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36 회: # 9 -- >
깜빡깜빡.
눈을 떴다.
"……."
눈을 떴다……라. 왠지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때 죽는 줄 알았기 때문에. 마지막이라 생각했었기 때문에. 다시 눈을 뜰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래서일까? 오히려 멀쩡히 눈을 뜬 지금 이 상황이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나는 누워있었다. 낯선 천장이 제일 먼저 보인다. 낯설다? 그래, 낯설다. 이곳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랬다. 눈에 익숙한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대체 여기가 어디람? 모르겠다. 맹세코 생전 처음 보는 장소에 나는 누워있었다.
몸은 괜찮은 건가? 가만가만히 손에 힘을 줘보고 발에도 힘을 줘보았다. 다행이 몸을 움직이는 데는 아무 문제도 없는 것 같다. 음, 일단은. 몸 여기저기가 조금 욱신거리기는 했지만 그것만 빼고는 아주 양호한 상태였다.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는 어디지?
이곳은 분명 '방'이다. 누군가의 방. 혹은 누군가가 사용했던 방. 그게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귀족이 아니라는 것만을 알겠다. 방은 작았다. 공작성에서 내가 썼던 방의 크기나 별장에서 사용했던 방보다 훨씬 작고 투박한. 하지만 구석구석 사람의 손길이 묻어나 있는 따뜻한 곳이기도 했다. 고급스러움과는 거리가 머나 깨끗이 정돈된 침대에 나는 앉아있었다.
한참을 멍하니 앉아 지끈거리는 머리를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곧 굴러가기 시작한 두뇌는 제일 마지막 기억을 따라 거슬러 올라갔다.
제일 마지막 기억은 스잔나 노르젠 영애. 그리고 울고 있던 라니…….
라니, 라니, 라니…….
하아.
그런데 여기는 어디지? 여기는 어디고 나는 왜 여기 있는 걸까? 대체 일이 어떻게 된 거지? 라니는, 라니는 아직도 울고 있나?
끔직한 질문의 파도타기에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는지 모르겠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목에 무언가가 막힌 것 마냥 목소리를 내기 어려워서.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딱히 대답 같은 걸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스스로조차 의미를 알 수 없는 눈으로 그저 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달칵. 문이 열렸다. 문을 두드린 사람도 딱히 대답 같은 것을 바라지 않았던지 문은 거침없이 열렸다. 아무래도 내가 잠들어 있을 거라 여긴 모양이다.
누가 들어와도 나는 놀라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저 문을 열고 들어온 이가 스잔나 노르젠 후작영애라 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
하지만 나는 놀라버렸다. 아니 놀라야 했다. 어떻게 저 사람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있을까. 절로 눈이 커다랗게 뜨여지고 호흡이 멈춰진다.
아,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떻게, 어떻게 네가 여기 있지? 어떻게 네가 내 앞에 나타날 수 있니? 어떻게 우리가 이리 다시 만나? 너와 다시 만나는 건 꿈에서 조차 상상하지 못했던 일인데. 잊었다 생각했지만 첫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깨어났네."
저 다정한 말투.
"이틀 동안 잠만 잤어. 아니, 기절했다고 해야 하나?"
저 다정한 웃음.
"오랜만이지?"
저 다정한 눈빛.
"유나."
저 다정한 목소리.
"보고 싶었어."
"……쿤."
쿤이었다. 다정한 나의 쿤.
그동안 희미해졌다고 생각했던 얼굴이 순식간에 선명해졌다. 그동안 단 한 번도 헤어졌던 적이 없었다는 듯, 나는 바로 그를 알아보았다.
아아, 그래. 바로 이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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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놀랐기 때문에 쉬이 믿기지가 않아서 혹은 지금 쿤을 보고 있는 이 순간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너무 놀라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는 나를 보며 쿤이 말갛게 웃었다.
"많이 놀랐어?"
"으, 응."
"쿡쿡. 그래. 하지만 나보다 더 놀랐을까? 스소룬 강변에 쓰러져 있던 널 봤을 땐, 내가 미친 게 아닌가 하고 의심했었어."
"스소룬 강변?"
그게 뭐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강변이라고 했으니 스소룬은 강 이름이겠지. 그런데 그런 강도 있었나? 고개를 갸우뚱 거리고 있는 내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쿤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넌 예전 그대로구나."
"응?"
"늘 상상했던 그대로."
"……."
아, 이 아련함. 마치 돌아간 것 같다. 우리가 손 붙잡고 놀았던 어렸을 적 그때로. 눈앞에 펼쳐진 행복이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여겼었던 바로 그 때로 말이다.
"쿤……."
내 인생에서 가장 따뜻했고 가장 찬란했던 시절, 그 행복의 한 부분을 멋지게 장식했던 이가 지금 내 앞에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 눈앞에 쿤이 서 있다는 사실이.
하지만 그 모든 아름다움이 꿈이 아니었노라고, 정말 존재했었던 나날이었다고 말해주듯 쿤은 웃고 있었다. 이 생생함은 분명 틀림없는 현실일 테지.
