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는 아름답다-170화 (170/206)

< -- 170 회: # 10 -- >

"아가씨."

그 목소리는 익숙한 것이었다.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정도로. 그래서 뒤돌아보지 않았다. 계단을 오르던 발걸음도 멈추지 않았다. 지금 내게 중요한 건 라니니 루이 토킨이 아니었으니까.

"아가씨!"

"라니 먼저 만나고요."

"드릴 말씀이-."

"걱정 말아요."

루이 토킨 경의 말을 싹둑 끊어내듯 나는 소리쳤다. 그가 무얼 걱정하고 있는지 안다. 그리고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도. 아아, 저 남자도 많이 힘들었겠지. 내가 행방불명되어 있었던 그 시간동안 라니만큼이나 저 남자도 맘고생이 심했을 거다. 괜히 고생한 그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라니가 우선이었다. 라니의 마음의 짐을 덜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라니가 보고 싶기도 했다. 만나고 싶다. 나는 라니가 그리웠다.

"하악. 하악."

얼마나 달렸다고 이리도 숨이 차는 건지. 후들후들 힘이 부쳐 조금씩 느려지는 발을 느끼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온 힘을 다해 걷고 달리고 또 걷고 뛰었다. 이 집이 기절할 만큼 크다는 사실을 이렇게 원망스러워할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대체 이 복도의 끝은 어디인 걸까.

"헉, 헉."

갑작스런 뜀박질에 놀란 심장이 수위 높게 쿵쾅거려대는 것을 넘어서 이젠 발마저도 넘어질 듯 말 듯 흔들거려대기 시작했다. 당장 주저앉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흔들거리는 다리를 독하게 부여잡고 나는 드디어 내 방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열었다.

"아."

형편없이 야윈 얼굴, 퉁퉁 부어있는 눈, 익숙하지 않은 운동에 숨 벅차하는 나보다 더 크게 흔들리는 작은 어깨.

"라니……."

"유나……. 유나, 유나, 유나!"

이럴 줄 알았다. 이렇게 망가져 있을 줄 알았다. 바보같이. 왜 이렇게까지 망가져 있는 거니? 응? 라니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이는 감정은 못마땅함과 언짢음. 그리고 그와 동시에 느껴지는 안쓰러움이 해일처럼 밀려와 내 속을 마구 엉켜 놓았다.

"유나, 유나, 유나! 어엉~."

순식간에 내게로 다가와 나를 껴안고 실신하다 시피 울어대는 라니의 목소리에 어느새 내 목소리도 잠기고 말았다.

왜 너는 항상 우는 걸까? 왜 너는 항상 울어야 하는 걸까? 왜 너는 항상 네 탓도 아닌 일로 인해 이렇게 아파야 하는 걸까?

불쌍한 아이…….

"!"

그때 나도 모르게 떠오른 단어에 속에서 날카로운 가시 하나가 툭 튀어나왔다. 그 가시가 향하는 것은 라니가 아니라 이 아이를 아프게 한 모든 것들을 향해서다. 그리고 더불어 나……를 향해서다.

……라니야. 어쩌면, 어쩌면 나는 네가 나보다 더 불행했기에, 네가 나보다 더 아파했기에 내 삶을 참아낼 수 있었던 걸지도 몰라. 너의 상처를 보며, 나의 상처가 너보다 얕음을 위안 삼으며 살았을 지도 몰라.

이기적인 깨달음.

타인이 알면 그 누구라도 불쾌해 할 이기적인 깨달음에 속이 비려왔다. 순간 과연 내게 너의 울음을 달래줄 자격이 있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너와 나는 가깝게 지내지 않는 편이 더 좋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라니야, 그만 울어."

"어엉~."

"바보야, 네가 왜 우는데? 응? 왜 네가 우는 건데?"

하지만 넌 내 가족인 걸.

피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너는 내 가족이다. 내가 영혼으로 인정한 내 가족. 그러니까 이제 와서 너와 멀어지겠다는 그런 생각은 하지 않을 거다. 내 더러운 이기심을 이제야 깨달았다 해도, 네 불행을 발판삼아 내가 견디어 냈다는 그 지독한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해도, 그런 내 자신이 너무나도 혐오스럽다 해도.

"제발 그만 울어. 내가 말했지? 제발 배롤린이란 이름에서 벗어나라고."

나는 네 곁에서 너를 위로해 줄 거다. 네가 내게 힘을 주었듯이 네가 이제는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내가 잡아끌어줄 거다.

손을 들어 온몸으로 우는 라니의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덜덜 떨며 울먹거리는 상처로 가득한 이 아이의 등을.

