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35 회: # 9 -- >
"그렇다면 진실을 알게 된다 해도, 그 진실이 밝혀진다 해도 당신은 여전히 라니 영애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예?"
"모든 진실을 알게 되어도 당신은 지금처럼 라니 영애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전 그게 항상 궁금했답니다."
"그게 무슨……."
의아한 시선으로 노르젠 후작영애를 쳐다보았다. 진실? 무슨 진실? 무엇에 대한 진실? 갑작스런 진실 타령에 어리둥절해진다. 재촉하여 대체 무슨 말이냐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눈빛엔 이제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눈빛은 이제 아무 것도 담지 않은 채 텅 비어 있었기 때문에. 방금 전까지 내비쳤던 이해하지 못할 나에 대한 애정조차도 더는 남아있지 않았다. 공허하고 텅 빈, 마치 죽음을 앞둔 그 눈빛에 심장이 불안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영애."
한걸음, 그녀에게 다가섰다. 내 의지로 그녀와의 거리를 한 폭 좁힌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그녀와 나의 거리는. 여기서 더 가까이, 나는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스잔나 노르젠 후작영애와 내가 서 있는 이 공간을 뒤덮고 있는 기묘하고도 불안정한 공기가 느릿느릿 하지만 분명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에 모든 공포를 일깨우듯 나를 몰아쳐대기 시작했다. 마치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것도 같고, 칼을 목에 두고 있는 것 같이 몸이 서늘해진다. 그 기묘함은 하염없이 위태로워 보이는 스잔나 노르젠 후작영애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미안해요."
그녀가 속삭이듯 흥얼거린다. 미안하다고. 나는 눈을 꾹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다. 이제 공기는 너무나도 무겁고 날카롭다. 그게 어느 정도냐 하면 나와 스잔나 노르젠 후작영애의 모든 것을 다 갈가리 찢어버릴 것 같다.
"라니 배롤린을 보면서, 그녀의 곁에 있는 당신을 보면서, 서로가 서로를 위해 우는 모습을 보면서."
"……."
"나는 어느새 꿈을 꿨지요. 내게도 당신과 같은 존재가 나타나 주기를-."
"……."
"이루지도 못할 꿈을 꿨답니다."
"여, 영애!"
"그거 아나요? 난 알브레히트 공작 따윈 관심도 없어. 내가 질투하는 대상은 그 남자 옆에 서 있는 당신이 아니라, 당신 옆에 서 있던 그 남자라는 걸.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겠지만."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낮은 웃음을 토해냈다. 재밌지 않느냐고 웃음 속에 뱉어진 그 말이 처량하게 떨려온다. 그 웃음을 바라보며 나는 가슴이 아팠다. 서글펐다. 그제야 알았다. 바보 같은 유니시이나, 이제야 깨달았다. 스잔나 노르젠 후작영애가 내게 바랐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아아, 영애는 미치도록 외로웠구나. 그 사무친 외로움 속에 혼자 미쳐갈 수밖에 없는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기지도 못할 만큼, 그녀는 외로이 홀로 선 자신을 추스르는 것만으로도 벅차해야 했구나.
"미안해요."
그녀가 다시 속삭였다.
한 걸음 더 가까이,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그런 나를 그녀가 멍하니 쳐다본다. 입가에 씁쓸한 조소를 머금는다.
"아아. 당신도……."
거절에 익숙하다는 그 목소리에 울컥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이 여자가 왜 하필 내게 와서 이런 어두움을 쏟아내는지 조금 원망스런 생각도 들었지만 하지만……. 하지만 그것을 냉정히 내칠 수만도 없었다.
그 때 저 멀리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그 구두소리에 나는 라니가 이곳으로 뛰어오고 있음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스잔나 노르젠 후작영애의 손에서 작은 빛 덩이가 생겨났다. 그것을 의아하게 바라볼 틈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 스잔나 노르젠 영애가 다시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의미를 알 수 없는 3번째 사과였다. 나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영애를 감싸 안은 어슴푸레한 공기는, 무척이나 아파보였다.
