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82 회: # 11 -- >
누군가 그랬다. 사람은 때론, 가장 좋은 선택을 하려던 것이 오히려 가장 최악의 결과를 낳곤 한다고. 그 끝이 어떤 파멸로 자신을 몰아갈지 예상치도 못한 채, 좋은 선택을 하였노라고 희희덕 거리는 모습이 안쓰러울 만큼. 또는 반대로 가장 최악의 상황이 닥쳐와 모든 것이 끝났다 절망했던 것이 반대로 가장 최상의 결과를 낳기도 한다고 한다. 비록 그 사실을 처음에는 몰랐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그보다 더 좋은 변곡점은 없었을 거라는 말과 함께.
그럼 대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걸까? 나는 늘 그것이 궁금했더랬다. 좋은 선택을 했다 해서 그것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만은 않는다면 무언가 선택을 한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하지만 사람은 늘 무언가를 선택해야만 하는 동물이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내가 몇 살이 되어야 제대로 답할 수 있을 지는 나도 모르겠다. 어쩌면 평생 그 답을 구하지 못할지도 모르고.
며칠 전 난 정식으로 루이 토킨 경의 사과를 받았고 그것을 받아들였다. 나는 선택한 셈이다. 용서하는 것을. 어떻게든 선택을 해야 하는 거라면 사죄를 구하는 그의 사과를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 여겨 사과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사실 그는 내게 사죄할 그 어떤 것도 없다. 그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일 뿐. 타인의 평온을 위해서 때론 불필요하다 여겨지는 사과를 받아들일 줄 아는 것도 관용이라는 것을 이젠 나는 배워야 했다. 그래서 나는 루이 토킨 경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를 위해서가 아닌 라니를 위해서.
"그런데 레니가 돌아오는 날짜가 언제였지?"
"음? 아, 그러고 보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네. 음, 음 날짜가 이제 얼마 안 남아서……, 아, 내일 모레쯤에 돌아오겠다."
내 질문에 텔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던 라니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곧 답을 해주었다.
레니는 지금 한창 신혼여행을 즐기고 있는 중이다. 장장 한 달이라는 시간의 신혼여행을. 기집애. 부럽기도 하지. 그렇게 길게 신혼여행을 즐기다니.
"진짜 좋겠다."
결혼식 날, 신혼여행을 장장 한 달 동안이나 다녀온다는 레니의 말에 내가 너무 대놓고 부러워했었나보다. 그날 저녁 공작성으로 돌아오고 한 차례의 격정적인 섹스 후 숨을 고르고 있는 내게 뮤가 입을 떼었다.
"난 할 일이 많다."
"……."
참으로 뜬금없던 말이었으나 그 말이 무얼 뜻하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더랬다. 당황한 눈빛을 고스란히 내보인 채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 마세요. 한 달은 처음부터 생각하지도 바라지도 않았으니까요. 오히려 아예 못 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가 바쁜 사람이란 건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내게 쏟는 시간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시간을 집무실에서 보내다시피 하는 남자가 바로 그다. 오히려 내게 시간을 내어줘서 감사하다고 고개를 조아려야 할 판국이랄까.
어쨌든 한 달이라는 긴 신혼여행을 떠나기 직전 레니는 내게 단 한가지만을 신신당부했다. 그건 바로 자기가 여행간 사이에 술판을 벌이지 말라는 것.
"……내가 정말 미쳐."
"응?"
낮게 속살거린 말에 라니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눈빛에 의아함이 가득 새겨져 있다. 무슨 말인지 제대로 듣지 못한 모양이다.
"레니 말이야."
"레니가 왜?"
"갑자기 그 기집애가 신혼여행 가기 전에 했던 말이 생각나서."
"무슨……아아. 자기만 빼놓고 놀지 말라는 말?"
"정확히는 우리끼리 술판을 벌이지 말라는 것이었지."
"쿡쿡."
"내가 정말 미쳐. 웬일로 심각한 얼굴을 하고선 부탁 하나만 들어 달라 운을 띄우나 했더니. 뭐라고? 술판을 벌이지 말라고? 고작 그따위 이야기나 하려고 그렇게 무게를 잡았나 생각하면 어이가 없어서."
"귀엽잖아."
라니의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나는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귀엽기는!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난 귀엽던데."
"자기 없을 때 술판 벌이면 평생 저주할 거라는 기집애가 귀엽니?"
"쿡쿡. 그건 그냥 장난친 거잖아."
"……."
아니야, 라니야. 레니는 정말 그러고도 남을 아이야.
현실을 직시시켜 주고 싶었지만 그만 두기로 했다. 라니의 영혼이 더럽혀질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어쨌든 레니가 나를 저주할 일은 실제로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술판은 무슨 술판. 지금은 그 비스무리한 말만 꺼내도 난리 날 텐데."
"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았지?"
