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55 회: # 9-9 그 남자 -- >
"싫은데. 알브레히트 공작성으로 갈 거야."
일그러지는 사키의 얼굴을 보면서 레인이 발랄하게 입을 열었다. 사키는 자기보다 더 발랄한 사람은 참으로 대하기 힘들다 생각하며 이번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공작님을 찾아뵈실 계획이시라면 그만 두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키의 말에 레인은 잠시 생각이라는 것을 해보았다.
"노르젠 영애는 아직도 깨어나지 않은 건가?"
"……네."
"그럼 여전히 그녀의 행방을 알 방도가 없겠군."
"……."
말을 함에 있어 거침없는 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상황이 이렇다보니 짜증이 안 날 수가 없다. 사키는 불만으로 인상을 찌푸려댔다. 하지만 그렇다고 레인에게 뭐라 말할 수는 없었다. 눈앞의 남자는 이 나라의 황태자였고 자기는 일개 기사일 뿐이었으니까. 황태자와 자기의 사이에는 거대한 신분의 차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었다.
"뮤와르노와한테는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그가 폭주해 준 덕분에 마음껏 날뛸 수 있었어. 따분해 미칠 뻔했는데. 큭큭큭. 그동안 오죽 답답했어야지."
그 말을 들은 순간 사키는 감히 무엄하게도 레인을 노려보았다. 물론 금방 눈매를 풀긴 했어도 노려본 것은 사실. 저 멀리 레인을 호위하기 위해 대기 중이던 기사 중 한명이 그런 사키의 무례한 눈매를 포착하고는 무시무시한 기를 발산해 댔지만 정작 레인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앞으로 이 나라는 실력 있는 자들의 것이 될 거다, 사키. 그럼 네 놈은 더욱더 날뛰어대기 수월해 지겠지."
"……지금도 마음껏 날뛰고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궁으로 돌아가 주십시오. 지금도 주군의 심기는 충분히 좋지 않으니까요. 잘못했다간 전하께 폭주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도 좋지 않은데 네가 가서 더 심기를 어지럽히지 마라는 사키의 말에 레이는 푸히히히 웃어버렸다.
"아, 정말 재미있네. 대단해, 정말 대단해. 그저 뮤의 침실을 꽤 오랫동안 덥혀주는 여자구나 싶었더니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나 보군. 그럴 줄 알았으면 미리 얼굴이나 좀 보러 갔을 것을. 쯧쯧. 못 찾게 된다면 영영 얼굴 볼 기회도 없을 텐데 아쉬워. 아주 아쉬워."
레인은 진심으로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사키는 한시라도 빨리 이 골치 덩어리 황태자를 궁으로 돌려보내고 이곳을 정리하고 싶었다. 이곳을 빨리 정리해야 그도 돌아갈 수 있을 테니. 그런데 언제 다 정리하나? 주위를 둘러본 사키의 입에서 긴 한숨이 절로 빠져나온다.
"그럼 제가 먼저 물러나겠습니다, 전하. 할 일이 많아서요."
그래, 내가 피하자. 내가 먼저 가자. 그 쉬운 방법을 내버려 두고 내가 왜 이 황태자를 궁으로 돌려보낼 생각만 했는지 모르겠다. 사키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 생각을 즉시 실행으로 옮겼다. 안 그래도 할 일이 많다. 바쁘다.
하지만 힘들게 일을 정리하고 공작성으로 돌아와도 여전히 사키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수밖에. 벌써 한 달째, 공작성의 분위기는 매우 암울했던 탓이다. 깜깜한 밤도 아닌데 공작성은 매우 어두워보였다. 심지어 한 낮에조차도 그리 보일 지경이었다.
그 원인은 주군의 여자가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텔레포트 되어 사라졌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 사건의 원흉인 스잔나 노르젠은 공작성 서(西)성에서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스잔나 노르젠.
그녀가 왜 아가씨를 다른 곳으로 날려 보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차라리 죽이는 것이 더 간단했을 터. 텔레포트는 간단한 마법이 결코 아니다. 그 증거로 텔레포트를 시전한 탓에 후작영애는 과도한 힘을 사용해야만 했다. 비록 마나석을 가지고 있어 그것의 도움을 받아 마법을 시전한 것이라 하더라도 애초에 그 마법은 후작영애의 능력으로 행하기엔 벅찬 것이었기 때문에 후작영애는 마법을 시전한 직후 바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문제는 그렇게 쓰러진 그녀가 아직까지도 눈을 뜨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 그녀가 가지고 있던 배속의 아이가 사산되었지만 그것이 주군의 여자가 어디로 이동되었는지 모른다는 현실보다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 누구에게도.
사키는 머리를 긁적 거려댔다.
어쨌든 그날 그 일이 있은 직후, 후작영애는 공작성으로 옮겨져 왔다. 주군은 그녀를 당장이라도 죽여 버릴 듯 살벌하게 노려보았지만 진짜로 죽일 수는 없었다. 그녀가 아니면 주군의 여자인 아가씨가 어디로 텔레포트 되었는지 알아낼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벌써 한 달이야."
집무실로 들어서며 사키가 중얼거렸다. 집무실 안에서 일을 하던 호세가 그런 사키를 힐끔 쳐다보더니 다시 서류로 고개를 숙인다.
