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47 회: # 9 -- >
"그만 먹게?"
수저를 내려놓는 내 모습에 쿤이 묻는다.
"응. 충분히 많이 먹었어. 내 인생에서 최고로 많이 먹었다 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말해도 절반도 채 먹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정말로 충분하다. 더 먹으면 탈날지도 모르니까. 이제 곧 먼 여행길에 올라야 할 텐데 배탈 같은 거 나서 걸리적거리고 싶진 않다. 쿤은 내게 더 먹으라는 재촉 따윈 하지 않았다. 나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는 듯 구는 쿤을 보면 신기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어떻게 저렇게 다 일일이 기억하고 있는 건지 정말. 그 기억력에 감탄할 따름이다.
"사막에 가보고 싶은 거야?"
쿤이 물어왔다. 잠시 생각해 보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사막에 대해서 궁금해 죽겠다는 듯 물어댔으면서. 깜짝 놀랐다고. 네가 그렇게 사막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는 줄 몰랐어."
"궁금한 건 맞아. 그곳은 신비의 세계니까. 하지만 나보고 가라고 한다면 싫다고 할래. 난 사막에서 버텨낼 자신이 없어. 하루는커녕 1시간도 안 되서 기절할지도 몰라."
"음, 그건 맞는 말이다."
"그렇지? 히히. 그리고 여기 네랜 영지의 더위를 맛보기 전까지만 해도 사막엔 꼭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지금은 그러고 싶었던 절로 사그라지네."
"너무 더워서?"
그렇게 되묻는 쿤의 목소리엔 장난스런 웃음기가 가득가득이다. 그 웃음기를 맞받아치며 크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맞아. 하하. 네 말대로 루노에서 벗어나 살아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지금 이 정도 더위만으로도 난 충분히 죽을 것 같아. 정말 힘들다고."
"하긴, 나도 이사 오고 처음 맞았던 여름은 무척 힘들었었어."
"그렇지?"
내가 무작정 엄살 부린 것만이 아니라는 듯 대답을 종용하자 쿤이 착하게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런데 익숙해지면 또 괜찮아져."
"응, 그럴 것 같아."
그렇게 말하며 나는 광장 주위를 쭉 둘러보았다. 사실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생각 외로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으니까. 마치 이 더위에 익숙하다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아까도 말하지 않았던가. 심지어 이 더위에 뛰어노는 아이들도 있다고. 간혹 나처럼 끙끙거리는 사람들도 보이긴 했지만 대부분은 능숙하게 이 열기를 받아내고 있었다.
"이제 슬슬 일어나 볼까? 다른 곳도 구경해야지."
"응."
나는 쿤을 따라 일어서며 양산을 활짝 폈다. 그 양산을 자연스럽게 쿤이 가져가 든다. 하여간 자상하다, 쿤은.
"어디로 갈 건데?"
네랜 영지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나보다는 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진작 오늘 관광에 대한 모든 안내를 쿤에게 맡겼더랬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화원의 마을이 나와."
"화원의 마을?"
어라?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데 쿤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내 손을 잡아끈다. 방금 전까지 차가운 음료를 마셨던 사람답게 쿤의 손은 제법 서늘했다. 이런 더위에 이 정도 서늘함은 나쁘지 않다. 아니 기분 좋다.
"너 꽃 좋아하잖아."
"아, 응."
"여기 네랜 영지가 꽃으로 유명한 곳이란 거 몰랐어?"
"아……, 맞다!"
이런 바보, 멍청이! 어떻게 그걸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지? 그렇게 책을 뒤져가며 나중에 정착하고 살만한 영지를 찾아보았으면서도! 게다가 가만 생각해보니 이 네랜 영지는 새로운 터전으로 삼을 만한 영지후보 중 하나가 아닌가. 그것도 가장 강력한 후보 중에 하나!
바보, 유니시이나.
"쿤, 난 정말 바본 가봐."
스스로가 한심해 죽겠다는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내자 쿤이 놀란 눈으로 나를 힐끔거려댔다. 내가 이렇게까지 자책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정말 한심해 죽을 것만 같다.
이봐요, 뮤. 당신 때문에 난 정말 바보가 되어가고 있어요. 다 당신 때문이라고요.
새로운 터전으로 고려해 보았던 곳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이곳의 이름 모르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진작 쿤에게 들어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달 동안 난 대체 무얼 하며 지냈는가 말이다. 하아, 이젠 스스로를 욕하기도 지친다.
