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30 회: # 9 -- >
라니가 돌아왔다!
신난다. 아이, 좋아라. 라니가 돌아왔다니, 라니가 돌아왔다니!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란 말인가. 어제 저녁에 토킨 부부가 도착했다는 말을, 나는 오늘 아침 나를 깨우러 온 시녀에게서 전해들을 수 있었다.
가슴이 두근두근 콩닥콩닥 거린다. 왜냐하면 신혼여행에서 이제 막 돌아온 라니에게 들어야 할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예를 들어 첫날밤이라던가, 첫날밤이라던가, 첫날밤이라던가. 그게 아니라면 첫 동침이라던가, 첫 관계라던가, 첫 반응이라던가 등등 신혼 처음으로 시작하는 모든 것들에 관해서 말이다.
그리고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도 만져주었을 때 어디가 가장 좋았는지 혹은 신랑이 어디를 가장 많이 좋아하는지 등등도 맘만 먹고 질문 리스트를 작성해보자면 그 질문으로 산을 이룰 수도 있으리라. 라니가 한참 정신없을 틈을 타 몇 번까지 해봤냐는 것도 은근슬쩍 물어봐야지. 아마 자기도 모르게 냉큼 대답해 버릴 지도 모르지 않나.
레니도 지금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며 실실 웃고 있을게 틀림없다. 그렇다! 라니가 드디어 신혼여행에서 돌아왔다는 소식은 나와 레니를 들뜨게 만들기 충분한 사건이었다.
기대와 흥분으로 가득한 레니의 편지를 받아들자마자 나는 즉시 라니의 집으로 출동했다. 레니보다 먼저 가 있어야지. 레니는 신부수업을 마친 오후쯤에나 올 수 있을 거라며 편지에 마구 징징거려댔다. 레니는 자기랑 시간 맞춰서 같이 가자고 졸라댔지만 내가 왜 그래야 한단 말인가. 먼저 가서 재미난 이야기를 섭렵하여 레니가 오면 골려줘야지.
생각만 해도 즐겁구나. 룰루랄라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온다. 간만에 온 몸의 피가 들끓을 만큼 신이난다. 재미난 사건을 기대하며 이는 흥분이 나를 마구 설레게 했다. 어렸을 적 이후, 이런 기분을 다시 또 가질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는데.
"오랜만에 뵙습니다."
막 공작성 마차에 올라타려는 내 등 뒤로 또 다른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그머니 올렸던 발을 냉큼 내리고 휙 뒤돌아보자, 역시나. 그곳에는 루이 토킨 경이 서 있었다. 아, 토킨 경 옆에 사키 경도 있었다. 저 멀리서 젠 경이 공작 가(家) 기사로 보이는 누군가에게 무슨 지시를 내리는 모습도 보이고.
"잘 다녀오셨어요?"
발랄하게 인사를 건네는 내 표정이 어땠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런 내 인사에 루이 토킨 경의 얼굴은 떨떠름하게 굳었고 그 옆에 서 있던 사키 경은 웃겨 죽겠다는 듯 마구 웃어대는 게 아닌가.
저 남자는 왜 나만 보면 저렇게 웃어대는 건지. 아무래도 그 웃음 코드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주에 속한 것이 아닌 모양이다. 개인적으로는 기분이 썩 좋지 않은 웃음이었지만 사키 경의 웃음은 어색한 분위기를 꽤 잘 어루만져 주는 효과가 있어 사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나쁘지만은 않다.
"잘……다녀왔습니다."
"그래요? 참 다행이네요."
"……어디 외출하십니까?"
"네. 라니네 집에 갑니다!"
라니네 집이라면 곧 이 남자의 집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굳이 라니네 집이라 강조했다.
"……그렇습니까?"
"네! 라니에게 들을 이야기가 많아서요."
다시 예를 들어보자면 첫날밤이라던가, 첫 동침이라던가, 첫 관계라던가, 첫 반응이라던가, 첫 관계에 걸렸던 시간이라던가 등등이요!
"……."
맹세코 난 저 뒷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정말이다. 나도 그 정도의 예의는 갖추고 있다. 그런데 마치 그 말을 생생히 들은 것 같다는 저 남정네들의 표정은 대체 뭔가? 결국 루이 토킨 경은 두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모습이 화가 났다기보다는 어쩐지 쑥스러워 보였다. 사키 경은 그 자리에 쓰러지듯 주저앉더니 종내 볼품없이 쓰러졌다. 저렇게 웃다 실성할 것만 같다는 생각에 슬쩍 사키 경에게서 한걸음 물러섰다.
"새론은 데려가지 않으십니까?"
"아, 일이 많이 바쁜가 봐요. 오늘은 영~ 볼 수가 없네요. 안 그래도 아까 찾았었는데 다들 새론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렇습니까? 그럼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루이 토킨 경이 제안했지만 나는 휘휘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래도 신혼여행에 갔던 토킨 경의 일이 나눠지는 바람에 기존의 보좌관들은 물론이요 새론마저 굉장히 바빠졌다는 걸 안다. 그래서 요즘 새론의 얼굴을 보기 힘들어졌다는 것도. 토킨 경이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다들 한시름 놓았을 텐데 나를 호위한다거나 하는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게 할 수는 없는 법. 절로 찌푸려지는 인상에 억지로 험악한 표정을 덧입혀 격하게 거부반응을 내보였다.
