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39 회: # 9 -- >
장난스럽게 양념이 잘 칠해진 고기를 가리키며 말하자 쿤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조심해서 먹으라고 말하려던 참이었어. 그래도 이틀 동안 기절해 있던 거 치고는 상태가 생각보다 괜찮은 듯 보여 다행이야."
"아아. 그러게. 몸은 생각보다는 훨씬 괜찮아. 정말로."
원래대로라면 한참을 골골거렸어야 정상인데. 조금은 건강해진 건가?
그냥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깊게 생각해봐야 모르는 건 모르는 거니까.
따뜻하게 데워진 수프와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빵 그리고 잘 구워진 고기가 그럴싸하게 테이블 위에 차려졌다. 고기까지 사올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정말 이 정도면 진수성찬이 아닌가. 혹은 생각지도 못했던 만찬이라고나 할까.
내가 자리에 앉고 쿤이 내 맞은편에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방긋 웃으며 어렸을 때 엄마 아빠한테 그랬던 것처럼 쿤에게 말해보았다. 그러자 쿤이 작게 쿡쿡 웃었다.
어렸을 때 우리 집에서 같이 밥을 먹었던 쿤이, 그때 그가 말했던 것처럼 속삭였다. 그래서 이번엔 내가 쿡쿡거리며 웃어댔다. 정말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 그 느낌을 비단 나만 받았던 것이 아니었는지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며 개구쟁이처럼 웃어댔다.
"어서 먹어봐."
"응."
그렇게 한참을 웃고 난 후, 애써 데운 수프가 식어버릴 것 같은지 쿤이 재빨리 내 손에 숟가락을 쥐어주었다. 나는 모락모락 김이 나는 수프를 후후 입바람으로 식혀가며 조심스럽게 한 입 떠먹었다.
"음."
"어때? 괜찮아?"
오랫동안 공복이었던 배에 음식이 들어가자 신기하게도 그 음식의 경로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따뜻한 수프의 기운이 지나가는 몸속의 기관들을 콕콕 찔러대는 기분이랄까.
"먹을 수 있겠어?"
"음~, 응. 괜찮아."
"정말?"
"정말. 걱정 마. 생각보다 더 잘 먹히고 있으니까."
안심하라는 듯 웃으며 다시 한 번 수프를 떠 먹어보자 그제야 쿤이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다. 그 뒤로도 몇 번 더 수프가 몸속으로 들어가자 어색한 듯 음식의 기운을 밀어내려던 몸이 어느새 곧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너도 얼른 먹어. 응?"
"그래."
내 재촉에 그제야 쿤이 수저를 들었다. 그리고 한 스푼 떠먹다가 아! 하더니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본다.
"응?"
왜 그래? 이유를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내 얼굴에 애매한 미소만 흘리던 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갑작스런 쿤의 행동에 숟가락을 든 채 가만히 쿤의 행동을 쫓아 시선을 움직였다.
"쿤?"
자리에서 일어난 쿤은 밖으로 나가려는 듯 보였다. 뭔가 두고 온 것이 있나 싶어 덩달아 일어서려던 나를 쿤이 재빨리 막아서며 고개를 젓는다.
"아니야, 너는 앉아있어. 응? 너는 수프를 먹고 있어."
"그렇지만 뭐 두고 온 거 아냐?"
"두고 온 건 맞지만 나 혼자 갔다 와도 돼. 너까지 나올 필욘 없어."
"밖으로 나갈 거야?"
"아니, 거실에."
"대체 뭔데 그래?"
"별거 아니야. 금방 가져올게. 그러니까 너는 여기 있어. 괜히 힘들게 움직이지 마."
거실에 잠깐 갔다 온다고 무리될 건 하나 없었지만 사실 쿤도 한 고집한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자리에 앉아야 했다. 하지만 혼자 먹는 것은 싫어서 수저는 그대로 내려놓았다. 거실로 나간 쿤은 내가 앉은 자리에서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몸을 숨기더니 그곳에서 뭔가를 부스럭 거려댔다. 아무래도 먹으려고 사온 것 중 깜박 잊고 꺼내지 않은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바보, 쿤. 그냥 내일 먹어도 되는데. 어차피 지금 차린 것도 다 못 먹을 것 같고.
다소 심드렁한 기분이 되어 그냥 와도 된다 말하려는 그 순간, 어느새 준비를 마치고 다시 돌아온 쿤이 내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 전에 나는 그대로 얼어붙어버렸다.
"유나."
그 부름에 눈동자만 굴려 쿤을 쳐다본다. 불빛으로 인해 쿤의 얼굴이 무척이나 환해 보였다. 아아, 타오르는 선명한 불꽃들, 그 불꽃이 내뿜는 빛을 받으며 쿤의 머릿결이 반짝거려대고 있다.
"유나."
"……."
"유나야, 생일 축하해."
"……맙소사."
그랬다. 쿤이 들고 있던 건 바로 케이크였던 것이다.
