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77 회: # 10-10 그 남자 -- >
뮤는 자기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나른한 얼굴로 늘어져 잠든 여자를 바라보았다. 잠긴 두 눈덩이 위로 작게 입을 맞추자 잠결에서도 미소 짓는 여자의 얼굴에 어느새 뮤의 입가에도 희미하지만 작은 미소가 스쳐지나간다.
그녀는 뮤의 가슴을 이상하게 만드는 묘한 재능을 지녔다. 뭉클하게도 만들고 낯간지럽게도 만들고. 하지만 그런 낯선 것들이 마냥 싫지만은 않아 뮤는 참 곤란했다.
이런 건 없는 편이 더 살기 편한데.
하지만 이미 생겨버린 건 어쩔 수 없는 법이다. 이제와 떼어내자니 그 생각만으로 불쾌해지는 것을. 그러니 이제는 감히 그 어떤 것도 단언하지 못한다. 얼마든지 놓아줄 수 있노라는 그 생각조차 이미 오만이리라.
하얗고 가는 목덜미가 아직까지도 앳된 기운이 많이 남아있는 얼굴과는 다르게 무척이나 색정적으로 보였다. 그래서 그랬을까? 저 목덜미에 그렇게도 많은 흔적을 새기는 이유가. 손바닥으로 작은 어깨를 쓸어보고 팔을 쓸어본다. 다시 올라와 볼을 쓸어보고 목덜미를 쓸어보고 가슴을 쓸어본다. 말랑말랑한 가슴의 문턱을 주무르고 있자니 그 살결이 주었던 기분 좋은 감각이 떠올라 다시금 아랫도리가 묵직해져 왔다.
"하아."
가끔은 그 묵직함이 도를 넘어 뮤조차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다. 그럴 때는 어찌할 수가 없다. 다른 방법이 없다. 잠든 그녀를 깨워 칭얼거리는 입술을 애써 다독거리며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들어가 보는 수밖에. 그의 것이 단단하고 무거울수록 받아내는 유나가 벅차하는 걸 알기에 최대한 부드럽게 하고 싶으나 맘껏 날뛰고 싶은 짐승 같은 본능은 꽤나 사나운 것이어서 모든 것을 풀어내고 또 풀어내야만 그제야 잠잠히 가라앉는다.
방금 전, 유나가 잠들기 전에도 그러했듯이.
어둡기만 했던 세상에 어스름한 기운이 감돌 시각.
"벌써 새벽이군."
뮤는 마냥 주물러대고 싶은 여체에 애써 손을 떼어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뮤의 허리에 걸쳐있던 그녀의 손이 툭하니 떨어져 내린다.
"……."
아아, 또 상처군. 또 다쳤어. 나흘 뒤로 다가온 레이니 롱아르의 결혼식 선물로 뭘 만든다고 그랬더라?
새처럼 종알거려대며 그의 앞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던 그녀의 입술을 막은 적도 여러 번. 듣기 싫어서가 아니라 재잘거리는 입술이 너무 탐이 났기 때문에.
"결국은 끝까지 못 들었단 말인데."
하지만 꽃 어쩌고저쩌고 했으니 그와 관련된 일이겠지 싶다. 뮤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유나의 손끝에 잡힌 물집을 치료해주었다.
"힐링."
환한 빛이 유나의 손끝에 맺히더니 스며들 듯 사그라졌다. 그리고 빛이 사그라짐과 동시에 유나의 손끝은 처음부터 상처가 없었던 것처럼 깨끗해졌다. 그제야 거슬리는 것이 없어진 뮤는 간단히 준비를 마치고 집무실로 향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주군."
그런데 아무도 없으리라 여겼던 곳에 젠이 있었다. 젠을 본 뮤의 눈썹이 순간 의아함으로 치솟아 올랐다.
"아아, 그래. 그런데 대체 언제 온 거지?"
"좀 되었습니다."
"……부지런도 해. 하지만 난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나와서 일하라 한 적 없다."
뮤의 대답에 새벽부터 출근한 젠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새벽에 연락을 받고 온 겁니다."
"무슨 연락?"
뮤는 중요한 일이 아니면 그의 휴식을 방해치 말라는 명령 아닌 명령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사람들은 중요한 일의 기준이 대체 무언지에 대해 궁금해 했지만 사키만이 낄낄 웃어대며 이렇게 말했다.
"그냥 방해하지 말라는 거야."
그 껄렁껄렁한 말에 호세가 인상을 찌푸렸으나 그 말에 딱히 다른 반박은 하지 못했더랬다.
젠이 '이 소식'을 전해들은 건 새벽 녘. 지금보다 훨씬 더 전의 일이다. 하지만 이 소식을 비슷한 시간에 같이 전해 듣던 사키는 젠에게 단언했다. 아주 진지하게.
"이건 주군께 절대로, 절대로 중요한 일이 아니야. 그러니 주군에게 알린답시고 방해하지 마."
"하지만 황태자 전하의 압박도 점점 심해지고 있는데."
