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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아름답다-184화 (184/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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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일어나기 위한 조건이란 건 사실상 없다. 그저 우연에 우연이 겹쳐 그것이 필연이 되었을 때, 일이란 늘 그렇게 일어나는 법일 테니까. 사소한 일이 쌓이고 쌓여 큰 화를 불러일으키듯이 말이다. 마치 지금의 나처럼.

"암만 생각해도 심술 나네."

탁. 나는 먹던 스푼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그러자 덩달아 식사를 멈춘 뮤가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린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왜 그래?"

그렇게 묻는 그 얼굴이 워낙에 아름다운지라 다정해 보일 법도 하건만 이제 난 안다. 느낄 수 있다. 저 아름다운 겉모습 뒤로 일렁이는 어둠의 기운을. 그랬다. 뮤는 내가 식사를 거르거나 입맛이 없다는 핑계로 끼적거리는 것 등을 매우 싫어했다. 하지만 지금의 내게도 심술을 부리는 사정이 있다. 단순한 반찬 투정 따위가 아니란 소리다.

"웨딩드레스요."

"그게 왜?"

"맘에 안 들어요."

"그럼 다른 걸로 바꿔."

별일 아니라는 투로 뮤가 말을 뱉어내었다. 어려울 것이 조금도 없다는 듯이. 문제는 뮤에게 전혀 어려울 것이 없게 여겨지는 그 문제가 내게는 무척이나 해결하기 까다로운 일이란 거다.

"그게 쉽게 가능하다면 제가 이러겠어요?"

"대체 뭐가 문젠데 그래?"

"바꿀 수가 없다고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어떻게 바꿔야 하는 지도 모르겠어요."

"결혼식과 관련된 문제는 모두 새론이 맡았다 들었는데. 그럼 새론한테 말하면 되지 않은가?"

그러니까 그 새론이 문제라고 이 남자야.

나는 불만의 기운을 가득 담아 뮤를 노려보았다.

"새론이 내 말을 안 들어주잖아요!"

그동안의 불만을 터트리며 신경질을 버럭 부리자 뮤가 피곤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더니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직접 말하지."

"혹, 혼내려는 건 아니죠?"

뮤의 말이 반가웠지만 그렇다고 새론이 혼나는 것을 원한 건 아니기에 걱정스런 기색을 내비치며 나는 고개를 저어보였다.

"혼내진 말고요. 네?"

"……그냥 드레스를 네 맘에 드는 걸로 바꾸라 전하지."

"아니 그전에 준비해 두었다는 그 드레스를 먼저 제가 볼 수 있게 해주세요."

"뭐?"

이젠 어이가 없다는 표정의 뮤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안다. 당신의 지금 그 심정, 이해한다. 이해하고말고. 식 전까지 볼 생각도 말라는 그 말에 나도 얼마나 어이가 없었던가.

"드레스를 입어보기는커녕 아직까지 본 적도 없어요. 본 적도 없다고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안 그래요? 결혼식 날 내가 입어야 할 옷인데 결혼은 한 달 남긴 아직까지 본 적도 없다니!"

그동안 꾹꾹 눌러 두었던 불만을 하나둘 꺼내 보이기 시작하자 어느새 봇물처럼 커다래진 불평이 폭풍처럼 입 밖으로 쏟아져 흘러나왔다.

"하물며 이제는 치마 끝자락만이라도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라고요!"

"왜 안 보여 주는 거라는데?"

"……도망갈 거래요."

"뭐?"

"웨딩드레스를 보면 제가 도망갈 거래요. 반드시. 그래서 결혼식 당일까지 안보여주겠다고 하는 걸 제가 우기고 또 우겨서 결혼식 전날에 보고 입어보는 걸로 타협 봤어요."

"……."

"나 참. 도망가긴 내가 어디로 도망간다고 그러는 건지. 괜한 소릴 해서 사람 마음 더 불안하게 만들어 놓은 건 모르고선. 쳇. 처음에는 결혼 전날에라도 보여준다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심술이 나잖아요. 그래서 따졌지요. 절대 도망가는 일 없다고 당장 보여 달라고. 그랬더니 새론이 하는 말이 어차피 결혼 전날 보여주기로 하지 않았느냐면서 그 때보라고 딱 부러지게 제 말을 거절하는 거 있죠."

이건 횡포다. 분명한 횡포. 내가 새론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아낀다지만 그래도 이번 일은 새론이 너무했다 싶다. 세상에 결혼식 당일이 되어서야 웨딩드레스를 보여줄 생각을 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말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결혼식 주인공에게. 당사자에게 너무나도 중요하다 할 수 있는 웨딩드레스를 어떻게 그 때까지 감추겠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 가장 속상한 일은, 할머니의 궁금증에 답해 줄 수 있다는 것이 거의 없다는 거다. 그것이 가장 속상했다.

