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2 회: # 11 -- >
그렇게 무력으로 얌전해진 나를 확인한 론이 다시금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참 웃기다. 내가 웃기다. 그런 론의 모습 뒤로 펼쳐진 하늘이 아름답다는 생각 따위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
하지만 하늘은 아름다웠다. 정말로, 아주 많이 아름다웠다. 푸르고 높았다. 깨끗했다. 구름조차 없었다. 그저 바다처럼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
배롤린 남작 가(家)에서 나오고 난 후 지난 이년 동안, 나는 배롤린 남작과 론을 다시 만날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물론 얼굴은 볼 수 있겠으나 개인적으로 만날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그리 여겼었다. 그 지옥 같은 곳에서 탈출한 것과 동시에 아주 자연스럽게 그 쓰레기 같은 놈들을 내 인생에서 드디어 떨궈내었노라고, 이제 그들과는 이걸로 끝이라고 그리 혼자 결론 내렸던 모양이다. 그건 내 희망과도 같은 것이었을지 모른다. 작은 우연이라도, 더는 그들과 연관되는 일이 없기를, 그들과는 마주칠 일이 없기를 바라는 내 희망.
"……."
점점 더 숨이 부족해져갔다. 공기, 공기가 필요했다. 나는 내 목을 조르고 있는 론의 손을 지금이라도 치우고 싶었지만 이젠 불가능하다는 걸 안다. 본능적인 몸의 파닥거림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조차 아주 약하디 약한 것이었다. 론은 그 사실이 아주 만족스러웠던 모양이다. 날 내려다보며 웃는 그 얼굴에 짙은 만족감이 가득했다. 소름끼치도록 음탕한 욕정을 고스란히 내보인 채 그의 밑에 깔린 나를 아주 황홀하다는 듯이 그는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금씩 시야가 흐려져 갔다. 가빴던 숨은 이제 정신을 앗아갈 정도가 되었다. 조금씩 내려앉는 어둠의 장막이 시야를 잠식해가는 범위가 넓어져간다. 그것이 거의 끝까지 다다라 바로 앞에 있는 론의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다 여겨졌을 때, 그때 나는 깨달았다. 이제 정말로 내 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 뮤, 뮤.
그리고 이제 나는, 정말로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론도, 론의 뒤로 펼쳐진 하늘도, 내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뮤, 뮤.
그러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대신 뮤가 떠올랐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 순간, 오로지 뮤만이 생생하게 내게 보였다. 그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닌 내 기억 속에 새겨진 그의 모습이리라. 지금 이 끔찍한 순간조차도 감탄이 나올 만치 아름다운 뮤의 모습에 나는 웃었다.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것이 비록 겉으로는 표가 나지 않는 웃음일 지라도 나는 웃을 수 있었다. 그 순간 결심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적어도 내 몸에 남겨진 뮤의 흔적만을 가지고 가리라, 고.
뮤와르노와, 아름다운 당신. 내 사람. 이 순간 떠오른 사람이 당신이라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생각하며 이 미친놈에게 더럽혀지는 일만은 결코 겪지 않으리라 흐트러진 호흡 끝자락을 겨우 붙들어 맨 채 그것만을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내 몸에 더는 반항할 힘 따위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안 론이 내 목을 졸랐던 양 손을 떼어냈다. 갑작스럽게 뚫린 목구멍으로 부족했던 산소가 치밀고 들어와 속을 비틀어 놓는다. 쿨럭쿨럭. 거칠고 메마른 기침이 쏟아져 내렸다. 몇 번의 거친 호흡으로 어느 정도 산소는 채울 수 있었지만 여전히 심장은 헐떡거려댔고 시야도 보이지 않았다.
서둘러 내 옷자락을 벗기려드는 론의 더러운 손길을 감각으로 느끼며 나는 손바닥으로 바닥을 툭툭 쳐갔다. 필사적으로 은장도를 찾았다.
부디 신이시여, 제게 마지막 자비를 베푸소서.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
신은 내 기도를 들어주었다.
나는 웃었다.
바보 같은 론은 이 은장도를 장난감으로 치부하며 너무 무시했다. 멀리 던지지도 않은 채 바로 내 옆에 내버려둔 것을 보니 무시해도 단단히 무시한 거지. 론의 그 무시가 내게는 천만 다행이었지만.
단검을 쥐었다. 검을 쥐었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그 시린 기운에 몸을 움찔거리곤 했었는데 지금 이 순간은 그 시림이 너무나도 반가웠다.
은장도를 쥔 손에 슬며시 힘을 줘보았다. 미약하지만, 괜찮았다. 이 정도면 괜찮으리라 여겨졌다.