"됐어요. 꼬박꼬박 그렇게 호위해주지 않아도 된다고 했잖아요. 저는 그게 더 불편하다고요. 게다가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라니네 집에 가는데 뭐가 그렇게 위험하겠어요? 라니네 저택이 이 근처라는 걸 혹시 토킨 경께서 모르신다 하진 않으시겠죠?"
"그래도 아가씨 혼자서는 절대 안 됩니다. 주군께서 아시면 난리 나실 겁니다. 정 부담스러우시다면 다른 기사라도 붙여드리겠습니다."
그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저 멀리 있었던 젠 경이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내게 말했다. 그런 젠 경 의 옆에는 처음 보는 기사 한 명이 서 있었다. 내가 자기들의 호위를 거부할 거란 걸 이미 예상한 모양이지.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기사를 대동한 상태일 수는 없지 않겠나.
"처음 뵙겠습니다. 캐드락이라고 합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오는 기사를 바라보며 눈을 데굴데굴 굴려보았다. 호위 기사를 대동하지 않고 가겠다하면 절대 안 된다고 할 터. 어쩌면 루이 토킨 경은 아예 외출을 하지 못하도록 나를 종용하려 들지도 모른다. 내 외출에 왜 이리도 유난법석을 떨어대는 건지 이해할 수 없지만 이들도 단지 그 남자의 명에 따라 움직이는 것뿐이니 이들에게 짜증을 부려봤자 소용없다는 것 정도는 안다.
그래서 그냥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젠 경이 데려온 기사에게 몇 가지 주의사항 등을 전하는 모습을 보며 그래도 바쁘기 짝이 없는 보좌관들 중 한명이 나서지 않았다는 사실에 위안을 삼기로 했다. 마차에 오르려하자 그새 웃음을 멈춘 사키 경이 재빠르게 다가와 손을 잡아주었다. 사실 이런 에스코트도 내게는 필요 없는 것이다. 호위와 마찬가지로.
"익숙해지십시오. 이젠 이런 일에 익숙해지셔야 합니다."
"호위요? 아님 이런 에스코트요?"
"모든 것에 익숙해지십시오.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 가는 단계라 저희 중 한명이 호위하지 않아도 될 듯 하니 전보다 외출하시긴 한결 수월하실 겁니다."
"하아~, 저한테는 처음부터 필요 없다니까요."
낮게 중얼거리는 내뱉는 내 말에 사키 경이 다소 엄격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그건 충고나 다름없는 것들이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앞으론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 될 테니까요."
"……그런 말투 안 어울려요."
"하하하. 그렇습니까?"
다시 개구진 표정으로 돌아온 사키 경이 예의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거려댔다. 사키 경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 오르자 오래지 않아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달그락달그락.
마차를 따라 걷는 말발굽의 소리를 들으며 나는 여전히 왜 내게 호위기사가 필요한 건지 이해할 수 없다며 다시 한 번 고개를 흔들었다.
"이러니까 내가 마치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라도 된 것 같잖아. 안 그래?"
응, 응. 굉장히 헷갈려. 호위니 뭐니 그런 것의 필요여부를 떠나 기분이 싱숭생숭해지고 불안해지고.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저러니 착각에 빠질 것 같아 무섭기도 하고. 사실 기분이 나쁘지 않다. 오히려 좋다. 하지만 그 기분이 좋다는 것이 호위기사의 존재를 감내해야 할 만큼은 절대 아니다.
마차는 오래지 않아 라니네 저택에 도착했다.
"아, 감사해요."
내릴 때는 호위기사의 에스코트를 받았다. 지금도 물론 어색하기 그지없지만 그래도 처음 에스코트를 받았을 때보다는 많이 익숙해진 내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온다.
"음?"
그동안 결혼식 준비로 몇 번 들락날락 거려 제법 익숙해진 길을 따라 저택을 향하는데 저 멀리 세워진 한 마차를 유독 눈에 띄었다. 처음에는 오후에나 올 수 있다던 레니가 벌써 온 건가 싶었지만 자세히 보니 그 마차는 노르젠 후작 가(家)의 마차였다.
노르젠 후작 가(家)라. 그럼 저건 스잔나 노르젠 후작영애의 마찬가?
단아하고 차분했던 그녀를 떠올리자 가슴 한쪽이 불편함으로 묵직해져온다. 현재 그 남자의 약혼녀 후보 1순위라는 그 영애는, 내가 봐도 참 예쁘고 상냥한 사람이었지.
아름답고 상냥한 영애, 아름답고 상냥한, 상냥한, 상냥한-.
"……아, 싫다."
끔찍해.
날 만졌던 손으로 스잔나 노르젠 영애를 만지고, 내 입술에 맞닿았던 그 입술로 그 영애의 입술을 삼키고, 내 가슴 봉우리를 애무했던 열기로 그 영애의 봉우리를 어루만지고, 한없이 내 속살을 파고들었던 그 뜨거움이 그 영애에게도 파고든다……는 생각을 하자 순간 호흡이 거칠어져갔다. 격하게, 아주 격하게.
"하, 하하."
진정하자, 유니시이나. 이러지 말자. 이런 생각은 말자.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다. 벌써부터 이리 추해지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