할머니와는 꽤 자주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엄마 아빠의 결혼식을 챙겨주지 못한 미안함과 죄책감이 덧입혀진 탓인지 할머니는 내 결혼에 지대한 관심을 쏟고 계셨는데 어쩔 때는 굉장한 두께의 편지에 기겁하기도 했었더랬다. 사실 웨딩드레스도 새론이 이미 준비되어 있다는 말만 하지 않았더라도 할머니가 친히 준비한 드레스를 입어야 했을 거다. 편지는 할머니의 성격을 반영하듯 무척이나 점잖고 격식에 맞춰진 것이었지만 그 속에 감춰진 흥분은 쉬이 감출 수 없는 것이었다. 결혼 일주일 전에 오시겠다는 문구를 읽고 나는 좋아서 방방 뛰어댔다. 그리고 미리 방을 치워놓을 테니 그 전에라도 오실 수 있으면 언제라도 와달라는 답장을 보냈다. 물론 그 답장을 보내자마자 공작성 시녀들에게 방들을 미리 청소해 달라 부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중간에 조금, 아주 조금 무거운 분위기가 조성되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나름 화기애애한 식사를 마치고 나는 오늘도 라니네 집으로 가기 위해 마차에 올랐다.

"우와~, 오늘 날씨 진짜 좋다."

창을 열고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즐거움을 만끽하다 순간 오늘은 라니를 밖으로 불러내서 놀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음음, 좋아. 아주 좋아."

집에서 차 마시고 수다 떠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예쁜 카페에 들어가 수다 떠는 것도 색다르고 좋겠지 싶다. 물론 이제는 그 어떤 누구를 거리에서 만나더라도 당하고만은 있지 않으리라는 자신감도 그런 내 의견을 부추겼다.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막 도착한 라니네 저택 앞에서 나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다가온 기사에게 고개를 흔들며 내리지 않겠다는 뜻을 보였다. 기사는 의아해보였지만 별다른 대꾸는 하지 않고 묵묵히 내 말을 기다렸다.

"집사를 불러주세요."

"집사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요 며칠 자주 방문한 탓에 익숙해진 얼굴의 집사가 내게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마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기사를 힐끔 보는 폼이 에스코트 안하고 뭐하고 있느냐는 눈치다. 그래서 내가 얼른 입을 열었다.

"계획을 조금 바꿨어요. 날씨도 좋고 바람도 좋으니까 오늘은 외출하자고 라니에게 전해주세요. 준비하고 내려오라고요."

"외출하신다고요?"

"네."

그러자 집사가 알았다는 듯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왔다.

"아, 아니, 잠깐만요."

내가 다급히 부르자 뒤돌아섰던 집사가 다시 내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고개를 숙여온다.

"갑자기 외출한다고 그래서 라니가 당황할 것 같네요. 게다가 준비하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으니까 2시간 뒤에 루노 3번지에 있는 카페로 오라고 전해줘요. 나는 화원에 가서 꽃 좀 둘러보고 갈 테니까 거기서 보자고 해요."

"알겠습니다."

집사는 다시 한 번 더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내게서 멀어져 갔다.

"내가 자주 가는 화원 알죠? 거기로 가요."

그리 말하며 기사에게 눈짓을 주자 기사가 조용히 마차 문을 닫아주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는 다시 움직였다.

루노 거리는 한산했다. 나는 마차 안에서 가만히 거리를 내려다보며 그곳을 활보하고 있는 사람들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화려한 옷차림, 화려하게 꾸민 영애들. 공작성 마차를 알아보고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도 보였지만 이제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았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저절로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그중 눈썰미가 좋은 몇 몇 사람들은 그 안에 내가 타고 있는 걸 보았는지 입 모양으로 내 이름을 발음해대고 있는 것도 눈에 띠었지만 그것도 역시 신경 쓰지 않았다. 뒤에서 하는 수다거리 정도야 저들이 뭐라 하던 나완 상관없는 일들이다. 하나하나 일일이 궁금해 할 만큼 난 타인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하지 않을뿐더러 이제 그들의 입방아는 더는 내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개중엔 아직까지도 나를 얕보고 전처럼 함부로 대하려드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건 그때 되어서 상대해 주면 된다. 이제 나는 알브레히트의 힘을 휘두를 자격을 갖추었고 그리고 더는 전처럼 바보처럼 당해줄 생각 따윈 전혀 없었으니까.

마차는 달리고 달려 어느새 화원에 도착했다. 내가 왔다는 걸 그새 전해 들었는지 준이 방긋방긋 웃으며 날 반기고 있었다.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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