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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아름답다-143화 (143/206)

< -- 143 회: # 9 -- >

쿤은 어렵지 않은 일을 말하듯 마냥 가벼운 어조로 입을 열었지만 그게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는 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배려엔 고마웠지만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글쎄……, 그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뭐가 어려워? 만약 다시 여기로 오는 게 힘든 거라면 나한테 편지를 쓰든가. 그럼 언제든 내가 데리러 갈 테니까."

"말은 고마워."

"빈 말 아니야. 정말 그렇게 해."

"고마워.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야."

"그럼 뭐가 문젠데?"

"내가 만약……."

"음?"

"문제는 내가 돌아가면, 무조건 떠나겠노라고 전처럼 그렇게 맘을 다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서……."

"……."

"떠날 수 있을까? 내가?"

"……."

"그럴 수 있을까?"

"……."

쿤, 그건 어려울 것 같아. 왜냐하면 그곳엔 미치도록 아름다운 사람이 있거든. 보고 있노라면 심장이 저절로 두근거리고 떨려서 어느 순간엔 눈조차 쉬이 마주치지 못할 만큼 아름다운 남자가 그 곳에 있어.

그거 아니? 내가 곁에 없는 지금, 그가 다른 여자를 품고 있다 생각하면 숨도 못 쉴 만큼 심장이 아파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입을 맞추고 다른 사람의 몸에 그의 흔적을 새기고 다른 사람의 깊은 곳에 뜨거움을 내뱉고 있다 상상하면 심장이 찢어질 것만 같아. 스스로조차 놀라 만큼 잔인한 생각으로 추해져버려.

그 남자가 보고 싶어서, 너무 보고 싶어서 눈물이 나려는 것을 하루에도 몇 번씩 참곤 해. 그런 나를, 당신은 알까?

그 품에 다시 안기고 싶다. 그 생각이 너무나도 절실하다. 뻔한 변명을 만들어내고 돌아가자 결심할 만큼 그가, 그가 주는 따뜻함이 그리웠다. 어느 순간 그 단단한 품에 안겨 잠을 자고 있노라면 그동안의 설움이나 무서움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했다. 나를 안던 그 팔이, 그 품속이 얼마나 안전한 곳이었는지, 얼마나 따뜻한 곳이었는지 바보처럼 나는 몰랐던가. 이제야 깨닫는 건가.

배롤린 남작 가(家)에서나는 단 한 번도 편히 자본적이 없었다. 남작도 무서웠지만 론의 더럽고 음탕한 악행이 두려웠기 때문에. 남작은 어린 여자보다 성숙한 여자를 더 선호했다. 그래서 빼빼마른 나보다는 살집이 어느 정도 있고 풍족한 시녀들을 건드리곤 했다.

하지만 론은 유독 내게 눈독을 들이곤 했는데 그래서 음탕한 론의 시선에 겁먹어 밤마다 방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도 안심하지 못했더랬다. 조그마한 소리에도 민감하게 일어날 수 있도록 앉아서 잔적도 많았고 옷장 안에 숨어서 잔 날도 많았으며 심지어 욕실 안에 들어가 그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근 채로 밤을 지낸 적도 많았다. 그 중에서 욕실을 가장 선호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욕실에서 자면 적어도 그 안에서 문을 또 잠글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었다. 하지만 습기가 가득한 그곳에서의 잠자리는 그 다음날 엄청난 열과 두통을 가져왔기 때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욕실을 포기해야 했다. 단순히 몸 상태가 나빠져서가 아니다. 그렇게 상태가 안 좋은 몸으로 맞이할 그 다음 날 저녁의 공포가 더 컸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결벽증마냥 몸을 사리며 배롤린 남작 가(家)에서 보내는 그 긴 세월 동안 내 품에는 늘 칼이 품어져 있었다. 그것은 론을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 더러운 자식에게서 역겨운 짓을 당하기 전에 나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찌를 물건이었다. 론을 죽이겠다는 낮은 확률에 기대 실패할 경우 고스란히 몸을 내주어야 할 최악의 상황보다는 스스로를 찔러 죽겠다는 높은 확률을 선택한 것이다.

독한 마음으로 자결까지 결심하고 있었던 나였기에 정말로 몰랐다. 배롤린 남작 가(家)를 나오고부터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던 이유를 단지 그 더러운 시선에서 벗어난 안도감 때문이라고만 여겼던 거다. 단 한 번도 그 남자에게 보호받고 있었다는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아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나는 그저 그의 정부일 뿐이라 늘 생각했고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세뇌하고 또 세뇌했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세뇌했어도 결국 난 이리 되지 않았나.

자조적인 미소가 절로 입가에 떠오른다.

그래, 난 당신에게 보호받았다. 당신이 의도했건 그렇지 아니하였든 당신이 날 안전히 보호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바보처럼 그 사실을 난 이곳에 혼자 떨어지고 나서야 깨달았지. 벌써 한 달이다. 그를 떠난 지. 당신은 내 생각- 조금이라도 해주려나? 나를 찾을 마음이,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있다고 말해주면 좋겠다. 돌아온 나를 보며 반기지는 않더라도 시큰둥한 얼굴로 왜 돌아왔냐는 그런 말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 상처받지 않으려면 돌아가지 않은 편이 더 나을 지도……."

