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32 회: # 9 -- >
"전 아가씨를 호위해야 합니다."
"얌전히 응접실에만 있는 제게 무슨 일이 생기겠나요?"
"아가씨의 곁에서 떨어지지 말라는 젠 부단장님의 명이 있었습니다."
"기사님. 여기는 루이 토킨 경의 저택이에요. 위험한 곳이 아니라고요. 그리고 지금 기사님께서 살펴봐 주셔야 하는 사람은 그 루이 토킨 경의 아내랍니다. 좀 갔다 와주세요. 상황만 보고 와 주셔서 좋아요."
"……."
"부탁이에요."
안된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는 그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도 시녀의 불안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라니의 일이 조금은 염려되는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라니와는 제대로 된 이야기조차 나눠보지 못한 사이겠지만 루이 토킨 경과는 다르겠지. 그도 그럴 것이 토킨 경과는 같은 사람을 모시며 일하고 있지 않은가.
내 끈질긴 눈빛에 그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했다. 가능한 서둘러 돌아오겠다며, 제발 이곳에서 꼼짝 말고 있어달라는 부탁 아닌 부탁을 하고는 시녀에게 안내하라는 듯 고갯짓을 해 보인다.
달칵.
그가 나가고 혼자 응접실에 남겨진 나는 이리저리 왔다갔다 반복해댔다.
"무슨 일이지? 라니와 노르젠 후작영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대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라니에게 그리 좋은 일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혹 배롤린 남작과 관련된 일인 걸까? 아니면 론과 관련된 일? 만약 그들과 관련된 일이라면 이미 결혼하여 배롤린 가(家)를 탈출한 라니에게 굳이 그들과 관련된 일을 전할 필요가 있나?
아니, 배롤린과 관련된 일은 아닐 거다. 왜냐하면 그녀가 배롤린 가(家)를 거의 버리듯 혹은 탈출하듯 나왔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들과 관련된 일이 아닌 한 라니에게는 딱히 다른 문제가 있을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그녀의 모든 문제는 늘 그녀 본인에게서가 아닌 끔찍한 그녀의 아비와 빌어먹을 친 오라비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던가.
"하아."
얼마나 시간이 더 흘렀는지 모르겠다. 초조한 내 마음이 1초를 10분으로 여기고 있는 지도 모른다.
루이 토킨 경이 하는 일이 뮤, 그 남자와 연결된 일이고 또 뮤가 하는 대부분의 일은 기밀이라는 것을 전에 새론에게 들은 적이 있다. 그만큼 중요한 일을 한다는 거겠지. 중요한 정보를 다루고, 중요한 위치에서 사람들을 통솔하는 그런 일을. 그런 대단한 남자이기 때문에 뮤와 연결된 사람이라 할 수 있는 루이 토킨 경 역시 중요인사라 저택 관리에 필요한 사람을 고용하는 문제가 생각보다 어렵다는 라니의 투정 아닌 투정을 결혼식 전에 들었더랬다. 특히나 사병을 고용하는 것에 있어서는 일반 시녀를 고용하는 것보다 더 꼼꼼하게 토킨 경이 살펴보고 있노라고. 때문에 이 저택엔 아직까지도 기초 경비원들 외에는 무력을 가진 이들이 없다는 사실이 순간 참으로 안타까워졌다. 물론 저택에 기본적인 방어 마법을 걸어놨겠지만 그래도 이미 허락받고 들어온 이에 대한 것은 막을 도리가 없지 않은가.
점점 더 초조해지는 마음을 애써 차분하게 억누르고 라니에게 가본 기사가, 혹은 라니가 이곳에 오기만을 기다렸다. 기분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응접실을 뛰쳐나가 라니가 있는 곳으로 가보고 싶었지만 그건 라니가 싫어할 것 같아 꾹 참았다. 나를 응접실로 보낸 이유가 무언지 지금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그곳에 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는 건 어렵지 않게 추측해볼 수 있었으니. 그래도 이 응접실을 10바퀴 다 돌때까지 아무도 오지 않으면 그냥 찾아가보리라 결심하고 막 8바퀴를 돌때였다.
또각또각. 여성의 구두소리와 함께 누군가 이곳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응접실 문을 살짝 열어두었기 때문에 더 선명하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응접실 둘레를 맴돌던 발걸음을 멈추고 문 쪽으로 바라보며 섰다. 자연스럽게 쥐어진 주먹이 마치 저 걸음걸이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단단하다.
"스잔나 노르젠 후작영애."
목구멍에서 절로 딱딱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랜만이네요, 유니시이아 영애."
잔득 얼어붙고 경계하는 내 반응에도 아랑곳없이 이미 살짝 열려있던 응접실 문을 밀고 들어선 그녀는 너무나도 평온하고 잔잔한 얼굴로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처음 만났던 그날과 다름없이 다정하고 친절하다. 이렇게까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일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에 내심 당황도 되는 한편 어쩐지 조금 안심이 되기도 했다. 어쩌면 내 기우가 다소 과장된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쩌면 정말로 별일 아닌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라니는 어디 있나요?"
그런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며 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라니 영애는 지금 제 호위기사와 함께 있답니다."
