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67 회: # 10 -- >
"그냥 나오는 눈물이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보다 이상해요."
"뭐가?"
"공작성으로 돌아 온지 벌써 삼일 짼데, 레니고 라니고 아무도 와 보질 않잖아요. 의리 없게. 내가 그렇게 행방불명되었다가 겨우 돌아왔는데 어떻게 아직까지 코빼기 하나 비추지 않을 수 있지? 나쁜 것들."
그랬다. 3일 전, 쿤과 네랜 백작 가(家)에서 만났던 그날 저녁, 뮤와 나는 공작성으로 돌아왔다.
"벌써 돌아가겠다고?"
할머니는 많이 서운해 하셨다. 생각보다 훨씬 이른 귀가 결정에 당황해 하시기도 수차례. 어차피 텔레포트 마법으로 단숨에 돌아갈 수 있으니 레니의 결혼식 전까지만 이라도 머물러달라는 간청을 무시하고 끝까지 귀가를 단행한 건 뮤였다. 사실 나도 며칠 더 머무르고 싶었기 때문에 뮤의 단호한 결정에 당황한 건 할머니와 다름없었지만 뮤의 뜻은 너무나도 단호했다. 내가 아닌 뮤가 더 이상 시간을 내기 어렵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억울하겠군."
"누가요?"
"너한테 욕먹은 그 두 사람."
"왜요?"
"네가 돌아온 바로 그날부터 널 찾아왔었는데 만나고자 했던 너는 못 만나고 욕이나 먹고 있으니 억울할 만도 하지."
"뭐라고요? 아니, 그런데 왜 나는 그 사실을 몰랐죠? 난 레니도 라니도 못 만났는데."
"못 만났을 수밖에."
"어째서요?"
"내가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우리가 삼일 동안 여기서 뭘 했다고 생각하지?"
"……어이없네요."
그래. 정말로 어이없다. 더 이상 시간을 내기 어렵다는 이유가 이런 식의 이유였다니. 생각할수록 창피하고 부끄럽네. 이 사실을 할머니가 아신다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생각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나 그만 나갈 거예요."
휙! 몸에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찼다.
그런데 이불이 참 크기도 하지. 게다가 길기까지 하고. 하긴 이렇게 넓은 침대를 두르려면 이 정도 크기여야 하는 건 맞겠지만 그래도 너무 하지 않은가. 몇 번을 걷어차도 벗어날 수 없는 이불의 수렁에 짜증이 일었지만 참 열심히도 차댄 덕분에 결국은 내 몸에서 떨궈낼 수 있었다. 그리고 침대 옆 테이블에 올려놓았던 단검도 잊지 않고 챙겼다.
"제대로 잡을 줄도 모르면서 꼬박꼬박 잘도 챙기는 군."
순간 이 단검을 침실 안까지 들고 오던 나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던 뮤의 얼굴이 떠올랐다.
"할머니가 준거니까요. 라이니 공국에서는 이런 단검을 은장도라고 부른대요. 검집을 은으로 만들어서 은장도라고 부르는 건가? 어쨌든 라이니 공국 여인들인 모두 은장도를 하나씩 몸에 지니고 다닌대요.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어차피 넌 앞으로 혼자 다닐 일도 없을 텐데. 그래도 필요할까?"
"그냥 상징적인 거니까요. 엄마도 라이니 공국에 있었을 때 지니고 다녔다고 할머니가 말해 주셨어요. 그 말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저도 하나정도는 지니고 다녀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게다가 이건 엄마가 어렸을 때 지녔던 은장도라고 할머니가 그랬단 말예요."
꽃의 영지로 유명한 네랜답게 검집엔 매우 화려한 꽃들이 그려져 있었다. 다소 어린 소녀들이 지니고 다녔을 법한 소녀 틱한 모양이었지만 엄마의 물건이었다는 이유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맘에 들었다.
재빨리 가운을 걸치고 나가려는 등 뒤로 뮤가 또다시 물어온다.
"어딜 가는데?"
"새론을 만나려고요."
"왜?"
"앞으로는 좀 편한 인생을 살고 싶어서요. 제 손님의 방문 정도는 제가 결정하고 싶다고요."
"흠. 편한 인생이라. 그러기 위해서 잡아야 할 상대를 잘못 고른 거 아닌가?"
"제가 당신을 설득할 자신이 없어서요."
"새론이 내 말을 거역하게 만들 자신은 있고?"
"아니요."
"그럼?"
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후우~, 후우~.
유나, 여기선 절대로 진실을 말해선 안 돼. 절대로, 절대로 안 돼. 절대 저 남자가 조금 재수 없게 느껴졌다는 둥의 그런 솔직한 이야기는 하지 마. 큰일 날지도 모르니까.
솔직하게 사실을 말하고 싶어 근질거리는 입술을 애써 달래며 나는 두근대는 가슴을 달랬다. 때로는, 아니 사실 종종 진실은 숨기는 편이 더 유리한 법이다.
처음 만난 엄마의 가족들과 제대로 된 시간도 보내지 못하고 이곳으로 온 이유가 그의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서라니. 게다가 다시 공작성으로 돌아온 그 날부터 지금까지 장장 삼일 동안 내가 한 일이라곤 이 방 침대에서 이 남자와 굴러댔던 것이 전부다. 그 덕분에 온 몸이 쑤시고 아프다. 특히 어느 특정 부분은 너무너무 민감해져서 부드러운 이불 천에 스치기만 해도 따가울 정도고.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에 딱히 불만을 가지고 있진 않았던 것 같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지금은 짜증나 죽겠지만.