"응?"

"나는 바본가 봐. 불인 줄 알면서도 뛰어드는 불나방보다 더한 바보."

"……."

"어쩜 더 힘들어지기 전에……."

"응?"

마지막 내 말은 거의 속삭임과도 다름없었다. 쿤이 무슨 말이냐는 듯 되물어왔지만 나는 그저 헤헤거리며 끝까지 감춘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딱히 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아니었으니.

"아, 시간이 늦었다. 오늘은 이만 가볼게."

"응."

"내일은 나 오전 근무야. 일 끝나면 바로 올게."

쿤네 집은 상점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며칠 전 내가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가 산책을 하던 중 쿤이 일러주었던 쿤네 상점을 몰래 구경했던 적이 있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규모에 놀랐더랬다. 그제야 나는 내가 내민 드레스와 귀걸이를 받지 않으려 했던 쿤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쿤에게는 정말 부담되지 않았던 것이다. 내게 사준 그 물건들의 값이. 이미 쿤네 집은 일반 평민이라고 하기엔 이미 그 부(富)를 넘어선 것으로 보였다. 저 정도면 대상인까지는 아직 못 미치더라도 능히 중소상인의 반열에는 충분히 들어설 듯 했던 것이다. 웬만한 중소상인들의 부가 가난한 남작보다 훨씬 더 풍족한 생활을 영유할 수 있다고 따져보았을 때, 쿤의 가게는 엄청나게 대단한 것이리라. 나는 쿤네가 배롤린 남작보다 더 잘산다는 것에 모든 재산을 걸 수도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진짜로 걸 재산 따위는 없지만.

몸을 일으키는 쿤을 따라 일어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무리해서 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도 덧붙이고.

쿤을 배웅하고 잠시 더 거실에 앉아 남은 차를 음미하던 나는 다 마신 잔을 개수대에 넣고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웠다.

"아, 보고 싶다."

혼자 남겨지자 여지없이 떠오르는 건 그 남자뿐이다.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처음 3일 동안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마치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싶었던 사람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자고, 차 마시고, 멍하니 앉아있고, 쿤이 오면 억지로라도 조금 밥을 먹고. 이것이 내가 한 전부였다.

그 무력하기만한 3일이 지나고부터 나는 조금씩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다. 껄끄러운 스잔나 노르젠 후작영애에 대해서 생각했고 라니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그리고 처음 3일 동안에도 아무리 억누르려 해보아도 쉬이 억누르지 못했던 그 남자, 뮤와르노와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모아놓은 그 휘황찬란한 보석들을 떠올리며 혼자 킥킥거리기도 했었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주머니라도 만들어 넣어가지고 다닐 걸 후회도 좀 하고.

"레니의 결혼식인데……."

갑작스럽게 사라진 나 때문에 레니가 엄청 난리쳐댔겠지. 울기도 엄청 울었을 테고. 아마 날 찾겠노라고 수색단을 꾸렸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라니는…….

"……울고 있었는데."

잘못했다고 미안하다고 무릎 꿇듯 주저앉아 싹싹 빌어대던 라니의 모습을 떠올리자 그 남자를 보지 못해 쿡쿡 심장을 찔러대는 아픔과는 사뭇 다른 통증이 느껴졌다. 아, 나는 이렇게도 작은데 왜 나를 아프게 하는 건 많은 걸까.

내가 아무리 아파도 뮤 당신은 멀쩡할 테지. 응, 그럴 거야. 하지만 너는 라니, 너는 달라. 내가 아픈 만큼 너도 아프다. 그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서 나는 도무지 너를 미워할 수가 없어. 울고 있는 라니의 얼굴 위로 잘 감추어 놓았다 생각했던 상처가 고스란히 내려앉는다.

"그런 모습, 그런 얼굴 보고 싶지 않았는데."

그렇게 아파하는 라니의 모습을 보고 싶다 생각한 적은 없다. 맹세코 단 한 번도 없다. 왜냐하면 라니가 아픈 만큼 나 역시도 아프니까.

"스잔나 노르젠 후작영애……."

그리고 후작영애. 라니를 생각할 때면 어느새 저절로 떠오르는 그녀.

기분이 참 묘하다. 그녀를 생각하고 있노라면. 내게 단 한순간도 소중했던 적 없고 중요했던 적 없던 사람이었는데. 그런 내가 그녀에게는 왜 그리 소중했던 걸까? 나를 향한 그 애정은 어떻게 만들어 질 수 있었던 거지? 당황스럽고 껄끄럽다. 그녀의 고백에 안타까운 마음이 이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다소 냉정한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그녀 역시 아픈 사람이라는 건, 상처가 많은 사람이라는 건 알겠기에 나를 이 멀리까지 보내버린 그녀의 저의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는 없더라도 미워하지 않기로 결론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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