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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아름답다-149화 (149/206)

< -- 149 회: # 9 -- >

"그, 그냥 그러고 싶다는 희망사항인 거지 뭐. 그거 만병통치약이라잖아."

"그래도 포션을 마시고 싶다니. 농담치고는 통이 상당히 큰데?"

"내가 원래 통은 좀 커."

다행이 쿤이 장난스럽게 받아주어서 나도 장난스럽게 넘기며 웃을 수 있었다.

꽃차가 나왔다. 다른 이들에게는 시원하기만 할 실내가 내게는 좀 쌀쌀했기에 나는 모락모락 김이 솟는 꽃차를 반색하며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음, 황홀해. 정말 맛있다."

"그렇게 맛있어?"

"응."

맛있지. 맛있고말고. 술과 막상막하를 이룰 정도로 맛있지.

다시금 꽃차를 한 모금 머금으며 꽃의 향연을 감상했다. 한쪽 벽면이 모조리 유리로 되어 있어 이 카페 어디를 앉아도 쉽게 이 멋진 광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정말 장관이구나. 네랜의 카페는 유독 통유리로 되어있는 곳들이 많았는데 아무래도 사방에 아름다운 것들이 많은 까닭인가 보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다, 이곳은.

사실 책으로 조사했을 때는 품종을 개량한 꽃들이 많다는 말에 선입견 때문인지 그렇게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더랬다. 하지만 막상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니 개량이라는 것이 꼭 나쁘지만도 않다. 오히려 다양한 지역의 꽃들을 이곳에 전부 모아두고 볼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적극적인 백작 가(家)의 후원으로 이 영지 주민들의 꽃에 대한 활용도와 관심은 상당히 우수한 편이었다. 지금 이 카페 안에도 갖가지 꽃으로 꽂은 꽃꽂이 화분이 각 테이블 마다 놓여 있었는데 꽃꽂이 방식이라든가 사용한 꽃의 종류는 제각기 다 달랐다. 마치 테마가 다르다는 듯이.

아, 그곳을 떠나야만 한다면 이곳 네랜이 좋겠다. 나는 순간 그런 생각을 하며 씁쓸히 웃었다.

정말 바보같이……. 사실은 떠나고 싶지 않으면서. 정말로 떠나고 싶지 않으면서. 이 아름다운 꽃들을 모두 버려서라도 그 남자 곁에 있고 싶으면서. 맘속에선 늘 두 명의 내가 다투고 있다.

정말 떠날 수 있을까? 내가?

응. 그 남자가 등 떠밀면 난 아무리 힘들더라도 떠날 거야. 반드시.

자질구질하게 매달리지 않고 떠나 줄 거라고?

응, 정말 그럴 거야.

다른 여자와 행복하게 잘 살라며 웃으면서 떠나 줄 거라고 말하는 거니? 바보처럼?

응, 그럴 거라니까. 한없이 바보 같고 한심해 보이지만, 그럴 거야. 그게 내 사랑이니까. 내 사랑의 끝을 초라하게 만들고 싶진 않으니까.

"……."

어쩌면 난 그 남자에게 너무 익숙해져 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고작 2년이라는 시간에 너무 많이 길들어져 버렸다.

보고 싶어. 너무너무 보고 싶어. 내가 이렇게까지 당신에게 푹 빠져버렸다는 걸 알면, 당신은 그런 나를 비웃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싫어할지도 모르지. 나를 지금까지 곁에 둔 이유는 그거였을 테니.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까 숨길 수 있을 때까지 나는 숨겨 볼 거다. 당신이 너무 많이 보고 싶어 미쳐버릴 것 같은 이 마음, 정작 당신을 만나게 되면 조금도 나타내지 않을 거다.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레니의 결혼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돌아왔노라 말하는 나를 보며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버리고 말겠지. 운이 좋으면 헤어지기 전 당신 곁에 머물렀던 것처럼 돌아갈 수도 있을 거고 그대로 나를 내쳐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당신이 보고 싶으니 나는 돌아갈 거다.

돌아가면 아직 네 자리가 남아 있을 거라 기대하고 있는 거야? 지금?

아니……. 돌아가면 이미 내 자리는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깨끗이 정리되어 있을 지도 몰라. 그래서 울어버리게 될지도 모르지. 그 남자는 이미 다른 여자랑 약혼했을 수도 있어. 그럼 난 분명 상처받을 테지만.

"그땐 여기로 오자. 여기라면 좋을 것 같으니까."

조금은 마음이 든든해진다. 정착해도 좋을 것 같은 곳이 정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어쩐지 큰일을 해낸 기분이랄까.

"응?"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쿤이 의아한 듯 나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냥 고개를 저으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을 전했다. 쿤에게 이런 말을 할 필욘 없으니. 나 역시도 언제 다시 이곳에 오게 될지 장담할 수 없는 문제가 아니던가. 1년 뒤가 될지, 몇 달 뒤가 될지, 몇 주 뒤가 될지 혹은 며칠 뒤가 될지……. 레니의 결혼식 바로 후가 될지도 모르고. 일이 어찌될 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 돌아가겠다 결심했으니 지금은 이 순간을 마음껏 즐기리라. 그리 생각하며 마음을 다스리자 한결 편안해졌다. 다시 가라앉은 마음으로 창밖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역시 아름답다. 다시 한 번 꽃차를 입에 머금고 음미하고 있던 바로 그때!

