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40 회: # 9 -- >
"그곳에서 정말 기적같이 널 발견했지."
"……."
강변, 바위. 내가 어떻게 그곳에 있었을까? 도무지 모르겠다. 난 분명 노르젠 후작영애의 마법에…….
"……."
아, 그만. 지금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일단 덮어두자. 이어지려는 생각을 재빨리 멈추고 난 쿤의 말에 집중하려 애썼다.
"처음엔 인언 줄 알았어."
"아, 인어."
"놀리지 마. 정말 그랬어. 바위 틈 사이가 교묘하게 엇갈려 있어 낮이었어도 사람들의 시선에 잘 닿지 못했을 거야. 아마 못보고 지나쳤을지도 모르고. 그런 곳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척이나 놀랐던 것 같아. 물론 그 사람이 너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고 말야. 그런데 얼굴을 보니 바로 알겠더라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그때 당시의 놀람과 흥분이 지금 쿤의 얼굴 위로 생생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런 얼굴에는 나를 다시 만난 기쁨과 걱정이 동시에 배어 있었다.
"네가 걱정하는 것이 그것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무에게도 네 얘길 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할 생각 없고."
"……."
"여긴 우리 가족이 이사 가고난 후에 팔려고 내놓은 집이야. 그리고 보다시피 아직 사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비어있는 상태지. 그러니까 편하게 지내도 돼."
"고, 고마워."
속삭이며 내가 고마움을 표했다. 이런 배려, 따뜻함. 정말 고맙다. 하지만 그런 따뜻한 배려에 나는 보답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자 우울해졌다. 그러다 아직 그에게 건네주지 않은 드레스에 생각이 미쳤다. 그나마 경제적인 면에서는 보답할 수 있는 것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재빨리 드레스를 들어 쿤에게 넘겨주었다.
"쿤, 이거 받아."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 단호한 손길로 귀에 건 에메랄드 귀걸이도 빼내어 쿤에게 넘겨주었다.
이 귀걸이는 가장 아끼는 거지만, 어쩔 수 없지.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성격에 목걸이라든가 반지라든가 팔찌 등등 다른 장신구를 하지 않은 것이 이렇게 아쉬울 수가 없다. 그나마 한 가지 위안이라면 이 에메랄드 귀걸이는 상당한 고가의 물건이라는 것 정도.
하긴, 당신이 사준 것 중에 귀하지 않은 물건이 있던가.
하지만 그가 준 물건 중에서도 이 귀걸이는 더더욱 값진 물건이었다는 걸 안다. 뷰티크 마담이 손을 벌벌 떨어가면서 건네주던 모습을 떠올리며 나는 피식 웃었다. 이거라도 있어 다행이다, 정말. 그의 눈동자와 닮았다는 이유 하나로 계속 끼고 다녔던 것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는데.
뮤.
그 남자를 떠올리자 아릿한 통증이 가슴 한 구석에서 아지랑이처럼 일렁이었다.
당신은 날 걱정이나 할까? 조금이라도 내 생각을 하고 있어? 내 생일이라는데, 오늘이 내 생일이라는데 당신은 무얼 하고 있나? 응? 당신은 내가 없어진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지? 날 위해 화를 내준다면, 조금이라도 내준다면 좋겠다. 그게 아니라도 걱정이라도 해준다면 좋겠다. 바보 같은 계집이라 욕하고 그냥 잊어버리지만 말아줬음 좋겠다.
"……."
바보 같은 유니시이나. 그가 네 생각 따윌 해줄 것 같니?
지저분하게 흔들리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고 나는 괜찮은 척 단단하게 숨을 고르며 쿤에게 활짝 웃어보였다.
"자, 받아."
"그게 뭐야?"
"뭐긴 뭐야, 드레스지, 바보. 있잖아, 쿤. 이 드레스가 심플한 것처럼 보이지만 원단이 최고급이다? 팔면 제법 돈이 짭짤할 거야. 그리고 이 귀걸이. 이 원석 좀 봐. 상태 굉장히 좋지? 이거 최상급이래. 그리고 내가 알기로는 마법이 걸려있어서 해독도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그러더라. 이 귀걸이는 무지 비싼 거니까 좋은 값을 받을 수 있을 거야. 어른 받아. 빨리, 응?"
"……."
"괜히 나 때문에 무리하지 말고. 이거라도 너 가지라고."
그렇게 말하며 귀걸이를 드레스 위에 올려 한꺼번에 쿤에게 내밀어댔다. 가만히 날 쳐다보고 있기만 한 쿤의 행동이 답답해 빨리 받으라며 재촉까지 해댔지만 쿤은 내 손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내 얼굴만 바라볼 뿐이다. 방금 전까지 화기애애하게 웃고 있던 때와는 사뭇 다른 가라앉은 분위기에 어리둥절해졌다.
"쿤?"
"유나."
쿤과 내가 동시에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딱히 할 이야기가 있어 쿤을 부른 것이 아니다. 그저 갑작스레 가라앉은 그의 행동과 눈빛이 의아해 부른 것뿐. 하지만 그런 나와 달리 쿤은 내게 무척이나 할 말이 많은 얼굴이었다. 나는 어서 말해보라는 듯 시선을 깜빡거려댔다.
