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69 회: # 10 -- >
게다가 그는 이미 뮤가 허락 했노라는 내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진즉에 눈치 챈 것 같아 보였다. 애초에 날 믿지 않았던지. 혹 그것도 아니면 나를 들여보내지 말라는 명이 먼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하아."
무작정 뛰어 들어가면 들어가는데 성공할 수 있을까?
정답은 바로 나왔다. 절대 불가능하다고.
불만을 가득 담아 기사의 얼굴을 슬쩍 째려보았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조금 난처하게 굳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의 태도는 단호한 것이었다. 새론이 스잔나 영애의 소식을 몰래 알려준 것은 분명 만나보라는 뜻이었을 텐데. 물론 이건 내 자의가 듬뿍 들어간 해석일 뿐이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계획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과연 뮤가 허락해 줄까?
왠지 허락해 주지 않을 것 같은데. 하지만 아직 물어보기 전이지 않은가. 뮤가 허락해주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팍팍 오지만 실제로 그런 답을 들은 건 아니니까. 일단 먼저 허락을 구해보자. 그래서 그 허가증인지 뭔지를 받아내자. 그래야 스잔나 영애를 제대로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지금 당장 가서 물어보자.
나는 뮤에게 가기 위해서 본성 쪽으로 몸을 틀었다.
"아가씨."
휘잉~. 바람에 꽃향기가 실려 있다. 시간이 언제 이렇게 흘렀는지 바람이 제법 시원하다 못해 조금 쌀쌀하다. 라니의 결혼식 준비를 할 적만 하더라도 그늘이 아닌 곳에서 5분만 서있어도 현기증으로 쓰러져 버릴 것 같았는데. 그랬던 미친 더위가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오히려 바람 속에 섞인 은근한 찬 기운에 오소소 닭살이 일 지경이니까.
참으로 간사한 몸이지 않은가.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차라리 겨울이 낫겠다 싶었던 나는 이제 곧 맞이하게 될 한파에 그래도 여름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얼마나 극심한 변덕쟁이란 말인가.
"아가씨."
"아, 새론?"
새론이었다.
신기하단 말이지. 어떻게 새론은 내가 있는 곳을 이렇게도 잘 아는 걸까? 새론이 위치추적 마법을 쓸 줄 모른다는 사실에 비추어 추리해보자면 내 행동패턴이 단순하다는 결론 밖에 나지 않는데.
흠, 내가 단순하다는 거군.
"서(西)성에 다녀오시는 길이세요?"
"……뮤의 허락 없이는 출입할 수 없단 사실은 미리 알려줬어야지요."
"후후. 죄송해요."
사실 새론의 잘못이 아니다. 서(西)성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무작정 찾아간 내가 잘못한 거지. 미리 알아보고 갔어야 했는데. 이곳 공작성에 몇 달 머물렀다고 그것만으로 공작성에 대한 모든 걸 알게 된 것은 아닌데 말이다. 심지어 일개 귀족의 저택에 감옥의 역할을 하는 곳이 따로 있다는 사실조차도 나는 방금 전에야 알지 않았나.
배롤린 남작의 집에는 그런 것 따윈 없었다. 아니, 사실은 있었는데 내가 몰랐을 수도 이다. 하지만 만약 배롤린의 저택에도 감옥이 있었다면 그곳은 죄인이 아닌 그 저택의 주인인 배롤린이 들어가야 가장 어울리는 장소였으리라.
"그런데 절 찾으신 거예요?"
"네. 아가씨께 손님이 찾아오셨거든요."
"손님이요?"
"예."
그 순간 문득 라니나 레니를 떠올렸지만 만약 그 둘 중 하나가 찾아온 거라면 새론이 손님이라 하지 않았을 터. 그렇다면 혹시-.
"네랜……백작 가(家)에서, 그러니까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오신건가요?"
혹여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물었지만 아쉽게도 새론은 고개를 저었다.
하긴, 아직 오시기엔 이르겠지. 당분간 영지를 비워도 될 만한 준비를 마치신 뒤에 오시겠다고 하셨으니까.
"그럼 누군데요?"
딱히 생각나는 사람이 없어서 나는 새론의 얼굴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새론은 그런 내 얼굴을 바라보며 그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물론 웃는 것이 찡그리는 것보다야 좋다지만 지금의 새론의 웃음은 그 의미를 쉬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려대야 했다.
"새론?"
나는 새론이 내 스스로 무언가를 알아차리길 바란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랬다. 새론은 그 손님이란 사람이 누군지 내가 알아차리길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추리에 약하다.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혹여나 다른 힌트가 있나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
하지만 아무 것도 없다. 그 흔한 마차도. 하긴, 애초에 손님용 마차가 서(西)성 근처인 여기까지 들어올 리 없겠지만.
"그냥 알려주면 안돼요? 전 이런 거 자신 없는데."
"후후."
"좋아요. 어디에 계시나요? 그 손님이라는 분."
