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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아름답다-160화 (160/206)

< -- 160 회: # 10 -- >

한참을 펑펑 울고 난 뒤, 나는 조심스럽게 뮤에게 물었다. 엄마가 백작 가(家)의 딸이었다면 굳이 도피 따윌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왜 엄마 아빠는 집안을 버리면서까지 루벤스 제국으로 왔어야 했느냐고. 뮤는 이미 예전에 엄마 아빠에 대한 조사를 마친 것 같으니 그 이유도 분명 알 거다. 호기심을 감추지 못한 내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던 뮤가 덤덤히 입을 열었다.

"네랜 백작 가(家)의 영애, 그러니까 네 어머니께는 원래 네 아버지가 아닌 다른 약혼자가 있었지. 그것도 쉬이 약혼을 깰 수 없을 만큼 높은 집안의 남자와. 원래의 약혼자를 버리고 하펜젤러 백작 가(家)였던 네 아비를 선택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본다."

"……엄마한테 다른 약혼자가 있었다고요?"

와아.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엄마 옆에 아빠가 아닌 다른 사람이 서 있을 수도 있었다니. 상상조차 쉽지 않은 걸.

"도망 외엔 다른 선택은 없었고요?"

"굳이 찾아보자면 있었겠지만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겠지. 그렇게 두 사람이 가문을 버리고 떠나지 않았다면 가문끼리의 큰 마찰은 피할 수 없었을 테니까. 좋든 싫든 말이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요?"

"……하아. 네 부모의 행보를 이해하기 위해선 처음부터 말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이야기가 꽤 길어져. 네가 원한다면 자세한 것들은 돌아가서 말 해주마."

"짧게, 아주 짧게 조금만 해줘요. 네?"

"……고집은. 사건의 시작은 네 어머니에서부터가 아니라 지금의 현 네랜 백작부부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들과도 깊은 연관성이 있으니까. 내용이 가볍지 않다는 것만 지금 말해주지. 네가 정말 모든 진실을 알기 원한다면 그 전에 마음의 준비부터 먼저 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껌뻑 껌뻑.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하지만 뮤의 말마따나 생각보다 가볍지 않은 내용일 거라 짐작되었기에 지금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뮤는 더는 귀찮다는 듯 고개를 휙 돌려버린다. 뭐, 자세한 내용은 돌아가면 해준다니 그리해주겠지. 물론 알고 싶지 않다면 듣지 않으면 그만이고. 그래서 지금은 참기로 했다. 그런데,

'돌아가서 해주도록하지.'

돌아가서, 돌아가서…….

내게도, 내게도 돌아갈 곳이 생겼다. 사라졌던 내 장소가 다시 만들어졌다. 내 장소, 내가 있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곳이. 가슴이 따뜻해진다. 아아,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이젠 내게도 있구나. 더는 길거리에서 헤매지 않아도 된다. 그리 생각하자 가슴이 콩닥콩닥 거려댔다.

점심을 먹기 위해 시녀의 안내를 받아 식당으로 내려갔을 때 그곳엔 응접실에서 보았던 사람들이 다 모여 있었다. 함께 식사할 수 있다면 되도록 함께한다는 규칙이 엄마 집의 특징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분위기, 내겐 무척이나 익숙한 것이었다. 그리운 장면을 떠올리며 나는 내게 주어진 자리에 앉았다. 뮤는 내 옆에 앉았다. 그는 상석에 별도로 마련된 자리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뮤가 멋대로 내 옆 자리에 앉아버리는 바람에 원래 그 자리의 주인이었던 청년이 자리를 옮겨야 했다. 저 청년, 내 사촌 동생이라는데 사실 나는 나보다 오빤 줄 알았다. 그런데 이름이 뭐였더라? 분명 소개 받았을 때 들었었는데 기억이 안 난다. 갑작스레 새로 생겨난 식구들이 너무 많아서 이름을 외우는 것도 힘들구나 싶다.

"린, 네가 이쪽으로 오거라."

아, 맞다! 린이었다, 린. 린리안 네랜. 그게 그의 이름이었다. 그는 자기의 자리를 빼앗은 뮤를 힐끔거리더니 내게 아쉽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 짓궂음에 내가 당황하자 그 얼굴이 웃겼는지 하하 크게 웃어댄다.

"누님이랑 친해지고 싶은데 도무지 틈이 없네요."

익살스런 표정에서 엄마의 장난 끼를 엿본 건 내가 이 사람들 속에서 나도 모르게 자꾸 엄마의 흔적을 찾으려하기 때문인 걸까? 하지만 방금 전 그의 표정은 정말로 닮아있었다. 가끔씩 엄마가 짓던 그 표정과.

조용히 식사가 시작되었다. 음, 체할 것 같아. 달그락달그락 그릇소리라도 좀 났으면 좋겠네. 어색함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이 분위기라니. 분명히 말하지만 이건 나 때문이 아니다. 정말 아니다.

뮤……때문일까? 그렇겠지?

음, 맞는 것 같다. 내 옆에 앉은 남자의 눈치를 보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뮤 때문에 다들 말이 없었던 것이 맞는 모양이다. 그 눈빛 속엔 신기해하는 눈빛도 조금 있었고 경외감 어린 눈빛도 있었다. 내가 알아챈 것들이니 그것을 뮤가 모를 리 없을 터. 하지만 이 남자는 조금도 아랑곳없이 묵묵히 음식을 먹고 있다.