"일은 다 끝낸 건가?"
"아아, 그렇지 뭐."
"수고했다."
"수고는 무슨. 너무 쉬워서 자랑할 맛도 나지 않는 것을."
"태자 전하는?"
"펄펄 나셨지. 공작성으로 오고 싶어 하는 걸 오지 말라고 말렸더니 낄낄 거리시더군."
"그분 성향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아무렇지도 않게 호세가 받아치자 사키는 뭐라 더 지껄이려던 입을 그냥 꾹 다물었다. 사실 별로 말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저 이 공작성의 분위기가 너무나도 답답하고 무거워서 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터져버릴 것 같은 긴장감에 아무렇게나 뱉어낸 것들일 뿐이다.
"……루이는?"
그 무게가 호세 역시 마냥 감당하기에는 답답했던 모양이다. 억지로 질문 하나를 만들어 꺼낸다. 사키는 그런 호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아, 루이."
쯧쯧, 혀를 차대며 사키는 루이를 떠올렸다. 오늘 아침에 봤었지. 창백한 얼굴과 지쳐 보이던 눈빛이 루이의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토킨 부인이 아직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했다나봐."
"대체 스잔나 노르젠 후작영애가 아가씨를 만나기 전에 토킨 부인과 무슨 이야기를 한 거지?"
"……몰라. 루이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어서……."
그랬다. 문제는 루이네 집에도 있었다.
아가씨가 사라진 그날, 라니 토킨 부인도 스잔나 노르젠처럼 쓰러졌던 것이다. 다행이 토킨 부인은 금세 정신을 차렸지만 그때부터 울고 기절하는 행동을 몇 번이나 반복해대고 있다고 한다. 그러다 며칠 전부터는 더는 울지도 않고 기절하지도 않았지만 마치 정신 줄을 놓은 것처럼 멍하니 앉아만 있다고. 그런 토킨 부인에게 롱아르 백작영애가 매일같이 찾아가 달래주고 있다고 하니 어쩌면 토킨 부인은 루이보다 더 나은 상태일지도 모른다고 사키는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가장 큰 문제는 루이다.
루이는 자신의 저택에서 아가씨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부인을 보호하지 못했다는 무력감을 동시에 안고 있었다. 비록 스잔나 노르젠 후작영애의 행동이 무척이나 돌발적인 것이었고 루이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이라 할지라도 그의 마음 속 죄책감의 무게는 변하지 않았다.
"토킨 부인의 남편으로서도 주군의 신하인 루이 토킨 자신으로서도 그 모든 책임을 한꺼번에 짊어지려하니까 그렇게 힘든 거지. 바보 같은 자식. 우리들은 그림잔가? 왜 조금이라도 의지할 생각을 않는 거야?"
"네가 하도 가벼이 행동하니 의지할 생각도 나지 않는 게 아닐까, 사키?"
"핫! 그런 너는 그렇게 무겁게 행동해서 지금의 루이가 널 의지하고 있냐?"
"……."
사키의 말에 호세의 입이 딱 다물렸다. 평소 같았다면 호세의 입을 막았다는 생각에 기분이 한껏 좋아졌을 사키였겠으나 지금은 그런 호세의 모습이 한없이 답답하기만 했다. 호세에게 한방 먹인 것 따윈 아무래도 좋으니 부디 호세의 말대로 입이 무거운 호세에게만이라도 의지하려 든다면 좋겠다는 하는 바람이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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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키가 간만에 그런 건전한 생각을 하며 한숨을 내쉬고 있던 그 시각.
새론은 날고 있었다.
난다? 그래, 그게 가장 정확한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지금 새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이 공작성에서도 한손에 꼽힐 정도로 적을 테니까. 복도로 들어갈까 했던 몸짓은 순식간에 마음을 바꿔 창 쪽을 향해 움직였다.
창이 훨씬 빠르다!
본능적인 판단이었다. 창을 통해 출입하는 건 그녀가 어쎄신이었을 때 자주하던 행동이었다. 새론이 집안일을 하겠다 선언하고 난 후 절대로 하지 않았던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습관과도 같았던 그 행동을 버리기까지 굉장히 힘들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
무엄하게도 창을 통해 공작의 집무실 안까지 들어선 새론의 얼굴에는 땀 한 방울도 매달려 있지 않았다.
뮤는 주제넘게 창을 통해 들어선 새론을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새론이 아니었다면 들어오기 전 죽였을 목숨이다. 그 사나운 시선에 움찍거릴 만도 할 텐데 새론은 그저 품안에 넣어두었던 편지를 뮤에게 건네주었을 뿐이다. 그런 새론의 얼굴은 어쩐지 의기양양해 보였다.
"뭐지?"
"직접 읽어보세요."
뮤의 시선이 새론의 손에 들린 편지로 떨어졌다. 그런 그의 시선이 조금 흔들리는가 싶더니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딱딱해졌다. 뮤가 편지를 뜯었다.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라이니 공국 네랜 영지에 있어요. 레니의 결혼식에 맞추기 위해 3일 뒤쯤 여기서 출발할 생각이에요. 혹시 결혼 날짜에 못 맞추더라도 화내지 말라고 전해주세요. 유니시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