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4 회: # 11 -- >
나는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나는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길게 아주 길게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왜 계속 꿈속에 있는지 따위의 의문은 없었다. 그곳은 너무나도 포근하고 아름다운 곳이어서 나는 오히려 이 꿈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곳에서 나는 행복했기 때문이다. 여태껏 이토록 안전하고 포근하고 행복한 곳은 없었다는 듯이 나는 꿈속을 거닐고 또 거닐어 다녔다.
참 신기하지. 꿈속에서는 아무리 걸어 다녀도 피곤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걸어도 생생했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어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심지어 날고 싶다고 생각하면 하늘을 날 수도 있었다. 이곳에서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이 나를 참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행복한 건, 이곳에 바로 엄마 아빠가 있다는 거다.
"엄마!"
나는 엄마를 향해 뛰어갔다. 이곳에서 내 몸은 어린아이의 것으로 변해있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딱히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당연하다고 여겨지기까지 했다. 엄마는 텔 밭 한가운데 서서 날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엄마.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하늘빛의 엄마가 나를 꼭 안아주었다.
"우리 유나."
그렇게 내 귓가에 속삭이며 엄마가 나를 안아준다. 그리고 그런 엄마와 나를 아빠가 다시 꼭 안아주었다. 아빠가 다가와 우리를 한 번에 안아줄 때면 엄마는 고개를 아빠의 어깨에 기대곤 했었다. 아주 다정한 몸짓으로. 이 순간이, 나는 아주 많이 좋았다. 행복했다. 그래서 웃었다. 아주 크게.
"어? 저런 색 텔도 있었네?"
그때 내 눈에 독특한 색의 텔이 보였다. 나는 엄마 품에서 바동거리며 내려와 처음 보는 텔 꽃으로 달려갔다.
"엄마, 엄마. 텔 꽃이 이상해. 텔 꽃 맞아?"
텔의 꽃잎의 색은 하얀색, 짙은 파란색, 보라색, 붉은색 다양하지만 수술은 모두 하늘색이다. 그게 바로 텔의 특징이었다. 그래서 바로 텔을 하늘의 꽃이라 부르기도 하는 이유다. 하지만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텔은 꽃잎은 밝은 황금빛의 노란색이었다. 그건 하등 이상한 이유가 아니다. 문제는 수술이 에메랄드 색이라는 거다. 맹세코 이런 색의 텔은 처음 보았다! 다른 꽃인가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하지만 이건 분명 텔이었다. 내가 텔을 못 알아 볼 리 없었다. 다른 것과 착각할 리도 없다.
"엄마, 수술이 하늘색이 아닌 텔도 있었어?"
그렇게 묻자 어느새 내게로 가까이 다가온 엄마가 손으로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방긋 웃어준다.
"아니. 우리 유나도 알다시피 텔의 수술은 모두 하늘색이란다."
엄마가 그렇게 대답해주었기 때문에 나는 더 고개를 갸우뚱거려야 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손가락으로 내가 보고 있는 텔을 가리키며다시 물었다.
"그렇지만 이것 좀 봐봐. 이 꽃은 텔이 분명한데 수술이 하늘색이 아니잖아."
"그 꽃은 텔이 아니잖니."
"텔이 아니라고?"
엄마의 부정에 깜짝 놀라 나는 다시금 뚫어져라 꽃을 관찰해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보고 또 보아도 이 꽃은 텔이 틀림없었다.
"엄마, 이 꽃은 텔이 맞아. 색만 다를 뿐, 텔이 맞아."
"아니야, 유나야. 그 꽃은 텔이 아니야."
하지만 엄마는 여전히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서 나는 한층 더 어리둥절해져야 했다.
그 후로 나는 아주 오랫동안 그 꽃을 맴돌고 또 맴돌았다. 마치 꽃이 살아 움직이는 동물이라도 되는 듯 경계선을 세워 너무 가까이는 가지 않았다. 멀찌감치 떨어져 꽃을 노려보며 정체를 밝히려 애써보았지만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설령 내가 꽃에게 이름을 물어본다 해도 꽃이 대답해 줄 리 만무하니 더욱 답답해졌다.
이 꽃이 텔이 아니라고 엄마한테 들었던 그날, 그럼 이 꽃의 이름은 뭐냐고 나는 엄마한테 물었었다.
"엄마도 모르겠어."
엄마는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의심스런 눈초리로 엄마를 노려보았다. 물론 엄마가 이 세상의 모든 꽃 이름을 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는 엄마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웃으며 답하는 엄마의 얼굴은 이 꽃의 이름이 무언지 정확히 알고 있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정말로 몰라?"
"정말로 모르겠구나."
몇 번이고 의심스럽다는 듯이 되물었지만 여전히 모른다는 엄마의 말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야했다. 안다면 굳이 내게 가르쳐주지 않을 이유가 없을 테니까. 실망스럽다는 내 표정에 엄마는 웃으며 말했다.
"우리 유나가 이름을 지어주지 않으련?"
"내가?"
"그래."
"하지만 이름이 있을 거 아냐. 우리가 모르는 이름이지만 분명 이름이 있을 거야. 그리고 누군가는 이 꽃의 이름을 알 거고."
"걱정 말렴. 아직 그 꽃에는 이름이 없으니까."