"영애의 호위기사와요? 어째서요?"
"호호호. 라니 영애가 그에게서 건네받을 물건이 있거든요."
"……그럼 제 호위기사는 어디 있나요? 분명 그 방으로 갔을 텐데요."
"음, 그 기사님은 잠들었던가? 아니, 기절한 건가?"
"……."
"아마 기절한 것 같네요."
잠들어? 기절해? 아마?
어쩐지 말의 내용이 이상하다. 조금 차분해졌던 심장이 다시금 불안으로 콩닥거리며 뛰어대기 시작한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나가고 주먹을 쥔 두 손이 덜덜 떨려왔다. 하지만 그런 내 불안을 아는지 모르는지 스잔나 노르젠 후작영애는 그저 말간 미소를 지으며 나를 예의의 그 맑은 눈빛으로 쳐다볼 뿐이다.
"많이 뵙고 싶었답니다, 영애."
"예? 저……를요?"
"네. 유니시이나 영애를 많이 뵙고 싶었습니다."
왜? 아니 어째서? 그녀가 딱히 나를 보고 싶어 할 이유가 있던가? 만약 그녀와 약혼 이야기가 곧 오갈 거라 소문이 난 뮤아르노와 알브레히트를 보고 싶어 한다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 그 어디에도 거짓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 남자가 아닌 나를 보고 싶어 한 것이 분명하다.
한걸음 더 내게로 가까이 다가와 서는 그녀를 그저 이해할 수 없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녀는 내가 그녀에게 보이는 경계를 아는지 굳이 거리를 가깝게 좁히려 애쓰지는 않았다. 마치 나를 달래주듯이 겁먹지 말라는 듯이 그렇게. 그리고 실제로도 그녀의 그런 행동은 조금이나마 내게 안심을 주었다.
"유니시이나 영애께서 알브레히트 공작님의 정부가 되기 이전부터 라니 영애와 저는 친분을 쌓고 있었답니다. 하지만 그때는 지금처럼 이리 가깝게 지내지 않았지요."
정……부라.
오랜만에 듣는다. 타인의 입에서 듣는 내 호칭과도 같은 위치를.
하지만 다른 이들이 그랬던 것과 방금 전 영애가 했던 것은 단어는 같은 것이었으나 그 뉘앙스가 조금 달랐다.
그래, 맞다. 그녀는 딱히 나를 모욕하기 위해 저 단어를 사용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있는 사실 그대로를 담은 단어를 사용한 것뿐. 그 단어를 입에 담는 그녀의 눈빛이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혐오하듯이 혹은 경멸하듯이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저 눈빛은……. 그래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도 느꼈지만 저 눈빛은 분명 애정에 가까운 것이다.
그런데 왜? 왜 그녀는 나를 저런 눈으로 보는 건가? 어째서? 대관절 우리가 무슨 사이기에? 글쎄, 지금 내가 알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저 모든 것이 당황스럽고 혼란스럽다. 이해할 수 없는 저 애정 어린 시선이 불편하기만 하다.
"라니와는 언제부터 친하게 지내신 건가요?"
"아, 안면이 있은 지는 꽤 되었답니다. 하지만 유니시이나 영애께서 배롤린 가(家)를 떠나고 난 그 뒤부터 우리는 본격적으로 가까워졌지요."
노르젠 후작영애의 입가에 다정한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땐 우리 둘 외에 딱히 다른 이와 교제할 수가 없었거든요. 왜냐하면 라니 영애와 저는 둘 다 거짓웃음을 짓는 것에 무척이나 지쳐있었답니다. 아주 많이 지쳐있었지요. 그런데 우리 둘이 함께 있으면 애써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되고, 거짓웃음을 짓지 않아도 괜찮았답니다. 그건 무척이나 편한 관계였습니다. 여태껏 없었으니까요. 달리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유니시이나 영애께서 배롤린 가(家)에 머물고 계셨을 당시엔 라니 영애께선 저택을 오래 비울 수 없다 하시며 늘 일찍 돌아갔답니다. 쭉 그리하셨어요. 그들이 유니시이나 영애께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요."
"……."
"하지만 더 이상 유니시이나 영애가 없는 그 저택에 라니 영애는 일찍 돌아갈 필요가 없게 되었지요."
"왜, 왜 둘이 그렇게……그렇게……."
"왜 우리 둘이 그리 지냈느냐고요? 그야 우리는 똑같은 아비를 둔 불운의 자녀들이었으니까요."
똑같은 아비를 두었다? 불운의 자녀? 그게 대체 무슨 소리지? 갑작스런 그녀의 말에 절로 눈이 커다래졌다.
놀란 내 마음을 알았는지 스잔나 노르젠 후작영애가 입가에 다정한 미소를 더하며 놀란 나를 달래주듯 웃음 짓는다. 그 모습은 참 아름다웠으나 어쩐지……어쩐지 무척이나 희미하고 또 희미해 작은 바람결에서도 바스러져 버릴 만큼 위태로워 보이는 것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슬퍼보였다.
"똑같은 성향을 지닌 아비……. 이렇게 설명하면 영애께서도 더 쉬이 이해하시겠네요."
"하, 하지만 노르젠 후작께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