"정말……바로 돌아갈 거니, 유나야?"

그때 할머니가 내게 조심스레 물어왔다. 나는 입에 들어있던 음식을 재빨리 씹어 넘기고 물로 재빨리 헹군 뒤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 결혼식 때문에요. 얼마 남지 않았거든요. 친한 친구 결혼식이라 빠지기도 그렇고 해서 일단은 그 일 때문에라도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렇구나."

할머니는 눈에 띄게 씁쓸한 표정이 되었다. 그 표정이 못내 마음에 걸려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오세요."

"응?"

"공작성으로 오세요. 공작성이 불편하시다면 근처에 있는 별장이라도 내어드릴게요. 성에서 굉장히 가까운 곳에 별장이 있거든요. 오시면 그곳에서 저와 함께 지내실 수 있을 거예요."

분명 공작성으로 먼저 오라 한건 뮤다. 그러니 별장 하나 정도야 멋대로 내어주겠다 해도 타박하진 않을 테지. 힐끔 뮤의 눈치를 살펴보자 다행히 그는 아무렇지도 않아보였다.

"그, 그래도 될까?"

할머니의 얼굴이 밝아졌다. 뮤가 말한 것보다 내 입으로 그리 말하니 더 신뢰가 가는 모양이다. 그 모습에 나는 어정쩡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초대장을 보내드릴 테니 오십시오. 아니, 초대장 없이도 그냥 오십시오. 유나 말대로 본성이 불편하시다면 본성에 딸린 별채를 내어드리겠습니다."

"별채를요?"

뮤의 말에 놀란 사람은 나다. 그도 그럴 수밖에.

별채라니, 별채라니!

별채는 뮤의 어머니, 그러니까 전 공작부인이 가장 큰 애착을 가지고 꾸몄던 곳이라 들었다. 나는 한 번도 들어 가본 적 없지만 그곳은 뮤의 명령으로 꾸준히 관리되어 공작부인이 머물렀던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고. 그런 곳을 내어주겠다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별채라고는 하나 여기 계신 분들이 머무르기엔 불편함이 없을 겁니다."

물론 그럴 거다. 지나가다 힐끔 보았던 별채의 외곽은 말이 별채였을 뿐, 하나의 작은 성과도 다름없었으니.

"우와~. 우리 가족 전부를 초대해 주시는 겁니까?"

린이 눈을 반짝거리며 물어왔다. 신나는 탐험을 앞둔 어린아이와도 같은 설렘이 그 안에 잔득 배겨있었다.

공작성은 아무나 들어오지 못한다. 게다가 이 남자는 공작으로 오르고 나서 파티나 연회 등을 단 한 번도 공작성에서 열지 않았다. 전 공작과 공작부인 역시 파티를 즐기지 않았다 하니 다른 사람들에게 공작성은 미지의 세계이나 다름없으리라. 실제로 공작성은 루벤스 제국의 귀족들조차도 -극히 일부 귀족들을 제외하고는- 와 본적 없는 곳이었다. 그러니 내가 공작성으로 들어가 살게 되었을 때 그리도 난리를 피워댔던 거겠지. 그전에 공작성으로 불려간 것만으로도 난리였었는데. 즉 공작성은 근 반 백년간 개방된 적이 거의 없었던 곳이라 해도 무방할 거다.

그런 곳을 같은 나라의 귀족도 아닌 타국의 귀족이 방문한다? 방문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머물기까지 한다? 그 사실에 린은 흥분한 것 같았다.

"우와~, 우와~!"

그 철부지 같은 모습에 그제야 나는 린이 나보다 더 어린나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아니, 지금은 완전 어린아이로만 보인다.

"린리안!"

그런 린의 행동을 지적하듯 삼촌이 낮게 이름을 불렀지만 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린은 삼촌의 성격과 많이 다른 모양이지. 힐끔 삼촌 옆에 앉은 숙모 로잘린을 보자 그녀의 눈빛이 린과 다름없이 반짝이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다른 점이 있다면 린은 흥분을 입 밖으로 꺼내었고 그녀는 우아하게 다듬었다는 그 차이랄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린은 아무래도 숙모를 더 닮았나보다. 외양은 삼촌과 판박이인데.

"참, 유나야. 네게 이모가 한 명 더 있단다. 지금은 시집가서 네랜 영지에 살고 있지 않지만."

"이모님이요?"

또요? 내 말에 할머니가 곱디고운 얼굴 위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소니레아. 네 엄마의 여동생이란다."

"엄마한테 여동생도 있었군요."

여기에 없었기에 또 다른 식구는 생각도 못했는데. 점점 늘어가는 식구의 수에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기대가 되기도 했다.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한테 동생이 둘이나 있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점심을 마치고 간단한 다과를 하며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직은 서로가 많이 어색했지만 린과 숙모의 밝은 성격 덕분에 분위기는 생각보다 많이 어렵지만은 않았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나를 보는 할머니의 얼굴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다는 거다.

그렇게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집사가 손님의 방문을 알려왔다.

"누구?"

"쿤이라고 이름을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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