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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아름답다-154화 (154/206)

< -- 154 회: # 9-9 그 남자 -- >

"사, 살려주시게. 나는 이 나라의 후작이네. 이 나라 황후의 오라비야! 감히 그 누구도 내게 이럴 순 없어!"

노르젠 후작의 마지막 발악과도 같은 고함소리가 사키에게 뻗어왔다. 그런 후작을 바라보며 사키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어댔다. 사키의 칼끝으로 빨간색의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피 가운데 사키의 것은 없었다. 그의 주변에 즐비하게 늘어선 시체가 된 이들의 것이리라.

"미안하지만 그 황후가 곧 폐위될 예정이라서. 그것도 반역이라는 명목으로 말이지. 그러니 안타깝게도 더는 황후의 후광 따위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을 거요, 후작."

노르젠 후작의 말을 받아친 것은 사키가 아니었다. 사키의 등 뒤에서 짙은 검은색 머리칼의 남자가 히죽히죽 웃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 남자를 본 노르젠 후작의 입에서 기이한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레브레인 황태자!"

"내가 황태자인건 알고 있었나보네. 그런데 그렇게도 열심히 죽이려 들었다? 참, 간도 커."

싱글벙글. 레인은 웃었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이 이렇게도 통쾌할 수가 없었다. 진작 쓸어버려야 했고 충분히 쓸어버릴 수 있었던 버러지들을 그 놈의 증거, 정황 타령을 해대는 아버지 때문에 내버려두었더니 글쎄 그 버러지들이 주제를 파악 못하고 더더욱 날뛰어대는 게 아닌가. 자기를 낳아준 아비였지만 현 루벤스 제국의 황제를 레인은 도무지 존경할 수가 없었다. 자기가 왕위에 오른다면 성질이 더러운 신하는 용서해도 머리가 나쁜 신하는 용서하지 않으리라 다시 한 번 다짐하며 레인은 웃었다. 아아, 이상하게도 머리가 나쁜 놈들이 꼭 처리하기 귀찮은 사고를 일으켜 댄단 말이지.

"걱정 마시지요, 후작. 목숨은 일단 살려둘 계획이니까. 목숨은, 일단."

마지막 말을 강조하듯 레인이 싱긋 웃으며 노르젠 후작 앞으로 다가섰다. 그런 레인의 앞을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가로막았다. 총 5명이었다.

"이런, 이런. 아직까지도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있는 놈들이 있었단 말인가! 이렇게 안타까울 수가!"

그렇게 말하면서도 레인은 또 웃었다. 아주 활짝. 기쁘다는 듯이.

이미 노르젠 후작을 위해 칼을 든 이들을 모두 베었다고 여겼건만 아직까지도 이런 충성심을 가진 떨거지들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레인은 그들을 향해 진한 비웃음을 날렸다. 상황은 이미 기울었다. 노르젠 후작을 지켜내 설령 이곳을 빠져나간다 해도 결국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 목숨만 잃을 뿐. 그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도 이리 막아서는 것을 보니 눈물이 앞을 가릴 지경이라고 생각하며 레인은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어댔다.

"역시 머리 나쁜 놈들은 딱 질색이라니까."

모실 주군을 제대로 선택하지 못한 것도 머리가 나쁜 탓이겠지. 그리 중얼거리며 한 걸음 더 앞서자 그런 레인의 앞을 사키가 막아섰다. 그런 사키의 얼굴엔 피곤함이 가득 배어있었다.

"왜 또 여기 오셔서 그러십니까? 네? 제발 다른 곳으로 가 주십시오."

심술궂은 목소리로 타박해도 레인은 그런 사키를 나무라지 않았다.

"사키. 너무 나를 미워하지 말게. 응? 젠이나 루이는 내가 근처에만 가도 눈을 부라린단 말일세. 나도 여기 오고 싶어서 왔겠나?"

"저도 눈 부라릴 줄 압니다만?"

"자네는 부라려도 무섭지가 않아서 말이지."

"……이런. 앞으로는 살기를 좀 넣어서 눈을 부라려도 되겠습니까?"

"그러지 말지."

결국 사키는 길게, 아주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감히 이리 행동해선 안 된다는 걸을 알지만 한숨이라도 쉬지 않으면 속 터져 죽어버릴 것 같았다. 미치겠군. 안 그래도 신경 쓰이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닌데 황태자까지 자기한테 와서 얼쩡대니 피곤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얄미워도 황태자는 황태자. 차마 레인을 나서게 할 수 없어 사키는 달려드는 그들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부상이 극심한 이들을 제압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 사키는 아주 간단하게 그들을 제압했다. 이로써 이 노르젠 후작 가(家)에는 후작을 위해 싸워줄 만한 그 어떤 이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젠장. 그 놈들은 잡았어야 했는데.

산 채로 잡아 정보를 캐내려 했던 핵심 인물들은 모두 입에 물고 있던 독으로 자결을 해버렸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허, 헉! 살, 살려주시게! 살려줘!"

벌벌 떨고 있는 노르젠 후작 앞으로 여전히 싱글벙글인 레인이 다가섰다.

"걱정 마시라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머리가 참 나쁘시군요."

