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42 회: # 9 -- >
이게 아닌데 싶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정리할 시간을 좀 갖고 싶었는데……. 무슨 정리냐 반문한다면 그게 또 뭔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겐 나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아무도 내게 조언도 충고도 하지 않는 그저 내 스스로만이 어떠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그런 시간이.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겐 여유롭게 정리할 시간이고 자시고 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뜻하지도 않았던 생일축하 인사를 쿤에게 받은 덕분에 날짜 감각을 되찾은 것까지는 좋다 이거다. 그런데 그 뒤로 하루하루 흘러가는 날짜를 세고 있자니 이제 곧 레니의 결혼식이 다가온 것이다.
"하아. 레니의 결혼식인데……."
앞으로 2주 후에 있을 레니의 결혼식을 생각하며 나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쿤은 이곳이 라이니 공국에 있는 네랜 백작 영지라고 말해주었다. 강을 끼고 있어 토지가 매우 비옥하고 농작물이 풍부한 곳이라고. 그러면서 세계지도를 가지고 와 네랜 백작 가(家)와 루벤스 제국의 루노를 손가락으로 쭉 이어 대충 거리를 가늠해 볼 수 있도록 보여주었다.
"생각보다 먼데?"
쿤은 내게 네랜 백작 영지에서 루노까지의 거리는 루노에서부터 같은 루벤스 제국 내에 있는 가랑 영지로 가는 것보다 가깝다고 말했었다.
"지도로 보기에 거리는 꽤 먼 것 같지만 중간에 산맥이라든가 다른 강을 끼고 있지 않아서 돌아갈 필요가 없거든. 그런 의미로 보기보다 가깝다고 말한 거야."
"그래? 그럼 시간은 대충 어느 정도 걸리는데?"
"그러니까……, 말을 타면 일주일 정도? 숙련도에 따라 더 걸릴 수도 있고 덜 걸릴 수도 있겠지만."
"말을 타고 일주일? 나 말 못타. 타본 적이 없어. 그럼 마법을 사용하면?"
"이동 마법을 사용한다면 거리는 무색해지겠지. 아주 비싼 최고급 마법석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하에서라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왔다 갔다 할 수 있을 테니까. 너도 경험해 봐서 알잖아."
그렇게 말하며 쿤은 나를 보고 웃었다. 그 웃음에 나도 덩달아 웃어 보였다. 그러고 보면 나 역시도 단숨에 이곳으로 오지 않았던가. 마법은 정말 대단한 거구나 싶다.
"말을 타고 일주일이라. 그럼 마차는 훨씬 더 오래 걸리겠네."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래서 고민에 빠진 것이다. 나는 말을 탈줄 모른다. 타본 적도 없고 배워본 적도 없다. 그렇다면 루벤스 제국으로 가기 위해선 아무래도 마차를 타는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여자 혼자서 그 먼 거리를 이동하기에는 너무 위험하지 않겠는가. 흠, 그래. 호위해줄 사람을 고용해야겠지. 몇 명이나 필요하려나? 물론 마부도 고용해야 할 거고. 비용은 왕복으로 계산해서 줘야 하는 건가? 계산은 어떻게 해야 하지? 미리 요금의 반을 주고 나머지는 도착해서 준다고 해도 될까?
머리가 아프다.
뜬금없는 이곳에 오고 난 후 벌써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 한 달 동안 쿤은 매일같이 나를 찾아와주었다. 그는 필요한 물건은 없는지 꼬박꼬박 물어봐주었고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사다주었다. 드레스 판돈이 아직 떨어지지 않았냐고 부족하지 않느냐는 내 말에 쿤은 매번 이렇게 말했다. 아직 돈이 남았노라고. 그것도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남아있다고.
믿을 수 없어. 거짓말.
매번 괜찮다고 말하는 쿤의 성격을 잘 알기에 나는 의심스런 눈초리를 지울 수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 쳐다보자 쿤은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며
'정말이야, 거짓말 아냐.'
라고 했다. 꽤 단호하게 말했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아는 쿤이라면 아예 입을 다물지언정 거짓을 말할 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참, 이집을 사겠다는 사람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냐고도 물었었지. 쿤은 아직 없다고 말했다. 역시나 이 말을 들었을 때도 나는 굉장히 수상하다는 눈빛으로 쿤을 보아서 쿤이 제발 자기 말 좀 믿어달라고 내게 사정했더랬다. 하지만 나는 믿고 싶어도 왠지 믿지 못하겠다고 응수해 쿤이 민망한 웃음을 지어야 했다.
쿤은 저녁도 늘 나와 함께 먹었다. 내가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지금도 쿤은 나와 같이 저녁을 먹고 있다.
