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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아름답다-185화 (185/206)

< -- 185 회: # 11 -- >

"아가씨!"

기사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내린 내가 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그새 좀 컸다는 건지 준이 내 어린아이 취급에 입을 뚜- 내밀다가 금세 씩 웃어 보였다.

"요즘 자주 오시네요."

"그러게. 근래 꽃이 필요한 일이 많아서."

"전 좋아요. 아가씨를 자주 볼 수 있으니까요."

생글생글 웃으며 나름 애교를 부리는 준의 모습이 나쁘지 않아 나는 마주 웃어주었다. 그러자 준이 내 손을 잡고 안쪽으로 이끈다.

"오늘은 무슨 꽃을 사실 거예요?"

"음, 오늘은 그냥 둘러보고 왔어. 둘러보다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사지 뭐."

어차피 라니가 준비하느라 걸리는 시간 동안 꽃구경이나 하자 싶어 온 것이기에 나는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며 싱싱한 꽃들을 둘러보았다. 아름답고 예쁘지만 확실히 네랜에 비해서 꽃으로 디자인한 물품들의 수량이라든가 꽃을 활용한 인테리어 장식 면에서의 활용 수준 등이 낮다. 어쩌면 내가 이곳에서 화원을 내면 장사가 잘 될 것 같다. 기분 좋은 예감에 나는 킥킥대며 웃었다.

그렇게 한참을 꽃을 구경하고 그 중 맘에 드는 색깔의 꽃이나 예쁜 것들은 몇 송이 골라 준이 들고 있는 꽃바구니에 넣었다.

"꽃다발로 만들어 달라고 전해주렴."

"네."

총총거리며 달려가는 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시계를 보았다. 천천히 둘러본다고 둘러보았는데도 시간은 얼마 지나지 않은 모양이다. 하여간 바쁠 때는 눈 깜짝할 사이에 한두 시간이 후딱 잘도 지나가면서 이럴 땐 참 느리게 간다 싶다. 곧 꽃다발을 가지고 온 준에게 꽃값과 준의 심부름 값까지 줬는데도 아직 여유가 있어 나는 그냥 라니와 만나기로 한 카페에 미리 가서 먼저 차 한 잔 마시고 있는 것이 낫겠다 싶어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로 했다.

"여기 있습니다."

오래지 않아 주문한 꽃차가 나왔다. 추운 날씨는 아니었지만 차는 뜨거운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 여름에도 왠만하면 뜨거운 차를 마시는 편이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자 몸의 온도가 순간 훅 올라가는 느낌이 들었다.

일부러 창가에 앉지는 않았다. 어차피 라니와는 이곳에서 만나기로 했으니 창가 자리에 내가 보이지 않아도 상관없을 것이다. 하지만 괜히 사람들이 내 모습을 보고 이곳에 오는 건 원치 않는 일이었기에 나는 밖에서는 내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 하지만 내게는 어느 정도 시야가 트인 곳에 자리를 잡았다. 시야가 트였다고는 해도 고작 눈 앞 건물 4개가 보이는 사각지대에 불과하지만 아예 막혀버린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그렇게 한정된 시야 속에서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무심히 바라보며 꽃차를 마시고 있었다.

평화롭구나.

실제 거리를 사람들의 속마음이야 어쨌든 겉으로 보여 지는 모든 것은 평화로워보였다.

순간 나는 불과 몇 달 전, 저 거리 속을 정처 없이 헤매었던 나를 떠올리고, 저 거리 속 한 가운데에서 멍하니 서 있었던 라니를 떠올렸다. 그리고 상상해 보았다. 순전히 궁금증이 인 탓이다. 만약 지금 내가 앉은 이 자리에서 그 때의 우리의 모습을 본 사람이 있었다면, 그 사람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사람도 그저 평화롭다고 나처럼 이리 생각했을까? 아니면 저런 정신 나간 여자들을 봤나, 혀를 차댔을까.

거리를 무작정 헤매었던 그때의 나는 결국 마차를 타고 나블링 해안으로 도망쳤다. 더는 이곳에 있을 수가 없어서. 있기가 힘들어서. 심하게 덜컹이는 마차 안에서 속을 달래며 울지도 못했던 내 모습이, 지금은 마치 아주 오래전 일처럼 느껴졌다.