"어엉~. 하지만, 하지만!"

"쉬! 됐어. 네가 무슨 말 하려는 지도 알 것 같고, 네가 왜 이렇게 우는 지도 충분히 알 것 같으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마. 내가 분명히 말하는데."

목소리에 힘을 싣는다. 라니에게 확실히 전달될 수 있도록. 그리고 더는 이 아이가 이 문제로 아파하지 않도록.

"배롤린 남작이 한 일로 제발 네가 상처받지 마."

"흑흑."

나는 서있을 힘도 없다는 듯 자꾸만 무너져 내리는 라니의 몸을 부축해 소파로 데려와 앉혔다. 그 뒤로도 한참을 더 울먹이는 라니의 등을 나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쓰다듬고 또 쓰다듬어 주었다.

조금씩 잦아지는 울음. 낮아지는 숨소리.

스르륵. 어느새 지쳐 쓰러져 잠든 라니의 얼굴을 보며 나는 아픈 침을 삼켜냈다.

라니 너, 내가 없던 내내 이렇게 울다 쓰러졌겠구나. 이렇게 불안에 떠는 얼굴로 너는 지냈구나.

보지 않았어도 선명히 보이는 것 같은 라니의 모습에 가슴이 아파왔다.

바보같이. 나는 잘 지냈단 말야. 쿤도 만나고 외할아버지랑 외할머니도 만나고, 나는 정말로 잘 지냈다고.

나는 네가 아프지 않길 바라, 라니. 나는 진심으로 네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우리에겐 대화가 더 필요할 지도 모르겠다. 서로를 더 확실히 이해할 수 있도록. 이미 충분한 대화를 나누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래, 대화를 나누자. 그리고 아픈 일들은 이제 모두 마무리를 짓자.

물끄러미 라니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다 나는 조용히 일어나 문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문밖에는 새론이 서있었다.

"뮤가 날 찾나요?"

"네."

"……지금은 좀 봐달라고 해줘요. 아직 해도 쨍쨍하잖아요."

"제가요? 아휴~, 그런 말씀은 마세요. 그런 말씀은 아가씨께서 직접 전하셔야지요. 제가 그런 말을 전했다가는 전 그 자리에서 죽어요."

"……설마요."

요즘 들어 느끼는 거지만 새론은 엄살이 심하다. 과장도 심하고.

하지만 새론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설마가 아니랍니다. 아참, 그리고 루이도 토킨 부인을 찾고 있어요."

"토킨 경한테도 지금은 좀 봐달라고 해주세요."

"루이한테는 얼마든지 그 말을 전해드리지요. 하지만 주군께는 제발 아가씨께서 직접 말씀해주세요."

"정말 계속 그렇게 엄살 피울 거예요?"

새론의 똑 부러진 거절에 내가 새침하게 그녀를 노려보았지만 새론은 그저 생글생글 웃으며 끝까지 제 의견을 고집했다.

휴~. 내가 이미 다 봤는데, 숨겨도 소용없는데 왜 저렇게 고집을 피우는 건지 모르겠다. 뮤한테 또박또박 하고 싶은 말 다 하든만. 그렇게 똑 부러지게 일 잘하는 거 다 아는데 왜 꼭 내가 필요로 할 때엔 모르쇠로 나오는 건지. 그런 모습이 얄밉기도 했지만 그래도 정말로 미워할 수는 없다. 왜냐면 그래도 이 저택에서 내 말을 제일 잘 들어주는 사람은 역시 새론이었으니까.

그래서 생글거리는 새론의 얼굴을 마주보며 나도 싱긋 웃음을 보여주었다. 새론이 이렇게 나온다면, 나도 내 방식대로 나가야지. 그렇게 발뺌해도 당신이 유능한 여자라는 거, 난 너무나도 잘 안다.

"잘 부탁할게요, 새론."

"……아가씨?"

"전 새론이 잘 전해줄 거라고 믿고 있어요. 둘 다에게."

"그러지 마세요."

"그럼 전 이만 들어가 볼게요."

"아가씨, 이건 반칙이에요!"

"나중에 새론도 반칙 한번하세요."

"아가씨!"

애처롭게 날 부르는 새론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나는 재빨리 방으로 들어가 문들 걸어 잠갔다. 물론 새론이 내 행동을 막고자했다면 충분히 막을 수도 있었을 거다. 재빠른 행동은 나와 거리가 먼 것이니. 어쨌든 새론은 나를 막지 않았고 덕분에 내 시도는 성공했다. 나는 뿌듯한 마음으로 문을 두어 번 콩콩 거려주며 새론에게 감사를 표한 뒤 다시 소파로 돌아와 앉았다.