"매일 이렇게 저녁 안 먹어줘도 된다니까. 식구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거 아냐?"
"뭘 이상하게 생각해?"
"그도 그렇잖아. 내가 오기 전에는 식구들과 저녁을 먹었을 테니까."
"음."
긍정을 표하는 낮은 소리에 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상하게까지는 아니어도 뭔가 수상해보이기는 하겠지. 그도 그럴 것이 매일 같이 식구들과 저녁을 하던 아들이 어느 날부터 갑자기 저녁을 하고 왔다면 말이다. 그것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무려 한 달 동안이나.
"괜찮아."
내 걱정스런 표정에 쿤이 중얼거렸다.
"나야 말로 괜찮아. 매일 이렇게 같이 안 있어줘도 돼. 어린애도 아니고. 그냥 가끔 한 번씩 심심하다고 칭얼거릴 때, 그때 같이 놀아주라, 응?"
"……가끔 한 번씩은 너무 적어."
"응?"
"매일 저녁도 부족하단 말야."
"응?"
어리광부리듯 말하는 그 넋두리 같은 속삭임에 당황도 잠시. 그런 말이 듣기 싫진 않았기에 나는 그저 피식 웃었다. 내 기억 속에서 항상 어른스럽기만 했던 쿤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건지.
"아아. 내가 속았지, 내가 속았어. 이렇게 뺀질거리는 남자를 그렇게 어른스럽게 생각했었다니 말이야."
억울함을 담아 장난스럽게 말하자 쿤이 빙그레 미소 짓는다.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는데, 난 단 한 번도 부러 어른스럽게 군적은 없다고."
"그게 어른스러운 게 아니면 대체 뭐니?"
쿤의 변명 아닌 변명에 어이가 없어진다. 세상에 맙소사. 지금 얘가 뭐라고 한 거지? 네가 어른스럽게 군 적이 없다고? 그럼 넌 태어나면서부터 노인네였단 소리야?
"이상한 생각하고 있구나. 딱히 어른스럽게 굴었던 것이 아니라 긴장이 많이 해서 몸이 굳은 거야. 네 앞에만 서면 너무 떨렸으니까."
"헐."
"바보."
그렇게 말하는 쿤의 눈동자는 장난으로 반짝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부담 없이 웃어넘길 수 있었다.
저녁을 먹고 우리는 거실소파에 앉았다. 처음에 마냥 썰렁해보였던 거실은 사람의 손을 타자 조금씩 온기 있는 곳으로 바뀌었다. 이래서 사람이 머무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은 다른 거라고 하나 보다. 아무리 화려하고 아름다운 집이라 해도 사람의 온기가 없으면 따뜻하지 않은 것처럼.
후식으로 내어놓은 꽃차를 홀짝거리며 나는 그 향에 만족스런 신음을 내뱉었다. 향긋함이 일품이다.
"……돌아갈 거야?"
"음?"
"……꼭?"
"……."
꽃차의 향기에 취해 그 맛을 음미하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던 나는 쿤의 목소리에 가까스로 상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쿤의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하지만 평소와 다르기도 했다.
"꼭 돌아가야 해?"
그렇게 묻는 쿤의 목소리는 그다지 무겁지 않았다. 그 질문에 나는 곰곰이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사실 정리하고 말 것도 없었다. 뭘 정리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는데 결론 따윌 낼 수 있을 리가 없지.
"음, 솔직히 말해서……, 잘 모르겠어. 언젠가는 그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갈 거라고 계획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런데 막상 이렇게 되고 보니 내가 정말 그곳을 떠나고 싶어 했던 건지도 의심 돼……. 한심하게도……."
"……."
"하하. 일단 변명거리는 만들어 놨어. 날 위한 변명거리."
"변명거리?"
"응. 돌아가면 비참해질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누군가 나한테 왜 돌아왔냐고 물으면 답할 변경거리를 만들어 놨지. 친한 친구의 결혼식이라 어쩔 수 없이 돌아왔다고."
"……레니라고, 그랬나?"
"아, 응. 원래는 레니아라고 해. 나는 그냥 레니라고 부르지만."
레니의 결혼식 이야기는 전에 쿤에게도 해준 적이 있었다. 처음 루노까지 돌아가는데 얼마나 걸리는지 물어보았을 때. 그때 나는 레니의 성을 빼고 이름만 알려주었었다.
"그럼 그 친구 결혼식에만 참여하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도 되잖아. 안 그래? 누가 너한테 왜 다시 돌아왔냐는 둥 그런 말을 할런지 몰라도 만약 그 말을 듣고 그곳을 떠나고 싶다면 얼마든지 다시 여기로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