라니는, 라니는 어땠을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자기를 조롱하는 영애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던 너는 그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다른 귀족 가(家) 여식들에 비해 한없이 허름했던 옷을 입고 있었던 네가 그 중 그 누구보다 아름다웠고 빛났다 말해준다면 너는 웃을까? 하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그 속에서 라니는 홀로 아름다웠다. 반짝이는 보석도, 화려한 화장기도 얼굴에 없었지만 라니는 그저 서 있는 그 자태 하나만으로도 가장 눈이 부셨고 아름다웠다.

"라니 줘야겠다."

방금 전 화원에서 산 꽃다발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애초에 목적 없이 그냥 산 꽃이기 때문에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불연 듯 라니에게 주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뒤에 서 기사에게 펜을 가져다 달라 부탁했고 그는 카운터로 가 펜을 빌려 내게 가져다주었다. 간단하게 고맙다는 인사를 고갯짓으로 건네고 펜을 건네받은 나는 꽃다발 속에 꽂혀있던 카드를 꺼내들었다. 아직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순백의 카드를.

내 가족 라니에게-, 라고 시작한 글귀는 그리 길지 않았다. 길게 쓸 공간도 없었다. 간단하게 문장을 끝맺고 다시 접어 카드를 꽃다발 사이에 끼워 넣었다. 이 꽃다발을 받고 웃어줄 라니의 얼굴을 떠올리자 무척 행복한 기분이 되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

"아가씨?"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것은.

갑작스런 내 행동에 기사가 놀란 듯 나를 불렀지만 나는 멍하니 그저 바라보았던 거리 한 곳을 집중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거칠게 일어난 탓인지 의자가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흔들렸지만 그건 기사가 재빨리 잡아준 탓인지 의자가 볼썽사납게 넘어지진 않았다. 넘어졌다면 아마 카페 안 사람들의 시선은 한 몸에 받았을 거다. 하지만 그것에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못할 만큼 나는 내가 우연히 본 무언가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쫓아오세요."

"네? 네."

절대 호위기사 없이 다니지 말라고 뮤가 충고 했었다. 물론 떼어놓을 생각도 없다. 특히나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오히려 나보다는 기사인 이 남자가 훨씬 쓸모가 있을 테니까.

서둘러 밖으로 나서며 나는 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스잔나 노르젠 영애의 호위기사였던 분, 그 분의 얼굴을 알고 있나요?"

"스잔나 노르젠……."

뜻밖의 내 질문에 그가 놀란 얼굴을 했지만 곧 그 얼굴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내젓는다.

"모릅니다."

"방금 그 사람을 봤어요. 이름은……, 나도 몰라요."

귀족 영애가 대동하고 다니는 호위기사의 이름을 일일이 외우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어지간히 유명한 사람이 아닌 한 당연히 모르는 것을. 게다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은 일개 영애의 호위기사를 맡지도 않는다. 가주나 좀 더 중요한 이들의 호위를 맡겠지. 게다가 난 그 남자의 얼굴도 한 번밖에 본 적이 없다. 라니의 정원에서 딱 한번.

"하지만 그 사람이 분명해."

그랬다. 한 번밖에 본 적 없는 사람이지만 그 남자가 분명했다. 검회색의 독특한 머리칼과 무엇보다 깊이 가라앉아 있던 그 특유의 분위기는 쉬이 잊히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에 헷갈리려야 헷갈릴 수가 없었다.

"이쪽으로 들어갔어요."

나는 그 남자가 사라진 골목길을 향해 걸었다. 왜 그를 찾아가느냐고 묻는 거라면 왜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 번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래야 할 것 같다. 반드시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아가씨."

그 때 기사가 내 앞으로 가로 막더니 슬며시 고개를 내젓는다.

"다시 카페로 돌아가십시오."

"네?"

생각보다 단호한 그 목소리에 놀라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자 굳게 다문 입매가 매우 고집스러워 보이는 사내가 강경히 내 앞을 막고 있었다.

"아가씨께서 그 자를 찾으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아."

"이미 노르젠 가(家)의 일은 매듭이 지어진 사건입니다. 물론 그 자가 이곳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주군께 보고는 드리겠지만 그것이 아가씨께서 이렇게 쫓으실 만한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리 행동하셨다는 것을 주군께서 아시게 된다면 화내실 지도 모릅니다. 카페로 돌아가십시오."

그리고선 앞으로의 행보는 절대 용인하지 않겠다는 듯 강경한 태도에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라 변명거리를 지어내서라도 그를 쫓아가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럴싸한 그 어떤 변명거리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한 번은 만나봐야 할 것 같다는 어설픈 말 따윈 통하지 않겠지.

길게 숨을 내 쉬며 포기를 표하고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뒤돌아서서 다시 카페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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