이 검은 론에게 향하는 것이 아닌 나를 향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 빌어먹을 만치 연약한 힘, 이미 론을 죽이는 것에 실패했기 때문에 이 힘으로 다시금 그를 처리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래도, 그래도 내 목은 끊어 놓을 수 있기를 기도하며 나는 크게 숨을 들이 마쉬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마지막 발악을 다해 내 옆구리에 단검을 쑤셔 넣었다. 한 번에 깊게 찔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몇 번이고 나는 내 손바닥으로 단검의 끝자락을 밀고 또 밀어 넣었다.
"커억!"
"뭐, 뭐야?"
몇 번의 시도 끝에 나름 깊게 단검이 박힐 수 있었다. 그 내장의 충격 때문에 갑작스럽게 피를 토하는 나를 보며 그제야 론이 내 위로 고개를 숙여 몸을 맘껏 탐하던 얼굴을 들어 올리며 허둥지둥 거려댄다. 그 몰골을 보며 비웃어주고 싶었지만 나는 비웃는 것조차도 할 수가 없었다. 곧 론은 내 옆구리에 박힌 단검의 존재를 발견했다. 그가 버럭버럭 소릴 내질렀다.
"젠장! 제기랄! 너,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응?"
그러면서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막아보려 했지만 막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이, 이런! 시팔! 젠장! 미친년! 끝까지 날 거부해? 응? 네가 끝까지 날 거부해?"
"쿨럭!"
"그냥 한 번만 안아보려던 것뿐인데! 어차피 처녀도 아니니 이젠 나한테 한번 안긴다고 해도 티도 안 났을 텐데 대체 무슨 짓이야? 응?"
"쿨럭!"
아프다. 많이 아프다.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살이 찢기는 아픔은 뼈를 불라 버릴 만큼이나 뜨거운 고통과 함께 동반되어 온 몸을 덜덜 떨리게 만들었다. 입 안 가득 고인 피 때문에 안 그래도 쉬기 힘들었던 숨이 더 어려워졌다.
고통, 어지러움, 혼돈.
내 몸 위로 쏟아지는 끔찍한 이 모든 것들로 인해 이제 나도 더는 버티는 것을 포기했다.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었다.
"쿨……럭."
"아아, 미친년! 빌어먹을 년!"
론의 발악을 들으며 나는 웃었다. 내가 죽어도 넌 날 가질 수 없다. 그 사실이 너무나도 만족스러웠다.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다.
하아, 하아.
숨이 가빠온다.
온 몸이 너무 아팠다.
눈물이 흘러나온다.
뮤가, 뮤가 너무 보고 싶었다.
뮤, 뮤.
내가, 내가 이런 죽음을 맞이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것도 내 스스로 마지막 숨을 끊게 될 줄은 더더욱 더 몰랐다.
"……."
이런 날 당신은 용서해 줄까? 응? 끝까지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저버리려는 날 뮤, 당신은 용서해 줄까?
하지만 론에게 더럽혀지고 죽느니, 뮤-, 당신의 체온만을 끌어안고 죽겠어.
아, 보고 싶다…….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지더니 여름의 햇살보다 더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뮤, 뮤, 뮤.
당신을 사랑해. 당신을 많이, 아주 많이 사랑해. 내겐 당신이 너무 눈이 부셔서 이 마음을 인정하기까지 나도 참 힘들었어. 당신이 너무 눈부신 사람이어서 너무나도 아름다운 사람이어서 그런 당신이 내 곁에 누워있단 사실 하나만으로도 미치도록 행복했어. 많이 많이 행복했어.
"쿨럭, 쿨럭."
이 이상 뜨거워질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더 뜨거운 눈물이 감겨진 눈꺼풀 사이로 흘러내렸다.
"이런 빌어먹을! 괜한 짓을 해서는!"
보고 싶다, 뮤…….
"빨리, 빨리 도망가야 돼. 빨리."
"어서, 빨리, 빨리 도망가야- 컥!"
마지막으로 단 한번만이라도 보고 싶다, 뮤…….
어둠속으로 잠식해 들어가고 이젠 모든 것이 끝이라 여겼을 때, 나는 단 한 가지 사실에 웃음 지었다.
이대로 죽으면, 뮤 당신만이 내 온전한 남자인 거라고. 비록 당신이 후에 다른 여자를 안게 되더라도 내게 남자는 당신뿐이었노라고. 그러니 당신은 인정하지 않을지 몰라도, 당신은 내 것이라고.
영원히 내 사람이라고.
나도 당신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두둑!
이생에서의 마지막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그 순간, 나는 모든 것을 놓아버렸다.
============================ 작품 후기 ============================
꼭 죽었어야 하는 놈이 안죽고 끝까지 살아남아 사고를 치는 것.
그리고 별거 아닌 놈한테 제대로 뒤통수 맞을 수 있다는 것.
살다보니... 이런 경우가 많더라구요-.
-;;;
선추코 해주신 분들, 복받으세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