"배롤린 남작이 죽였어요. 당신의 부모님을."
"!"
호흡 사이로 흘러나오는 건 침묵이다. 이제 나는 그저 멍하니 내 앞에 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 손에서 만들어진 구형의 빛은 조금씩 커다래지고 있었다.
"당신 아버지가 일군 사업을 가로채기 위해 마차의 바퀴를 조작하라고 지시한 사람이 배롤론 남작이에요."
"유나!"
그와 동시에 라니가 응접실로 들어왔다. 얼마나 급하게 왔는지 머리가 다 헝클어져 있었다. 다급함과 초조함 그리고 불안과 걱정, 미안함, 분노. 거의 모든 표정이 라니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그렇게 당신의 행복을 모조리 파괴한 사람의 딸이 라니 배롤린 영애예요. 이제 당신은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네요. 대답해 봐요, 유니시이나 영애. 그래도 지금까지처럼 라니 영애를 사랑할 수 있겠어요?"
"……."
"그런가요?"
"아-아."
스잔나 노르젠 후작영애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알아챈 라니가 두 손으로 입을 막고 경악성을 내뱉어냈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불안함을 담고 흔들려대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알 수 있었다.
라니야, 너는 이미 알고 있었구나.
"유, 나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라니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내게 가까이 다가오려 했지만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듯 그저 떨고만 있었다. 두 눈에서 흘러넘치는 눈물을 고스란히 내 앞에 내보이며 그렇게 라니가 무너져 갔다. 그녀의 어깨를 짓눌렀던 아픔이 또 고스란히 드러났다.
"유나야, 유나야."
라니가 한걸음 내게 다가섰다. 고개를 마구 흔들어대며 이 상황을 부정하고 싶어 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웃었다. 비웃음은 절대 아니다. 나는 그저 이 모든 것이 슬펐을 뿐이다. 우는 라니의 얼굴을 보고도 차마 눈물조차 나오지 않을 만큼, 나는 슬펐다. 아팠다. 힘들었다.
"미안해요, 영애."
스잔나 노르젠 후작영애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엔 누구에게 한 사과인지 분명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한결같이 진심이 담겨있었다.
"잘못했어, 잘못했어, 유나야 내가 잘못했어. 잘못했어, 잘못했어, 잘못했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속이려던 게 아니야. 정말 아니야.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결국 라니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사정하듯 내게 용서를 빌었다. 처참하게 무너지는 라니의 모습이 내게 아프지 않을 리 없었다. 나는 그만 일어나라고 울지 말라고 얘기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미안해요."
후작 영애가 다시 한 번 미안해요, 라고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녀의 손 위에서 생성되었던 빛이 크게 확대되었다. 그 빛은 고스란히 내게로 날아왔다. 눈이 부실만큼 환한 그 빛이 무엇이든 간에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유나야!"
고통에 찬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모든 건 순식간이었다. 나는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듯 그대로 쓰러졌다. 어느 순간 나는 아무 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내 앞에 분명히 존재했던 스잔나 노르젠 후작영애도 나를 부르며 우는 라니의 목소리도. 나는 모든 것이 멀어져갔다.
그대로 몸에 힘을 뺐다.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이대로 죽어버린 해도 상관없었다. 너무, 너무 피곤하다. 그래서 눈을 감았다. 더는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아서.
아, 영애. 불쌍한 사람. 아픔에 흔들리며 상처에 떨던 스잔나 노르젠 후작영애의 눈동자가 저 멀리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작품 후기 ============================
쿨럭 쿨럭 ㅠㅜ 감기 조심하세요 ㅠㅜ
감기 죽겠네요 .......