내 생일이었구나. 오늘이 내 생일이었어. 기절해 있던 탓인지 시간을 알 수 없었다. 날짜 감각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었으니까. 오늘이 내 생일이었는지는 정말로 몰랐다.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 생일이 있었다는 것조차 까맣게 잊고 있기도 했었고.
안 그래도 쿤에게 오늘이 며칠인지 물어보려고 했었는데……. 그런데 오늘이 내 생일이었을 줄이야. 쿤은 내가 이틀 동안 기절해 있었다고 했지만 계산해보면 시간은 마지막의 기억으로부터 5일이 지나있었다.
"생일 축하해, 유나야."
아, 눈물이 차오르려 한다. 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 눈물을 꾹 참고 나는 애써 웃었다.
"고, 고마워, 쿤."
하지만 먹먹해져버린 목소리는 감출 길이 없었다.
"노래라도 불러줄까?"
"창피해. 부르지 마."
진짜로 노래를 부르려는 듯 입을 벙긋거려대는 쿤 때문에 나는 황급히 쿤을 말려야 했다.
"어, 어떻게 기억하고 있었어? 응? 어떻게 아직까지 내 생일을 기억하고 있는 거야? 믿기지가 않아."
"그야 너에 대한 것이라면 하나도 잊은 게 없으니까."
"거짓말."
"거짓말 아니야. 진짜야."
그리 말하는 쿤의 눈동자는 진실했다. 정말 나에 대한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는 듯이 반짝인다. 나는 기뻤다. 예전의 내 모습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나는 무척이나 기뻤다.
"18살이 되었구나. 이젠 정말 다 컸네."
"하. 웃겨."
마치 오빠가 어린 동생에게 말하듯 기특해하는 쿤의 목소리에 기분이 좋으면서도 퉁명스레 대꾸한다.
"예쁘다."
일렁이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정확히 18개가 꽂혀있는 초들이 내 눈 바로 앞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랬다. 나는 이제 18살이 되었다.
"얼른. 응?"
어서 빨리 촛불을 끄라는 듯 쿤이 케이크를 내 입 바로 앞까지 밀어댔다. 파티에 신이 난 어린아이가 어쩌지 못하고 엉덩이를 들썩이는 것처럼 안절부절 못하는 그 모양새를 지켜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풋."
"웃지 말고. 어서 촛불 끄라니까?"
"알았어, 알았어. 그만 재촉해."
나는 볼에 공기를 가득 집어넣고 후~ 바람을 크게 불었다. 불꽃은 하나도 남김없이 바람결에 사그라졌다. 무려 8년 만에 꺼보는 생일 촛불이었다. 그 동안 내 생일을 이런 식으로 축하해주었던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생일 축하해. 정말. 아주 많이."
어렸을 때와 같이 하지만 그때보다는 성숙해진 쿤이 내게 제법 의젓하게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
그 어른스러움에 나 역시도 어른스럽게 대꾸해주었다. 너만 컸는지 아니? 나도 컸단다. 뽐내는 내 모습이 웃겨 웃음을 터트리자 쿤이 마주 웃어준다.
"아, 정말 고마워. 진짜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오늘이 내 생일인 줄도 몰랐어, 정말.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
"나도 믿기지가 않아."
"응?"
"네 생일을 다시 너와 보낼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거든."
잠시 우리 사이에 고요한 정적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건 어색해서라기 보단 서로가 이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지금 이 상황에 대한 놀라움 때문이다.
"내가……."
"응?"
"내가 여기 있는 거, 다른 사람한테 말했니?"
아, 이 말은 나중에, 아주 나중에 물어보려고 했는데. 어느 정도 내 마음을 추스르고 의젓한 유니시이나로 보일 수 있을 자신이 생겼을 때, 그 때 물어보려 했는데. 결국 이렇게 묻고야 마는 구나.
물끄러미 날 쳐다보던 쿤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짧게 답하곤 재빨리 말을 이었다.
"스소룬 강변에서 널 발견한건, 그래 그건 정말 우연이었어. 여기서 그곳까지는 아주 가깝지만 그 늦은 시간에 강변에 놀러가는 사람은 없거든. 그날 널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상상만 해도 무섭다."
"늦은 시간?"
"저녁에 널 발견했으니까."
"피식. 넌 그 시간에 뭐 하러 온 건데?"
"배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거든."
"배?"
"그건 나중에 말해줄게."
장난스런 쿤의 말에 나는 그냥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기다리고 있는 물건이 도착해야 할 시간이 되었는데도 도착하지 않아서 직접 그곳에 가 있었어. 그런데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오지 않는 거야. 바위 언덕에라도 올라가면 저 멀리 불빛이라도 보일까 해서 올랐는데 바위 틈 사이에 뭐가 있더라고."
거기까지 말한 쿤은 그날의 일을 회상하는 듯 얼굴이 조금 상기되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