"!"

그때였다. 누군가 내 어깨를 강하게 잡아온 것은.

"꺄악!"

강한 손아귀의 힘에 나는 깜짝 놀라 작은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조용했던 카페 안에 내 비명소리가 울리자 주위 사람들이 시선이 순식간에 내게로 쏠렸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나를 잡은 사람이 누군지 돌아보았다.

"음?"

누구지? 뜻밖에도 나를 붙든 사람은 참 멀쩡하게 생긴 우아한 중년의 귀부인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이의 뜻밖의 행동 탓일까? 나는 순간의 놀람도 잊은 채 그 중년의 귀부인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참 아름다운 여자다. 나이는 들었어도 지금보다 젊었을 때의 미모를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을 만큼. 그런 귀부인이 내게 무슨 볼일이 있는 걸까?

짙은 금발 머리를 우아하게 틀어 올려 묶은 귀부인의 갈색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가까이서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려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부인과 나는 안면이 없는 사이다.

뜻밖의 행동에 당황했지만 차마 화를 낼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귀부인의 두 눈에 가득한 고통과 눈물이 너무나도 애처로워보였기 때문에.

"저기, 왜 그러세요? 무슨 일이세요?"

토끼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만 있는 부인의 얼굴에 왠지 내가 잘못한 심정이 되어 물어보았다. 혹 사람을 착각한 것이 아닌가 싶다.

"마님!"

그때 그 귀부인 뒤로 일련의 사람들이 성급히 다가왔다. 힐끔 시선을 돌려 그들을 쳐다보니 기사로 보이는 남자 2명과 귀부인의 시중을 드는 이로 여겨지는 어린 소녀 1명이다. 비록 편안한 옷을 입고 있다곤 하지만 남자들은 기사가 분명했다. 알브레히트 공작 가(家)의 기사들을 몇 번 보았다고 그 정도는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마님, 갑자기 왜 그러세요?"

어린 소녀가 서둘러 귀부인에게 다가와 아직까지도 내 어깨를 강하게 붙들고 있는 부인의 손을 떼어내려 해보았지만 부인은 강력하게 고개를 저어댔다. 여리여리한 몸 어디에서 이런 힘이 나오는 건지 모르겠지만 손아귀의 힘이 제법 대단해 어깨가 찌릿찌릿 저릴 정도다. 그에 절로 인상을 찌푸리자 소녀는 더욱 어쩔 줄 몰라 하며 부인의 손을 억지로라도 떼어내려 했다. 그래도 부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소녀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귀부인의 시선은 오로지 내게만 머물러 있을 뿐이다.

"저기, 대체 무슨 일이세요? 네? 이 분께서 왜 그러시는 건가요?"

내가 조심스럽게 소녀를 향해 물었지만 소녀 역시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했는지 그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어댈 뿐이다. 오히려 소녀는 기사로 보이는 남자들을 쳐다보며 도와 달라고 했다. 그제야 나도 어떻게 좀 해달라는 듯이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리고 나는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

두 명의 기사 중 한명이 나를 경악스런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눈에 담긴 뜻은 분명한 놀람 그리고 경악이리라. 다른 한명은 그런 그의 반응에 의아한 얼굴이었다..

왜 저렇게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나는 어깨가 너무 아파왔다. 가만히 이 상황을 지켜보던 쿤이 내가 인상을 쓰기 시작하자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하지만 한 걸음 채 내딛기도 전에 그 걸음을 한 기사가 막아선다.

"어째서 막으십니까?"

다소 냉정한 목소리가 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네랜 백작부인이시다."

그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내 앞에 서 있는 귀부인을 바라보았다. 참 곱다. 마치 한 송이 꽃처럼.

"백작부인이시라 하여 이런 식의 무례한 행동을 해도 된다는 말씀은 아니시겠지요. 제 일행의 어깨는 이만 풀어주십시오. 합당한 이유가 없다면 귀족부인이 하찮은 평민을 아무 이유도 없이 괴롭히는 것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습니다."

쿤의 말에는 딱히 틀린 부분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귀족이란 작자들이 그런 상식과 정의에 얼마나 반하는 행동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런 쿤을 다소 염려스럽게 쳐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기사는 쿤의 맹랑한 말에 다소 불쾌한 기색을 보였다. 안 돼. 나는 이제 곧 떠날 사람이지만 쿤은 계속 이곳에 머물러야 하는 사람이다. 게다가 여기서 장사를 하는 쿤이 이 지역의 여주인에게 찍혀봐야 좋을 일이 하나 없을 터.

일이 더 나빠지기 전에 어떻게든 해결해야겠다 싶어 나는 온 힘을 다해 몸을 비틀어댔다. 어깨를 쥐고 있는 손아귀의 힘 때문에 눈물이 날만큼 아팠지만 일단 억지로라도 벗어나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에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내가 귀부인의 손아귀에서 거의 빠져나왔을 그때, 나는 귀부인의 흐느낌 속에 상상하지도 못한 사람의 이름을 들었다.

"티아……루아스티아……,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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