선작 코멘트 추천해 주신 모든 분들, 복 받으세요~~^^
* 쿠니쿠마님ㅎㅎㅎ감사합니당~ 알콩달콩 한게 좋다하셨는데 저는 이런 글을 들고 왔네요 ㅠㅜ
* 사랑솜님 ㅎㅎㅎ엄청난 댓글에 마구 웃었답니다 ㅎㅎㅎㅎ꽃밭에서의 씬은..... 음..... 아직 생각도 안해봤는데 괜찮을까요? 아직 야외 플레이(?)는 써본 적이 없지만 써본다고 해도 나쁘지 않을 듯도 같고 쿨럭쿨럭 ㅎㅎㅎㅎㅎㅎㅎ 댓글은 항상 한글자한글자 웃으면서 본답니다 ㅎㅎㅎㅎ
* 배고파5님 ㅎㅎ원래 똑똑한 놈일수록 바보같은 짓을 더 많이 하는 법이래요..... 제 친구가요;;;;;;;
* M.
K님ㅎㅎ아슬아슬한 상태지요. 어느 정도 자각은 하고 있는 시점이지만 좀 더 사건이 터져야 절박해지겠죠? ㅎㅎㅎㅎㅎ
* 검은라벤더님 ㅎㅎㅎ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기조심하세요^^
* 페르디엔님ㅎㅎㅎ쿤의 등장은.... ㅎㅎㅎ어쩌면 너무 뻔한 걸 수도 있어서 조금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 루이영원님ㅎㅎㅎ사실 쿤은 유나의 소중하고도 애틋한 추억의 한 자락이여서.... 결코 유나는 쿤을 무시할 수 없을 거랍니다. 그래도 걱정마세요. 님 말씀대로 쿤이 뮤를 상대를 뭘 할 수 있을까요? ㅠㅜ 아 불쌍한 쿤. 내가 쓰면서도 네가 불쌍해서 순간 눈물이 났다 ㅎㅎ
* 별빛같은마음님 ㅎㅎㅎ뮤는 쿤을 절대적으로 싫어합니다!!!! ㅎㅎㅎㅎ
* 유진유민쓰마미님ㅎㅎㅎ체력 좋아지라고 별 짓 다하는 뮤.... 도 그려볼까 하다가 그건 이미지 타격이 넘 심할 것 같아서 슬쩍 넘어가봅니다 ㅎㅎ
* 불타는에이스님 ㅎㅎㅎ아잉~ 사실 저도 그 말이 노골적인 표현보다 야했는데용~ ㅎㅎㅎ제 눈에도 음란마귀 낀 건가요? ㅎㅎㅎ저는 질퍽질퍽한 거 별로 안좋아해서 서브 남주는 잘 안쓰는 스타일입니다 ㅎㅎ 어찌보면 긴장감이 좀 떨어지는 면도 없지않아 있죠;;
* 게으른냥님 ㅎㅎㅎ뮤 가지세요!!!!! ㅎㅎㅎㅎ 그리고 저도 사랑해욤>////< 부끄럽네요 ㅎㅎㅎ
* momorica님 ㅎㅎ꽃밭에는 정자가~ 정자 안에서는 얼레리 꼴레리 ~~~~ 그런데 이런 내용 전개라 그건 아주 먼 훗날의 이야기?? ㅠㅜ
* jadoo님 ㅎㅎㅎ넵! 쿤은 사실 소설 전체적으로 조금씩, 하지만 꾸준히 등장했다지요 ㅎㅎㅎㅎ
* 티오레나님ㅎㅎ그 남자편을 더 좋아하시는 분이 은근히 많습니다;;;;;ㅎㅎ
* 크샤나크님 ㅎㅎㅎ가지세요!!!! 맘껏 가지세요!!!!!
* pisceso님 ㅠㅜ 감기때매 좀 늦었습니다. ㅠㅜ 감기 조심하세요 ㅠㅜ
* 절세선녀님 ㅎㅎㅎ감사합니다 ㅠㅜ 읽어주시는 것만으로도 무한 감사 올려요 ㅠㅜ
* sjade님ㅎㅎㅎ더 열심히 쓸게요~ 그치만 감기로 당분간은 조금씩^^;;;
* 퍼플버블님ㅎㅎㅎㅎ담편 냉큼 드렸습니다!!!!! ㅎㅎㅎ근데 내용이 어두워요 ㅠ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