"이름이 없다고?"
엄마의 말은 굉장히 아리송한 것이었다. 엄마는 분명 이 꽃의 이름을 모른다고 그랬는데 그렇다면 이 꽃에게 이름이 없다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하지만 나는 더는 묻지 않았다. 엄마가 내게 거짓말을 할 리 없다는 걸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나 역시도 그런 기분이 이었다. 이상하게 여겨지겠지만 나도 이 꽃에게 아직 이름이 없다는 엄마의 말이 사실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왜 그런 기분이 든 거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답해야 좋을지 설명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렇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편할 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이 꽃에는 이름이 없으니 내가 지어줘야겠다고. 그렇게 결심한 뒤부터 나는 그 꽃을 맴돌며 뭐라고 이름을 지을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꽃은 참 신기했다. 텔과 흡사한 모양이었지만 텔과는 아주 달랐다. 왜냐하면 이 꽃은 내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스스로 빛을 내곤 했던 것이다.
꽃이 스스로 빛을 내다니!
처음엔 그러지 않았다. 처음 이 꽃을 발견했을 때는 내가 다가갔을 때 빛을 내기는커녕 그저 텔과 그저 흡사한 꽃에 지나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 다음 날이 되자 이 꽃은 더는 텔과 흡사한 꽃이 아니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희미하지만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와!"
그것에 감탄하기도 잠시.
그 다음날엔 그 빛이 더 강해졌다. 그리고 그 빛의 강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세어져갔다. 세상을 환하게 비출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건 마치 태양 같았다. 더 신기한 것은 빛이 강해도 눈이 부시거나 하진 않다는 거다. 꽃에 가까이 다가가 그 빛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어도, 아주 오랫동안 꽃을 바라보며 앉아있어도 나는 전혀 눈이 피곤하거나 아프지 않았다.
그런데 그건 나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었나 보다. 엄마 아빠는 달랐다. 꽃이 강한 빛을 뿜어내면 낼수록 엄마 아빠는 꽃에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다. 마치 빛이 몸에 닿으면 화상을 입을 것처럼 멀찍이 물러서 있었다. 또 눈을 가늘게 뜨고 빛 속에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눈이 너무 부셔서 그렇게 눈을 뜨지 않으면 눈이 많이 피곤하고 아프다고 그랬다.
나는 꽃의 곁에 앉아 꽃과 함께 있고 싶었다. 하지만 꽃과 함께 있고 싶은 만큼 나는 엄마 아빠와도 함께 있고 싶었다. 누구와 더 함께 있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엄마 아빠였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꽃과 좀 거리를 두고 앉아서 꽃을 바라보아야 했다. 꽃에 가까이 갈수록 엄마 아빠와는 멀어져야 했기에 엄마 아빠가 최대한 꽃에 가까이 올 수 있을 만큼의 거리를 만든 다음 엄마 아빠 곁에 앉아서 나는 꽃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처음엔 괜찮았다. 그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았기 때문에. 하지만 거리는 점점 더 벌어져갔다. 빛은 나날이 강해져갔다. 그렇게 빛이 세어질수록 엄마 아빠가 꽃에 다가설 수 있는 거리는 점점 더 멀어져갔고 더불어 나 역시도 꽃과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멀어지면 그만큼 빛의 강도가 다소 약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정도의 세기도 엄마 아빠에게는 너무 강한 것이라 했다.
그렇게 점점 멀어져 가는 거리에 나는 속이 타 발을 동동 굴려야 했다. 어느새 나와 꽃의 거리는 꽃이 아주 희미하게 보일 정도로 멀어졌다. 나는 가까이 가서 꽃을 보고 싶었지만 애써 참아냈다. 아직은 꽃보다 엄마 아빠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엄마 아빠와 절대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이름은 정했니?"
내 곁에 앉아 함께 꽃을 바라보던 엄마가 슬그머니 물어왔다. 절래절래. 나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이름 짓는 것을 깜빡한 것이 아니다. 나는 노력했다. 아주 많이 노력했다. 하지만 이름을 지어보려고 이리저리 애를 써 보아도 그 어떤 이름도 지을 수가 없었다. 맘에 드는 이름을 떠올리지 못한 탓이 아니었다. 그런 사소한 이유가 아니었다. 웃기게도, 정말로 웃기게도 그 어떤 단어도 저 꽃을 보며 떠올리지 못한 탓이었다. 꽃을 생각하면 머리가 하얘졌다. 마치 백치처럼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엄마는 조급히 굴지 말라고 말하며 상냥하게 웃어주었다. 그 말에 나는 애써 고개를 끄덕였지만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갑자기 저 꽃 가까이 가고 싶어졌다.
"엄마, 아빠. 나 꽃한테 잠깐 다녀올게. 가까이 가서 보고 싶어."
"그래."
내 말에 엄마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준다.
"여기에 있어, 응?"
"응, 알았어."
"다른데 가면 안 돼?"
"쿡쿡. 걱정 말라니까."
그 확답에 그제야 안심하고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꽃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내가 달려가자 그런 내 존재를 반겨주듯이 꽃의 빛이 밝아지고 밝아졌다. 오래지 않아 나는 꽃에 다다랐고 나와 꽃의 주위는 모든 것이 하얗게 보일 정도로 강한 빛으로 감싸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