"유나."
"응?"
한참을 망설이던 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연 것은 기다림에 조금 지쳐 있을 때였다. 그런데 어쩐지 쿤의 목소리가 어렸을 적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 때 타이르던 그때의 그것과 비슷하다.
"유나, 이런 거 필요 없어."
"그래도 받아. 나 때문에 네가 곤란해지는 건 싫단 말야."
"이 정도 돈 쓸 걸로 내가 곤란해지지 않아."
"앞으로 얼마나 더 신세를 져야 할지도 모르는데 무턱대고 다 받을 순 없잖아. 안 그래? 그러니까 받아."
"유나야."
쿤의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또 단호하기도 했다. 그의 정직한 눈빛은 내가 내민 이것들을 정말로 원하지 않는다 그리 말하고 있었다. 그 단단한 눈빛에 어깨에 힘이 절로 빠진다.
왜 받지 않으려 하는 걸까? 왜 나를 무력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거지?
내가 아는 쿤이라면, 내가 알고 있던 쿤이라면, 어렸을 적과 변함없는 쿤이라면 그리고 저런 눈빛의 쿤이라면 그는 절대 그의 의견을 굽히려 들지 않을 것이다. 정말 받지 않으려 하겠지. 내가 억지로 떠안긴다 해도 그대로 놓고 나갈 사람이다. 어떻게든 그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던 나는 쿤의 단호한 거절에 절로 기분이 가라앉았다.
"네게 신세를 져야 하는 내 마음을 헤아려 받아줄 수는 없는 거야?"
마냥 받기만 할 수는 없잖아, 안 그래? 사실 이걸 주는 건 내가 편해지고 싶어서다. 나를 위해서다. 너를 위한 것만은 아니라고.
나는 받아주기를, 쿤은 거절을, 우리는 사뭇 다른 생각을 가지고 서로를 마냥 쳐다보았다.
그러다 쿤이 길게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불편해져버린 침묵을 깨트렸다. 그 한숨에 담긴 어쩔 수 없다는 포기의 기색에 나는 반색했다.
"받을 거지?"
"내가 너에게 무언가를 해주는 것에 대해서 그것을 '신세'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되잖아. 안 그래?"
"소꿉친구였다는 이유만으로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받았으니까 하는 말이잖아. 난 널 다시 만난 것만으로도 좋아."
"……."
"널 위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 받는다고 생각해. 그럼 너도 한결 편하겠지. 안 그래?"
"……."
"있잖아, 쿤. 나는 더 이상 누군가에게 짐만 되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아. 그건 정말 싫은 기분이거든. 그러니까 내가 그런 무기력함을 느끼지 않을 수 있도록 해줘. 응?"
"……."
제법 절절한 목소리가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쿤에게선 별 말이 없었다. 나는 최대한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려 애쓰며 쿤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만약 네가 내게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 하면 나는 이것들을 내 맘대로 아무렇게나 팔아 버릴 거야. 그리고 판돈으로 오늘 네가 사온 물건 값을 지불할 거고."
"고집은 여전해."
쿤의 평가에 나는 방긋 웃었다.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이곳에 머무를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머무는 동안의 생활비는 내가 내고 싶어. 네게 부담만 주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고."
"그러니까 부담이 아니라고."
쿤이 작게 항의했지만 난 못들은 척 했다.
"그리고 여기가 너네 집이라고 했지? 집세도 낼게."
"하아."
쿤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나는 야무지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내뱉은 말이었지만 내뱉고 보니 그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뿌듯해 하는 나와는 반대로 쿤은 어쩐지 씁쓸한 얼굴이었다.
"알았어. 받을게."
"잘 생각했어."
결국 쿤이 백기를 들었다.
쿤의 백기에 그제야 나는 활짝 웃었다. 쿤의 단정한 얼굴 위로 체념의 미소가 떠오른다. 그 미소는 어쩐지 서글퍼 보이기까지 해서 왠지 내가 잘못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나는 내 생각이 전적으로 옳다 확신하기에 미안해도 내 고집을 밀어붙이기로 했다. 활짝 웃으며 기분 좋아라 웃고 있는 내게 쿤이 말했다.
"대신 집세는 안 받아."
"왜?"
"그리고."
강하게 항의하려는 내 말을 막고 쿤이 말을 잇는다.
"드레스만 받을 거야."
"드레스만?"
"그래. 드레스만."
"왜?"
"네가 말한 대로 이건 최고급 원단이 맞거든. 이 드레스만 팔아도 제법 괜찮은 가격이 나올 게 분명해. 몇 달은 충분히 놀고먹으며 생활할 수 있을 만큼 말이지. 그러니까 그 귀걸이까지 지금 팔 필요는 없어."
마치 나를 설득하듯 쿤이 조근조근 설명한다. 쿤의 말에 나는 반짝이는 에메랄드 귀걸이를 내려다보았다.
에메랄드, 에메랄드. 눈빛. 아름다운 사람. 뮤…….
"……."
보고 싶다. 당신이, 무척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