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33 회: # 9 -- >
나는 하고자 했던 말을 삼켜냈다. 왜냐하면 입을 열자마자 깨달았기 때문에. 나는 노르젠 후작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노르젠 후작은 나와 그 어떤 접점도 없었고 내가 관심을 가질 만한 사람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나와 아무 상관없는 타인에 불과했다. 나는 지금까지 후작에 대한 나쁜 소문도 혹은 좋은 소문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저 내가 아는 건, 노르젠이라는 가문이 있다는 것과 그 가문이 후작 가(家)라는 것뿐.
"배롤린 남작이 그 더러운 성향을 겉으로 표출하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사람이라면, 노르젠 후작은 그나마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있는 머릴 가진 사람이었답니다. 그 더럽고 음탕한 성향은 꽁꽁 숨겨야 한다는 것을, 절대 세상에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지요. 하지만 배롤린 남작이나 노르젠 후작이나 결국은 똑같이 역겨운 인간들일 뿐이에요. 아니 어쩌면 노르젠 후작이 더 더러울지도 모르겠네요."
그녀는 노르젠 후작을 아버지라 부르지도 않았다. 완벽한 타인을 지칭하듯 그저 후작이라 불렀다. 그런 그녀의 눈빛에 떠오른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체념조차, 그녀에겐 없었다. 그저 담담한 얼굴로 끔직한 진실을 내뱉고 있는 그녀는 언뜻 보기엔 마냥 평화롭게 느껴질 정도로 차분하고 침착했다.
"노르젠 후작 가(家)가 황후를 배출한 가문이라는 점은 후작에게는 행운이요, 후작 이외의 사람에게는 불행이었답니다. 왜냐하면 후작은 황후의 후광으로 그의 끔찍한 악행을 별무리 없이 덮을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권세가 아무리 대단하고 뛰어나다 한들 같은 집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피할 수는 없는 법이지요."
"……."
"후후. 저는 아주 어려서부터 노르젠 후작에게 짓밟힌 수많은 어린 여자아이들을 보아왔답니다. 하나같이 고통 속에 울부짖으며 차라리 죽여 달라 제게 사정을 해대라구요. 그래서 몇 명은 제가 직접 죽여주기까지 했습니다. 네, 제 손으로 그리 해주었습니다. 너무 안타깝고 불쌍해 차마 외면할 수 없었거든요. 그런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대가로 제가 무엇을 받았는지 아십니까? 혹 영애는 그것이 무언지 알 것 같나요?"
"……."
"그것은 바로
'감사합니다.'
란 말이랍니다. 저는 그들에게 감사를 받았습니다. 끔찍하고 더러운 짐승에게서 벗어나게 해준 것에 대한 감사를 받았답니다."
"……."
아, 아…….
소, 소름이 돋는다. 이런 말은, 듣고 싶지 않다. 정말로 듣고 싶지 않다. 그런데 왜 내게 당신은 그런 말을 하고 있나? 그리고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무슨 말을 그녀에게 해주어야 하지?
나는 그런 것 따윈 몰랐다. 당연히 모를 수밖에. 내가 어떻게 후작 가(家)의 속사정을 알 수 있겠는가. 다른 집안 사정을 알 만큼 그들에게 관심을 갖은 적도 없고, 타인의 집안 사(史)를 궁금하다, 알고 싶다 생각할 만큼 오지랖 넓은 성격도 아니다. 남의 일 따윈, 남의 사정 따윈 알고 싶지 않았다. 배롤린 가(家)에서 살고 있을 무렵, 나는 그저 내 몸 하나 제대로 지키기조차 힘겨운 힘없는 아이에 불과했다. 론에게서 내 몸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죽을 만큼 발악해 댄 것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하고 힘들었단 말이다.
"왜, 왜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래, 결국 내가 묻고 싶은 건 그것이다. 나는 스잔나 노르젠 후작영애가 왜 내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그녀와 나 사이엔 서로의 고통을 이해하고 나눌 만큼의 관계도, 친분도 아무 것도 없다. 심지어 딱히 교류를 했다고 말한 만한 그 어떠한 접점도 없었다. 그저 라니로 인해 인사를 한 번 주고받은 것이 우리의 전부이지 않은가.
당신은 라니가 아니야!