"응."
그랬다. 결혼식 날이 얼마 남지 않은 탓이다.
내 결혼식이.
"떨려?"
"아직은 괜찮은 것 같아. 실감이 나지 않아서 그런가봐."
"날짜가 다가올수록 많이 떨릴 거야."
"너도 그랬어?"
내 말에 라니가 예쁘게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응. 많이 떨렸어. 설렜고, 행복했어."
자그맣게 웃으며 속삭이는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나는 덩달아 행복한 기분이 되었다.
뮤는 엄청난 속도로 결혼식을 준비해댔다. 사교계에 난리가 나든 수도에 어떤 소란이 일든 그건 애초에 관심사항이 아니라는 듯 뮤는 뜻대로 모든 일을 진행시켜댔다. 물론 나 역시도 타인의 평가나 시선에 이미 무덤덤해질 대로 무덤덤해진 터라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아랑곳하지 않았지만 하지만 뮤의 경이로운 일처리 속도에는 나조차도 머리가 멍해질 지경이다.
뮤의 보좌관으로 일하고 있는 사키 경을 비롯한 이들도 모두 엄청나게 쏟아지는 업무에 잠도 제대로 못자고 있다고. 라니의 말에 의하면 토킨 경은 요 며칠 잠만 자고 바로 출근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마나 토킨 경이 그들 중 유일하게 결혼한 사람이어서 그리 행동한 거라고, 다른 사람들은 아예 공작성에서 거주하고 있다나 뭐라나…….
그런데 모두가 지쳐 쓰러지기 일보직전인 요즈음 아주 생기 넘치는 얼굴로 공작성을 활보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새론만 신났어."
"킥킥. 새론은 그런 거 좋아하니까. 내 결혼식 준비할 때도 새론한테 도움을 많이 받았잖아. 아마 새론이 없었으면 그렇게 성대하게 결혼식을 치루지 못했을 거야."
그랬다. 그 사람은 바로 새론이었다. 공작 가(家)의 시녀장을 맡고난 이후로 가장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새론만이 신나게 여기저기를 날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바쁘다 바빠~, 그래도 좋구나 좋아~, 라는 말을 즐겁게 외쳐대면서.
"이런 와중에 무슨 술판을 벌이겠니. 하여간 레니는 괜한 얘기는 꺼내서. 쯧. 그런데 술 얘기 하니까 마시고 싶긴 하다."
"곧 식을 올릴 신부가 술은 무슨 술!"
쩝쩝 거리며 입맛을 다시고 있는 나를 타박하며 라니가 귀엽게 나를 흘겨본다. 그렇게 흘겨보아도 눈빛엔 다정함이 가득하기에 나는 그냥 웃어보였다.
"그런데 라니 너,"
"응?"
"너 예뻐졌다?"
전보다 제법 보기 좋게 살이 오른 볼은 어렸을 때보다 더 뽀얗게 보인다. 워낙에 살이 없었던 터라 그게 보기가 참 좋다. 그 살 오름이 라니가 사랑받으며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증거 같아 무척이나 기분 좋았다.
"갑자기 무슨 말이야."
뜬금없는 칭찬에 웃음이 터진 모양이다. 밝게 웃는 라니의 모습에 또 기분이 좋아 나도 덩달아 웃으며 소파에 깊게 몸을 파묻었다.
얼마 전에 레니의 결혼식이 있었다.
레니의 약혼식 날에 뮤가 참석했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던 모양이다. 하긴 약혼식 날 뮤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새 소문이 퍼졌는지 당장이라도 약혼식에 참여하겠다는 사람들이 넘쳐나 레이준 공자가 고생했었다고 레니한테 듣긴 했었지만. 결혼식에도 내가 참석하기 때문에 뮤도 또 같이 참석할 거라 여긴 모양인지 이번에는 결혼식 전에 여기저기서 서로 초대장을 보내달라고 아우성이었다고 레니가 투덜거려댔었다.
"너는 꼭 참석할 테니 공작님도 올 거라 여기고 있는 거지 뭐. 하여간 이럴 때만 친한 척들이야, 재수 없게."
"바보. 그냥 안보내면 되는 걸."
입을 삐죽거려대며 투덜거려대는 모양새를 하고 있음에도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던 레니의 모습은 정말 예뻤더랬다.
야옹~.
텔의 울음소리가 생각에 잠겼던 내 정신을 다시 현실로 이끌어내었다. 포동포동하게 살이 오른 텔은 이제 다른 고양이에 비해 비교적 통통한 고양이가 되었다. 어느새 라니의 품에서 떨어져 나온 텔이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다른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 풍성한 엉덩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는 저 게으른 녀석의 살을 어떻게 해야 빼줄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런데 준비는 잘 되고 있는 거야?"
"무슨 준비?"
"당연히 결혼준비지."
"아아, 그 준비."