"유나?"
"흑."
그래, 난 정말 행복했었구나. 내가 사랑받았다는 믿음은 꿈 따위가 아니었어.
쿤은 내 행복의 일부였다. 쿤, 내가 널 얼마나 많이 그렸는지 떠올렸는지 말한다면 너는 웃을까? 하지만 지금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보고 싶었다는 말도, 네가 참 그리웠다는 말도. 그저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이 모든 것을 꽁꽁 묶어대듯 나를 옭아매었다.
"흑."
"유나."
다정하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
<유나.>
그 옛날 나를 부르는 그 어린 쿤의 목소리와 겹쳐져 들려와 나는 울컥 치솟은 눈물을 그대로 흘려보내야 했다. 막을 수가 없었다.
"말도……안 돼."
"유나."
"어떻게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있을 수 있지?"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믿을 수 없다. 아니 믿기 힘들다. 내가 아니라 그 누구였다 하더라도 그랬을 것이다.
"이게 대체, 대체 어떻게……."
"유나."
허공을 방황하듯 허우적거리는 내 손을 쿤이 잡아왔다. 여전히 따뜻한 손이다. 그 온기를 잃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나도 쿤의 손을 마주 잡았다.
"쿤, 어떻게 네가 내 앞에 나타날 수가 있어? 어떻게? 응? 대체 무슨 일이야? 넌 알아?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야?"
"나도 몰라."
쿤이 내 손을 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 동작 하나하나가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그제야 난 깨달았다.
아, 넌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구나.
그대로인 건 내가 아니라 너다. 너야 말로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쿤의 손길에는 늘 다정함이 묻어나왔다. 그 다정함은 무척이나 향기로운 것이었다.
"네가 기적이라고 말했듯이 네가 내 앞에 나타난 것 역시 기적이야. 난 단 한순간도 너를 잊었던 적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쿤이 웃었다. 어느새 자라 커다래진 품 안으로 나를 안아주었다. 벌벌 떨고 있는 내 몸을 어르고 달래주듯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내 귓가에 끊임없이 속삭여주었다.
나는 너를 단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어, 유나.
그 품에 안겨 나는 울고, 울고 또 울었다. 아주 많이 울었다. 왜 우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계속해서 울어댔다.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 걸까? 뭐가 그리 이리 서러워 우나. 단순히 쿤을 만나 기뻐서 우는 걸까 아니면 지난 시간이 힘겨워 우는 걸까? 하지만 눈물이 계속해서 나왔다. 오래 전, 엄마 아빠를 잃었을 때 울었던 그날처럼 크게 아주 크게 나는 울었다.
쿤은 내 모든 울음을 받아주었다. 왜 이렇게 우느냐고, 뭐가 그리 힘들었느냐고 물을 법도 했지만 하지만 쿤은 그 무엇도 묻지 않았다. 그저 맘껏 울라고 등을 쓰다듬어 주고 또 쓰다듬어 주었다.
그랬다. 쿤은 묻지 않았다. 이런 점도 그는 어렸을 때와 달라지지 않았다. 쿤만의 배려는 너무나도 다정한 것이어서 둔한 나조차도 그것을 모를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내게 엄청난 위안을 가져다주었다. 아직 변하지 않은 소중한 것이 있다. 그건 찢겨져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소중한 시절의 페이지를 우연히 되찾은 것 마냥 내게 큰 기쁨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동시에 슬프기도 했다.
아, 넌 그대로구나. 넌 그대로야. 다행이다. 너무 기뻐. 하지만 쿤, 나는 너무 많이 변해버렸어. 나는 너무 많아 변해버려서 네가 아닌 다른 아이들이 지금의 날 봤다면 전혀 몰라봤을 거야. 나는 어떻게 해도 전처럼은 돌아갈 수 없게 되었는데 너는 한결같이 우뚝 선채 그리운 모든 것을 담고 있구나. 나는 변했지만 너라도 그대로여서 참 고마워. 너는 그대로인데 나는 변해버려서 미안해. 미안해, 고마워. 상반된 두 가지 마음이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과 함께 넘쳐댔다.
너무 울었던 걸까? 이틀 동안의 기절과 갑작스런 오열에 결국 몸이 견뎌내지 못했던 모양이다. 쿤의 가슴에 안겨 울던 그대로 나는 어느새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방안에는 처음 눈을 떴을 때와 마찬가지로 나 혼자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쿤이 무슨 강변이었더라, 어쨌든 강변에 쓰러져 있던 날 발견했고 그 뒤로도 내가 이틀 동안 기절해 있었다고 했지. 그렇다면 최소 그날로부터 이틀은 지난 셈이다. 아직 그것 외에 나는 쿤에게서 그 어떤 것도 듣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쿤을 보자마자 바로 울어버리지 않았나. 그리고 기절하듯 또 잠들었고. 난 또 얼마 만에 일어난 걸가? 오늘이 며칠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