그렇게 자책하기도 잠시. 나는 애써 그런 마음을 떨구고 이제 곧 보게 될 꽃들을 상상하며 눈을 반짝였다. 책에서만 보았던 꽃들을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는데 계속 이렇게 풀죽어 있을 수만은 없지 않겠나.
쿤의 안내를 받아 이동하는 동안 쿤은 양산이 내 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배려해주었다. 양산을 썼어도 우리는 그늘만 골라서 걸었다. 그늘과 양지는 그 온도차가 너무나도 확연했기 때문에. 그나마 그늘 밑이 시원해서 다행이다. 게다가 이 네랜 영지에는 나무가 유독 많아 그늘을 찾아 걷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렇게 한 10분 정도 걸었을까?
"우와."
나는 감탄했다. 그리고 정말 순수하게 놀랐다. 슬슬 당겨오는 종아리의 미미한 통증이 오늘 밤 무척 고통스러운 근육통을 맞이하게 될 거라는 위험신호를 보내오고 있었지만 얼마든지 그것을 무시해줄 수 있을 만큼 나는 내 눈앞에 펼쳐진 이 낙원 같은 곳에 온 정신을 빼앗기고 말았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게 펼쳐진 꽃들의 향연은 내가 지금껏 보아온 그 어떤 것보다도 멋진 장관(壯觀)이었다.
저 멀리 보이는 물결이 스소룬 강이란 건 굳이 쿤에게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스소룬 강 가까이 세워진 물레방아라든가 거대한 풍차들, 그리고 즐비하게 늘어선 아담한 집들은 한 폭의 동화처럼 아름다웠다.
곁에 선 쿤은 내가 맘껏 감상할 수 있도록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그러다 내가 한참을 그것들만 바라보고 있자 결국 내 손을 잡고 다른 곳으로 이끈다.
"아직 조금만 더 보고 싶어."
"안에 들어가서도 볼 수 있는 곳이 있어. 그리고 아직 그 유명한 화원의 마을 입구에도 들어서지 않았잖아. 얼른 가자."
"아, 응."
화원의 마을은 진짜 마을 이름이 아닌 꽃집들이 즐비한 한 가로의 명칭이다. 그곳엔 다른 상점이 아닌 오직 꽃집만이 늘어서 있어서 화원의 마을이라는 명칭이 붙었다고 한다.
"자, 여기야. 여기가 바로 네랜의 자랑 꽃의 나라야."
"우와……."
너무 감탄한 탓일까? 오히려 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사실 네랜의 여름은 그 기온이 너무 높아 다양한 꽃이 자라기에는 힘들었대. 그래서 불과 사십년 전만해도 이렇게 꽃으로 유명한 영지가 될 줄은 몰랐다고. 그런데 현 백작부인께서 꽃을 굉장히 사랑하신다나봐. 다른 영지에서 자라는 다양한 꽃의 품종을 개량해서 이곳 네랜에서도 잘 자랄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다고 해. 백작부인 덕분에 지금의 네랜은 이렇게 꽃의 영지로도 유명해지게 되었지."
쿤은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지점부터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있는 이 길목의 끝까지가 전부 꽃이라고 말해주었다.
"정말 대단해."
그 어마어마한 규모에 놀란 것도 잠시. 나는 그득한 꽃향기에 정신 차리고 행복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향이 너무 진해."
쿤이 투덜거린다.
"좋기만 한 걸 뭘."
"너야 좋겠지만."
그렇게 말하며 쿤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댔다. 우리랑 멀지 않은 곳에서 또 다른 남자 역시 쿤과 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는데 쿤과 그 남자는 각자 자기의 머리를 눌러대다 서로의 모습을 확인하곤 동병상련의 웃음을 지어보였다. 서로의 심정을 잘 이해하겠노라는 동질감을 느낀 모양이다.
나는 그런 쿤의 모습을 슬쩍 외면하고는 제일 먼저 보이는 상점으로 쏙 들어갔다.
"우와, 이 꽃은."
책에서만 보았던 꽃을 실제 내 눈으로 감상하게 된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리라. 나는 쿤과 다른 의미로 머리가 어질어질해짐을 느꼈다.
"무슨 꽃인지 알아?"
쿤이 묻는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 앞에 조심스레 쭈그려 앉았다. 꽃 가까이 코를 가져다 대고 그 향기를 진하게 맡아본다. 안 그래도 꽃향기가 진동해 머리가 아픈데 또 향기를 맡는 거냐며 쿤이 뒤에서 중얼거려댔지만 그런 말은 지금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무슨 꽃인데?"
"부겐베리아."
"부겐베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