그래, 당신은 라니가 아니다. 라니와는 다르다. 라니와 나는 교류가 있었다. 같은 집에 살며, 같은 사람들로부터 상처받고 고통을 받았다는 교류가.
"지금 제 뱃속에는."
"……."
"아이가 있답니다."
어렵게 내뱉은 내 질문은 허무하게도 공기 중으로 맥없이 흩어져 내렸다. 그녀는 내 질문 따윈 듣지도 못했다는 듯 다시 자신의 이야기를 입에 올렸다.
"이 아이의 아비는 제 호위기사지요. 네, 맞습니다. 지금 영애께서 생각하는 그 사람이랍니다."
아, 본 적이 있다. 딱 한 번에 불과하지만. 그날, 스잔나 노르젠 후작영애를 라니의 정원에서 처음 만났던 그날, 그날 그녀의 호위기사도 보았었다.
그런데 그녀가 임신을 했단다. 그 남자, 뮤와르노와와의 약혼이 가장 유력한 여자의 배속에는 이미 다른 남자의 아이가 숨을 쉬고 있댄다. 하지만 나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아니 놀라지 못했다. 어쩌면 너무 놀라서 놀라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 걸지도 모른다.
그런 내 덤덤한 반응이 맘에 들었는지 그녀가 다시 살포시 미소 짓는다. 오늘 그녀가 지은 미소 중에 가장 따뜻한 웃음이었다.
"제가 유혹했답니다. 꼿꼿하게 견뎌내려 했던 그 사람을 제가 유혹했고, 저를 억지로 안게 만들었답니다. 저를 안을 수밖에 없도록, 제게 욕정을 풀어낼 수밖에 없도록 미약을 먹이고 먹이고 또 먹이고……. 그는 나를 혐오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내게 그의 몸을 심어댔지요. 도망칠 수도 없게 꽁꽁 묶기도 했답니다. 이미 그 남자의 모든 약점을 손에 쥔 상태였거든요. 그런 끔찍한 짓을 한두 번에 그치지 않고 계속해왔어요. 몇 년을 쭉- 그는 지옥에서 살아왔지요. 지금까지도 그 사람은 제 곁에서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하고 그리 살고 있네요. 하지만 그것도 오늘이 마지막이 될 테니……, 아마 그 사람은 좋아하겠죠……."
"……."
"아이를 가질 생각은 없었어요. 이 더러운 피-, 누구에게도 물려주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는 제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모른답니다. 제 생물학적 아비를 세상 그 누구보다 혐오하면서도 저는 결국엔 아비와 똑같은 짓을 그 사람에게 했더군요. 역시 피는 속일 수 없는 모양이지요."
"……."
"원했던 사람에게 안기고 또 안기고 안겼지만……생각만큼 행복하진 않더라고요. 왜냐하면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요. 그 사람의 의지로 먼저 저를 안았던 적이."
"……."
"라니 영애가 조금만 더 늦게 결혼을 했더라면-."
속삭이듯, 그저 혼자 속내를 고백하듯 웅얼거리던 그녀가 잠시 말문을 멈추었다. 배에 손을 올려놓고 빤히 자기의 배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모습은 엄숙해보이기까지 했다. 가만히 심호흡을 하는 것을 보아 아무래도 점점 고양되어가는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라니 영애가 조금만 덜 행복해 졌더라면-."
"네?"
순간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스잔나 노르젠 후작영애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대체 라니가 그녀의 생각보다 더 일찍 결혼을 하고, 그 결혼을 그녀의 바람보다 더 행복해 한 것이 무슨 문제라는 거지? 아니 어떻게 그런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나? 자신과 라니의 처지가 비슷하다하여 자기가 불행하니까 라니까지 반드시 불행해 져야 한다 여기고 있는 걸까? 만약 그리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건 정말 못돼 처먹은 생각이다. 왜 자신의 불행을 다른 사람에게 이입시켜 동질감을 유지하려는 건가. 그녀의 인생이 라니보다 더 낫다고 혹은 더 불행하다 하는 건 감히 내가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나 적어도 그녀는 라니의 행복에 대해 왈가불가할 권리가 없다. 라니는 세상 누구보다 행복해질 권리가 있는 사람이다.
깊은 불쾌감에 나도 모르게 날선 눈으로 스잔나 노르젠 후작영애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그런 내 모습에 풋 소녀 같은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