨고 있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뮤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어 나는 애써 잠의 기운을 몰아내야 했다.
"바보 뮤."
나는 방긋 웃었다. 이 남자가 이런 표정을 지을 줄은 상상도 못했었는데. 이렇게 흐트러진 얼굴을 볼 수 있을 줄은 정말로 몰랐었는데. 하지만 그 모습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당신에겐 당당한 것이 더 어울리니까.
"당신은 바보예요."
"……."
"당신은 정말로 바보예요."
"……그래."
억눌린 목소리로 뮤가 대답했다. 내 손을 쥐고 있는 손등 마디에 핏줄이 솟아올라 있었다. 강하게 다문 입술이 헤진 것을 보며 나는 가슴이 아팠다.
"걱정 말아요."
"……."
"조금만, 조금만 잘 테니까요."
"……."
"이젠 금방 일어날게요."
"……."
뮤는 말없이 나를 감싸 안았다. 침대로 파고들어와 나를 가슴에 품고 안아주었다. 손으로 등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져주었다. 다정하게 머리도 쓰다듬어주었다. 마치 아기를 대하듯 하는 그 행동에 웃음이 나와 나는 입으로 방긋 웃으며 다시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품에서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