그렇게 말하며 노르젠 후작의 얼굴 가까이 레인이 자기의 수려한 얼굴을 들이밀었다. 자신에게 쏘아져 들어오는 강렬한 눈빛에 후작은 절로 신음성을 내뱉었다. 레인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절대 웃고 있는 자의 그것이 아니었다. 사납고 날카로웠다. 먹이를 앞에 둔 맹수의 눈빛이 그러하듯. 어쩌면 경멸에 더 가까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주 조금만, 그저 조금만 욕심을 줄이셨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랬습니다. 쯧쯧. 그러게 왜 그리 욕심을 부리셔서 명을 재촉하셨습니까?"

"살, 살려주십시오, 태자전하! 저는 이 나라의 후작입니다!"

"아, 후작이시군요. 경의를 표합니다."

레인의 말에 노르젠 후작은 웃지 않았다. 아니 웃을 수가 없었다. 누가 봐도 저건 비웃음이었으니. 감히 이 어린 것이 나를 모욕해? 순간 노르젠 후작의 눈이 세차게 레인에게 쏘아졌다. 그런 그의 모습에 레인의 주위에 있던 한 기사가 얼굴을 찌푸렸지만 레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후작이라 하시니 선택권을 드리겠습니다. 두 팔로 할까요, 두 다리로 할까요? 고르십시오."

"뭐, 뭐?"

"후작이라 하셔서 제가 특별히 드리는 선물입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어림도 없지요. 암, 그렇고말고요. 자, 선택하세요. 두 팔로 할까요, 두 다리로 할까요?"

그게 무엇에 대한 선택권인지 노르젠 후작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그의 온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대기 시작했다.

진, 진심이다. 이 놈은 정말 그리 할 작정인 게야!

"사, 살려주시게."

후작이 다시 한 번 사정하듯 애원했지만 그런 후작의 모습을 레인은 짜게 식은 눈빛으로 묵묵히 내려다 볼뿐이다.

"참 끈덕지게도 구셨습니다. 죽음 그 이후가 두렵지도 않으셨습니까? 저 같으면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났을 것 같은데 말이죠."

"무, 무슨, 흑!"

노르젠 후작은 어느새 자기의 목 앞으로 뻗어있는 시퍼런 칼날을 보며 숨을 멈췄다. 조금만이라도 움직인다면 바로 목이 떨어져 나가버릴 것과도 같은 극한의 공포가 온 몸을 덮쳐왔다.

"저는 나름 신을 믿는 아주 심성이 여린 사람이라서 그런지."

그렇게 말하며 순수한 표정을 짓는 레인의 등 뒤로 사납게 구겨진 얼굴로 레인을 노려보며 서 있는 사키가 있었다. 구시렁구시렁. 사키가 대놓고 레인의 말에 토를 달아댔지만 레인은 전혀 아랑곳없이 순수한 소년 같은 표정을 유지했다.

"후작과 같은 짓을 하면 잠을 편히 자지 못할 것 같아서 그럽니다. 그래서 감히 물어보건대, 그런 짓을 하시면서도 잠이 잘 오시더이까?"

"……으, 으."

후작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제와 양심의 가책이라든가 그런 아름다운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레인이 애초에 그에 대한 대답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레인의 날카로운 검이 더 가까이 다가왔던 것이다. 얼마나 가까이 놓여있었던지 후작이 침을 삼키는 아주 사소한 동작만으로도 목에 생채기가 나 피가 흐를 정도다.

"빨리 선택하십시오, 후작. 선택하지 않으시겠다면 그냥 제가 골라드립니다?"

레인이 낮게 물었다. 그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으, 으."

후작이 제발 이러지 말라는 듯 애원하는 표정으로 레인을 바라보았다. 그런 후작의 눈빛에 레인은 손가락 하나를 귓구멍으로 집어넣으며 마구 긁어댔다. 어림없다는 뜻이렷다.

"나 참. 자기는 더러운 짓이란 짓은 다해놓고서 이제와 이런 애원이라니. 이런 인간인 줄은 진즉에 알았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냐?"

그렇게 말하며 레인은 후작의 목에서 칼을 거두었다. 그제야 후작은 억눌렀던 숨을 마음껏 내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너무 이른 안도였을까? 숨을 내쉬던 그 순간과 동시에 후작의 몸에서 한 움큼의 피가 쏟아져 내렸다.

"컥!"

휙! 칼이 허공을 찢는 소리와 함께 후작의 한쪽 팔이 떨어져 나갔다. 다시금 휙! 소리가 이어졌다. 그러자 이번엔 후작의 한쪽 다리가 찢겨져 나갔다.

"선택을 하지 않으시니, 그냥 공평하게 하나씩 잘라드립니다. 이래봬도 저는 꽤 상냥한 사람이거든요."

후작의 입매가 파르르 떨려댔다. 극한의 고통 속에서 후작은 곧 기절해 버렸다.

"이대로 두면 과다출혈로 죽겠군. 이렇게 편히 죽게 해줄 순 없지. 지혈해."

냉정한 레인의 명령에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 다가와 후작을 업고 사라졌다. 후작이 있었던 곳에는 그의 흔적을 알리듯 흥건한 피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잘려진 팔과 다리 한 짝씩과.

"아, 이제 속이 좀 시원하네."

흥겨움에 낮게 콧노래를 부르며 레인이 사키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런 레인의 모습을 보며 사키가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일 다 하셨으면 이제 그만 궁으로 돌아가시죠."

"싫은데. 알브레히트 공작성으로 갈 거야."

일그러지는 사키의 얼굴을 보면서 레인이 발랄하게 입을 열었다. 사키는 자기보다 더 발랄한 사람은 참으로 대하기 힘들다 생각하며 이번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공작님을 찾아뵈실 계획이시라면 그만 두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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