"흐음. 라니를 나 혼자 침대로 옮길 수도 없고 어떡한담. 이럴 줄 알았으면 라니를 침대로 옮기는 거 도와달라고 한 뒤에 새론을 쫓을 걸."

흐음, 흐음. 아무리 고심해보아도 내 힘으로 라니를 옮기는 건 무리. 결국 포기다. 어깨를 으쓱거리는 걸로 심정을 표현한 뒤 나는 침대로 가 이부자락을 끌어와 라니의 몸 위를 덮어주었다.

"일단은 푹 자. 네가 깨고 나면 우리 차근차근 얘기하자, 라니야."

그리고 맞은편 소파에 앉아 눈을 감았다.

피곤하지 않다. 잠도 오지 않고. 하긴, 침대에서 벗어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잠이 오겠는가.

그래서 오랜만에 마나 운용을 해볼 참이다. 실제로 이뤄낸 성과에 비하면 참으로 지극정성이건만 서글프게도 아무도 그 사실을 몰라주는 마나 운용을.

숨을 조용히 내쉬고 들이마시며 호흡부터 정리해본다. 그리고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다 여겨지자 마나를 조금씩 움직여보기 시작했다.

"후, 후."

오랜 시간 집중해서야 겨우 한 가닥의 기척을 잡을 수 있었다.

"후, 후."

아아, 아주 간단한 마법이라도 좋으니, 제발 한 가지 마법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작은 소망을 가슴에 품으며 나는 호흡에 집중했다.

============================ 작품 후기 ============================

이번 챕터로 라니와 스잔나 영애와의 일 마무리.

그리고 다음 챕터..... 가 마지막 챕터가 될 듯 합니다....

아~ 이제 정말 끝나가네요.

선등록 후수정입니다~

선추코해주신 분들, 복받으실 거예요^^

* 불타는에이스님ㅎㅎㅎㅎㅎ 신기하네요~ 사실 저도 요즘 글을 쓰려고 책상앞에 앉으면 이상하게도 오랜만에 앉는 느낌?

ㅎㅎㅎ이 들곤 한답니다 ㅎㅎㅎ

* 검은라벤더님 ㅎㅎㅎ안녕히가세요~^^

* 사랑솜님;;;;;;;;;ㅠㅜ 아~ 네, 스잔나는 어떻게 구제해줄 방법이 없었네요..... 이럴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어쩌면 이런 캐릭터는 애초에 버리는 캐릭터 같아서 마음이 좀 무겁기도 해요 ㅠㅜ유나에게도 훗훗훗훗훗훗~ 일단 웃음만 남겨봅니다~ ㅎㅎㅎ 그리고 절륜한 뮤... 맞습니다. 너무 야한 표현은 뮤한테 어울리지 않아서 절제하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그래도 뮤가 절륜하다는 사실은 변함없죠. 암 그럼요, 그렇고 말고요 ㅎㅎㅎ

* M.

K님 ㅎㅎㅎㅎㅎ유명한 말이 있지요! 다트는 이미 던져졌다!! ㅎㅎㅎㅎ;;;

* 카프린님 ㅎㅎㅎ감사합니다~~^^

* 루이영원님ㅎㅎㅎ오타지적 사랑합니당~ ㅎㅎㅎ 맞아요~ 유나가 간다고 지금까지 정신을 잃었던 영애가 갑자기 눈을 뜨진 않죠 ㅎㅎ

* 천지패황님 ???????????????????

누구 말씀이신가요???

* momorica님 ㅎㅎㅎㅎㅎ쉬이 변하면 뮤가 아니지요 ;;ㅎㅎㅎ 이 남자는 어지간하면 자기 마음도 끝가지 감출 놈이랍니다 ㅎㅎㅎㅎ 나중에 후회 좀 하라고 하죠 뭐. ㅎㅎㅎㅎ 아, 그 호위기사에 관한 처분은 뒤에 언급될 거랍니다 ㅎㅎ

* 에스카리고님ㅎㅎㅎㅎㅎㅎ아직은 쉿! 이랍니다^^

* 은으1레드님 ㅎㅎㅎㅎㅎㅎㅎ 길었을 텐데~ 정주행 하시느라 고생하셨답니다 ㅎㅎㅎ

* sellyek님ㅎㅎㅎㅎㅎ출간이요? 아니요~! ㅎㅎㅎ 전 제 실력을 안답니다 ㅎㅎㅎ 또다른 아이디를 알려드리는 건 문제가 아니지만 글이 습작화 되어 있어서 어차피 볼 수가 없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