알려주려 했다면 진작 알려줬겠지. 나는 새론이 그 손님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쉬이 알려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 채고 다른 것을 묻기로 했다. 누군지 몰라도 어차피 만나보면 알겠지 하는 계산도 없지 않았다. 물론 그 속에는 새론에 대한 믿음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게 해를 끼칠 사람이라면 새론이 처음부터 손님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았을 테니까.
"아가씨 방에 계십니다."
"제 방에요?"
어떻게 된 거지? 응당 응접실에 있을 거라는 대답을 예상했던 나는 새론의 말에 순간 정신이 멍해져 버렸다.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건가?
"제 방에 있다고요?"
"네. 제가 아가씨 방으로 모셨어요."
"……손님이라고 했죠?"
"네."
"……왜 라니를 라니라 하지 않고 손님이라고 해요?"
나는 지금까지 내가 추리에 약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부터 그 생각을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다.
라니었다. 새론이 손님이라 표현한 사람은. 내가 공작성으로 돌아오고 난 후 라니가 매일같이 계속 찾아왔다는 사실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일. 그러니 지금 또 찾아왔다 해도 그건 놀랄 일은 아니다. 하지만 새론이 라니를 라니라 부르지 않고 손님이라 칭했다는 것에 대해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 새론은 라니를 라니 영애라 불렀다. 라니가 결혼한 후에도 토킨 부인이라 부르지 않고 라니 부인이라 부를 정도로 라니에 대한 호감을 드러냈었다.
그런데 지금은 손님이라니? 라니에게.
갑자기 왜 호칭을 바꾼 걸까? 마치 거리를 두려는 사람처럼, 아무런 관계없는 타인을 부르는 듯이, 왜?
"손님이 아니라 라니가 온 거잖아요. 그런데 왜 손님이라고 그래요? 전에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잖아요."
내가 라니를 원망하고 있다 그리 여기고 있는 걸가? 그래서 그런 걸까?
만약 그것 때문이라면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나는 라니를 단 한순간도 원망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내겐 라니를 용서하고 말고 할 그 무엇도 없었다.
내 어색한 미소에 새론이 고개를 주억거려댔다. 그 모습이 어쩐지 기분 좋아보였다. 나는 새론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조금이라도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가씨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제 허락이요? 무엇에 대한 제 허락이요?"
"전처럼 그리 불러도 되는지에 대한 허락 말예요."
"그게 무슨……."
"아가씨께서 그리 반응하시는 걸 보니 애초에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었나 보네요. 제 기우였나 봐요. 좋아요, 아주 좋아요. 아가씨는 제 생각보다 더 강한분이셨어요."
"네?"
대체 새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모르겠다.
"자자, 어서 움직이세요. 라니 부인께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상태여서 제가 아가씨 방으로 모신 거랍니다. 얼굴이 많이 상하셨어요. 얼마나 우셨는지 눈도 장난 아니게 부어있고요."
그 말에 나는 일단 내 방으로 뛰기로 했다. 새론의 말뜻이 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것은 나중에 물어보리라. 지금 당장은 라니를 보는 것이 훨씬 더 급하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바보같이. 네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리 힘들어 해? 바보처럼 네가 왜 배롤린 남작이 저지른 모든 죄악에 대해 상처받고 아파하는 건데? 하지만 이번 일에 대해선, 라니가 이렇게까지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것에 대해선 어느 정도 내 책임도 있을 거다. 그날, 스잔나 영애로부터 부모님의 사고에 대한 전말을 들었을 때, 그때 라니는 울면서 내게 말했다. 사정했다.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속이려 했던 것이 아니었다고.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울면서 내게 사정하고 또 사정했었다.
그때 괜찮다고 얘기했어야 했는데……. 그때 분명히 말해줬어야 했었다. 네 잘못이 아니라고. 네 잘못은 하나도 없다고.
그러니까 내가 잘못한 거다. 내가 잘못한 것이 맞다. 라니에게 아무 잘못이 없다는 건 세상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이지 않은가. 다른 누군가가 배롤린 남작의 악행으로 라니에게 돌을 던진다면 그에 맞서 화를 내고 분통을 터트려줄 사람은 다름 아닌 나라고 분명 그리 여기며 다짐하지 않았나.
그러니까 나는 괜찮다고 네게 말해줬어야 했다. 나는 괜찮다고, 그러니까 네가 내가 사과할 필요는 없는 거라고, 네가 그렇게 아프게 울지 않아도 되는 일이라고 나는 분명히 말해줬어야 했다.
'하지만 라니야. 난 몰랐는걸. 내가 그렇게 다른 곳으로 이동되어 버릴 줄은 정말 상상하지도 못했어.'
상처를 조금도 받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 배롤린 남작 때문에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말에 울컥하지 않았다면 그것도 거짓말. 배롤린 남작을 당장이라도 죽여 버리고 싶을 만치 화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것도 역시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전에 나는, 나는 그저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을 뿐이다. 하얗게 텅 빈 것처럼 나는 그저 멍해져 버렸던 거다. 콩닥콩닥 뛰어대는 가슴이, 심장이, 아픔이 내 것인지조차도 구분할 수가 없을 만큼 나는 혼란스러웠었다.
"아가씨."
막 계단을 오르려던 참이었다. 누군가 날 부른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