"많이 바쁘지 않아?"
나는 다리를 소파 위로 올려 옆으로 몸을 뉘이며 길게, 아주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내 모습에 라니가 순식간에 걱정스런 표정이 되어 나를 내려다본다.
"왜? 무슨 일 있어?"
"일은 무슨."
"그런데 왜 한숨을 쉬어?"
"하나도 안 바빠서."
"음? 그게 무슨 말?"
"말 그대로 하나도 안 바쁘다고."
정말이다. 나는 하나도 안 바쁘다. 내 결혼식이라는데, 정작 그 주인공인 내가 하는 일은 하나도 없다.
"결혼식이 이제 한 달 남짓 남았잖아."
"그런데?"
"그런데 말이지. 나는 지금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현재 어떤 일이 남아있는지 하나도 모르고 있거든. 심지어 식이 어떤 순서로 진행될 것인지도 아직 들은 바가 없어. 지금 내가 하는 일이라곤 매일 마사지 받고 자고 먹는 것뿐이야."
"공작님께서 널 배려해 주시는 거 아닐까? 네 몸이 약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실 테니까."
조심스럽게 라니가 자신의 의견을 내어놓았다. 하지만 이 말에 나는 속으로 실소를 터트려야만 했다. 아마 라니가 아닌 다른 사람이 했더라면 대놓고 코웃음을 쳤을 지도 모른다. 배려는 무슨 얼어 죽을 배려냐고. 매일같이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남자한테 말이다.
"하아."
정말 진심으로 부탁건대, 정말 날 아끼고 배려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제발 하루에 한번만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하루걸러 한 번도 아니고 하루에 한번만, 딱 한번만.
"그래도 곧 드레스도 맞추고 해야 하지 않아? 네 몸에 맞아야 하니까 치수도 재야 할 테고."
"내 드레스 사이즈야 이미 새론이 다 알고 있고. 그리고."
"응?"
"새론이 그러는데, 이미 드레스도 다 준비해 놨대."
"아……, 그래?"
"응."
"그럼 입어는 봤고?"
"아직."
"왜 맘에 안 들어?"
"그런 것도 없어."
"왜?"
"본 적도 없으니까."
내 말에 라니의 눈이 대번에 동그래졌다.
"그럼 입어보지도 않고 본 적도 없는 드레스를 결혼식 당일 날 입는다고?"
"그 전날 입어보고 볼 수 있게 해준다는데."
"아니……그래도."
"그냥 당일 날 보고 입어도 문제없을 것 같다고 말하는 걸 내가 우기고 또 우겨서 타협한 것이 결혼식 전날 한 번 입어보는 거였어."
"그게……."
머뭇머뭇 반박하고 싶어 하는 라니의 얼굴을 보며 나는 다시 한 번 길게 숨을 내쉬었다. 지금 라니의 반응이 이미 내 드레스는 결정되어 있다고 새론에게 전해 들었던 그 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새론이 그러더라고. 내가 할 일은 그냥 편하게 빈둥빈둥 지내다가 결혼식 당일에 짜잔~ 하고 식에 나타나 주는 것이 끝이라나 뭐라나. 도망가지만 말래."
"하, 하하."
"정말 할 일 없지? 그지?"
"하하하."
"내가 이렇게 자주 너희 집에 와서 빈둥거릴 수 있는 이유도 다 그 때문이라고. 할 일이 정말로 없어서."
"그건 좋은데."
"응. 나도 너 자주 볼 수 있다는 거 그거 하나만 좋다."
그렇게 말하며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다 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 작품 후기 ============================
면목이 없습니다 ;;;;
많이 늦었네요;;;;
원래 이맘 때가 저는 제일 바쁘거든요.
하아, 그래서 어떻게든 2월 안에 끝내고 싶었는데 그것도 실패하고...
엉엉ㅠㅜ 이게 뭐야 ㅠㅜ 엉엉 ㅠㅜ
새해 첫 계획을 실패하다니!!
제가, 정말로 바쁩니다-.
-;;;
리리플은 앞으로 달아드리지 못할 것 같네요 ㅠㅜ
죄송해요.
그래도 달아주신 댓글은 빼놓지 않고 읽을게요^^
쉬는 시간 틈틈이 끄적이는 걸 타이핑만 해서 올려야 할 것 같아요.
한 번에 여러 편은 올리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적어도 이틀에 한 편씩은 올릴게요^^
선추코해주시는 모든 분들, 복 받으세요^^
추신 1.
루이시나s님 ㅎㅎㅎ 기억하고 있답니다 ㅎㅎㅎㅎ
추신 2.
쪽지로도 댓글로도 물어보시는 분들이 많은데 ㅎㅎㅎ 제 친구 이름 유나 맞습니다. ㅎㅎㅎ 그 이름 따서 이 소설 여주 이름도 유나지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