왜 내 손님들을 멋대로 처리하는 건대? 응? 이런 식으로 남에게 휘둘리는 건 끔찍한 땡볕아래 모자하나 없이 벌서듯 서있는 것보다 더 불쾌한 일이다. 그 사실을 저 남자는 알까?
아니, 모를 거야, 당신은. 지금까지 그런 일을 겪어본 적이 없을 테니까. 이해도 못할 당신에게 지금 하나하나 따져댔다간 오히려 내가 피곤할 것 같으니 이 문제는 후에 천천히 고쳐줘야겠다 생각하며 나는 애써 입가에 웃음을 띠웠다.
방을 나서자 내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새론이 서있었다. 여기 있을 거라 생각도 못했기에 깜짝 놀랐지만 어차피 새론을 찾으러 갈 심산이었기에 나는 잘됐다는 듯 새론에게 걸어갔다.
"저기 새-."
"죄송합니다, 아가씨."
"응?"
하지만 미처 채 새론을 부르기도 전에 새론이 급하게 내 말을 끊는다. 곤란하다는 기색이 역력한 그 얼굴에 나는 의아해져버렸다.
"먼저 방으로 가세요, 아가씨."
"……난 방금 이 방에서 나온 건데요?"
나보고 다시 들어가란 소린가? 3일 만에 여기서 나온 사람한테 나오자마자 바로 다시 들어가라고? 절대로 싫다는 표정으로 새론을 노려보자 새론이 그런 나를 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오해세요. 이 방 말구요."
"그럼요?"
"당연히 아가씨 방으로죠."
"아."
그럼 그렇지. 새론이 내게 이런 야박한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닌데. 괜한 오해를 했다 싶어 미안하게 쳐다봐주자 새론이 다시 생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서둘러서 방으로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 상태로 계시다 다른 시노들 눈에 띄기라도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방으로 얼른 돌아가서 제대로 옷을 입히라 하시네요. 아, 물론 위험한 사람은 저랍니다."
그래봐야 죽기밖에 더 하겠어요. 라고 뒷말을 속삭이며 생글거리는 새론의 말에 나는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누가 그러던가요?"
"누구겠어요. 당연히 주군께서죠."
"뮤가 언제 그런 말을 했는데요?"
방금 전까지 나와 같이 있던 남자가 그 남자다. 그리고 아직도 이 방안에 있을 남자도 그 남자고. 맹세코 뮤는 나보다 먼저 새론을 만날 수 없단 소리다.
"방금 그리 말씀하셨답니다."
그런데 방금 그렇게 말했단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난가?
"……마법인가요?"
"마법이지요."
역시나.
"그렇군요."
"열심히 하세요."
"……."
젠장! 오늘부터 다시 시작해야지! 그래서 나도 언젠가는, 언젠가는!
"……."
……그런데 과연 가능할까? 이런 전음을 전할 만큼의 실력이 언젠가는 갖춰지려나? 에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처음 시작할 때와 비교하자면 물론 그때보다는 마나가 늘었겠지만 아주 조금일 뿐이다. 굳이 그 양을 측정하자면 모기 눈물만큼 이라고나 할까.
한 달 만에 돌아온 내 방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마치 이곳을 떠났던 적이 없었다는 듯이.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어느새 준비해 둔 건지 테이블 위에 쿠키가 준비되어 있다. 초콜릿이 커다랗게 박힌 쿠키를 하나 집어 오도독 깨물었다. 달콤하고 시큼하다. 오묘한 맛이었지만 나쁘진 않았다. 맛있다. 소파에 앉아 오독오독 쿠키를 먹고 있는 등 뒤로 새론이 다가와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칼을 수건으로 말려주었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알아서 말라요."
"후후. 말려드릴게요."
귀찮을까봐 그렇게 말한 건데 굳이 하겠다니 뭐. 그래서 그냥 새론 맘대로 하도록 놔두었다. 하지 말라고 더 말 해봐도 그만둘 것 같지 않으니까.
오독오독. 쿠키를 씹으며 머릿속으로 해결해야 할 일들을 정리해보았다. 최대한 빨리 처리해야 할 것들부터 먼저. 뮤 때문에 그동안 생각이라는 것 자체를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하여튼 대단한 정력이지. 그런데 가만히 해야 할 일들을 꼽아보니 그렇게 빈둥빈둥 침대에서 굴러다니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휴~. 라니 일부터 먼저 해결했어야 했는데. 어떻게 라니를 잊어버리고 있었담. 분명 많이 울었을 텐데. 걱정도 많이 했을 거고.
그래, 제일 먼저 라니를 만나야 했다. 내가 돌아왔다는 말에 당장 뛰어왔을 라니를 뮤 때문에 만나지 못했다는 것을 다시 떠올리면 라니한테 한없이 미안하기도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그리고 자기 욕심만 부려댔던 뮤의 행동에 짜증이 좀 일기도 한다.
물론 그 중에서도 가장 짜증나는 건 바보 같은 나 자신이지만.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뮤의 품 안에서 흥분하고 또 흥분해대며 엥엥거려댔던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