"어허! 내 말을 믿어. 황태자 전하가 아무리 압박을 하든 그래도 그것이 주군의 시간을 방해할 만큼 중요한 일은 결단코 아니니까. 기다렸다가 주군이 집무실로 오시면 그때 전해도 늦지 않아. 내 맹세하지."
사키가 어찌나 자신만만하게 말하던지 젠은 바로 알려야 하나 고민했던 마음을 접어야 했다.
그리고 지금, 그 소식을 주군께 전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스잔나 노르젠이 정신을 차렸다고 합니다."
"……그래?"
소식을 전해 듣는 뮤에게는 그렇다할 반응이 없었다. 그 반응에 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 틀린 선택을 한 것 같지는 않다.
"황태자 전하께서 하루라도 빨리 스잔나 노르젠의 목숨을 끊어놓길 원하고 계십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 집안의 씨를 아예 말려버리길 바라는 눈치니."
"스잔나 노르젠이 정신을 차렸다는 소식이 황궁에까지 들어가면 당장 오늘이라도 공작성에 찾아오실 겁니다."
"아마도. 그래서 상태는 어떻다고 하나?"
"지금은 다시 수면상태입니다만, 분명 눈을 뜨기는 했다고 합니다. 맥박이 무척이나 불안한 것으로 보아 얼마 남지 않은 상태인 것 같습니다."
"아아. 그리 죽는 게 더 나을 거야, 그 여자는."
"……."
"문제는 유난데……."
"네?"
"깨어나면 만나게 해주마 약조해 줬거든."
"그러셨습니까?"
"걸리적거리는 군. 그대로 죽어버릴 것이지 왜 깨서는."
만나게 하기 싫다. 그깟 계집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의 품에서 유나를 빼내갔다는 그 불쾌감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있기 때문에. 감히 그런 겁도 없는 짓을 했지. 단언컨대 상태가 위독했던 것이 오히려 그녀에게는 행운이었으리라. 그렇지 않았더라면 지금처럼 편히 누워있을 수 없었을 테니.
불쾌한 뮤의 심정을 읽었는지 젠이 입을 열었다.
"아가씨 모르게 일을 처리하면 되지 않습니까?"
"이미 대가를 받았어."
"무엇을……?"
젠이 의아한 듯 물었지만 뮤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쨌든 죽었다 하더라도 마지막으로 얼굴이라도 보게 해달라는 군."
"연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나도 몰라."
"네?"
"유나가 그러더군. 스잔나 노르젠과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고."
그렇게 말하던 유나의 얼굴은 제법 단단한 것이어서 뮤는 사실 그 얼굴이 맘에 들었다. 야무지게 다문 입술이, 단호하게 뿜어내는 눈빛이, 꽉 다문 이 사이로 드러낸 단단한 결심이, 적당히 솟은 광대에 엿보인 고집이, 모든 것이, 뮤의 맘에 들었다.
"어느새 조금 큰 모양이야."
"네?"
"전보다 당차졌어."
좋아해요.
그녀의 입술 사이로 삐져나왔던 황홀하리만큼 짜릿했던 단어가 떠오르자 심장에서부터 짙은 만족감이 벅차도록 솟아오른다.
"어려운 일도 아니고, 약속은 약속이니 만나게는 해줘야겠지."
"알겠습니다."
뮤의 결정에 젠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해보였다.
"그리고 캐드락 말입니다, 주군."
"흐음."
"이번 전지훈련에 참가신청을 한 모양입니다."
"전지훈련에? 반성실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텐데."
캐드락은 유나를 토킨 가(家)로 호위했던 기사다. 그는 유나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자신의 실력부족으로 인한 자괴감에 스스로 반성실에 들어가기를 자처했다.
반성실. 반성실이라는 단순한 이름이 붙었으나 여기서의 반성은 실력이 부족한 것에 대한 반성으로 반성실에 들어간다는 것은 죽고 싶다 여겨질 만큼 혹독한 수련을 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불어 전지훈련 역시 부족한 실력을 향상시킨다는 명목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한 번 다녀오면 그 효과는 입증되나 그만큼 혹독한 훈련에 다들 기피하다시피 하는 것이었다.
그걸 연달아 두 번 행하겠다? 어지간히도 마음이 무거웠나보군.
"뭐, 그 이유야 어쨌든 실력을 향상시키겠다는 거니 나쁘지는 않겠지. 보내줘."
"네, 주군."
그 말을 끝으로 뮤는 젠을 내보냈다.
"하아."
의자 깊숙이 앉아 몸을 묻자 절로 나른한 숨이 흘러나온다. 방금 전까지의 향락을 기억하고 있다는 듯 몸 이곳저곳에서 느껴져 오는 뻐근함이 나쁘지 않다. 유나가 더 견뎌주었더라면 아마 지금까지도 침대에 있었을 거라 생각하며 뮤는 피식 웃었다.
"짐승이란 소릴 들어도 할 말이 없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