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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아름답다-121화 (121/206)

< -- 121 회: # 8 -- >

라니가 웃으며 말한다. 마치 내가 무슨 셈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라도 하듯. 그 말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랬다. 이제 곧 내 생일이다. 물론 생일이라고 거창한 파티를 열고 싶거나 하는 마음은 없다. 하지만 친구들이랑 노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어 조심스럽게 운을 떼 본다.

"너 신혼여행 갔다 오고나면 우리 술판이나 다시 열까? 다음에 또 판 벌일 땐 새론이 자기도 끼워달라고 그랬었는데, 응? 새론도 같이 끼어서 놀자."

내 제안에 가장 기뻐한 사람은 누가 뭐래도 레니다. 레니는 덥석 내 두 손을 부여잡고 마구 흔들어댔다.

"넌 정말 멋진 아이야. 어쩜 그렇게 예쁜 소리만 할 수 있니?"

하지만 그런 레니를 보는 페터 리제도 공자의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는 모양새가 저렇게 좋아하는데 딱히 말리고 싶지 않다는 그런 것이었다. 하여튼 볼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정말 착한 남자라니까. 레니 너는 복 터졌다. 신랑 복 터졌어.

"어때, 라니야?"

"음……."

라니는 이제 막 남편이 된 루이 토킨 경을 슬쩍 쳐다보았다. 라니의 얼굴을 보아하니 참여하고 싶기는 하나 아무래도 남편인 그가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힐끔 그 시선을 따라 경의 얼굴을 보자 루이 토킨 경의 표정은 대놓고 싫다는 기색이었다.

쳇, 저렇게까지 싫어할 건 없지 않나? 왜 저렇게 싫어한담?

라니가 빠지는 건 싫다. 내 생일파티 대신 벌이는 거니까 생일선물 주는 셈치고 허락해 달라 할까 잠시 고민해본다. 하지만 내가 채 입을 열기도 전에 내 옆에 서 있던 남자의 목소리가 질책하듯 나를 때려왔다.

"제정신인가?"

"네?"

생각지도 못했던 나무람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자 얼굴가득 못마땅하다는 기색을 풀풀 풍기고 있는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저, 저요?"

"지금 네가 제정신으로 그 말을 내놓은 건지 의심이 드는군."

"그러니까 왜요?"

"하! 테라스에 나가서 우리가 했던 대화가 무엇에 관련된 거였다 생각하지?"

"테라스……아!"

이럴 수가! 이렇게 바보 같을 수가! 난 세상에서 제일가는 바보가 틀림없다!

나는 나 자신에게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은 며칠 전에 한 말도 아니요, 몇 시간 전에 한 말도 아니요, 무려 방금 전에 한 것이다. 어떻게 그걸 완벽히 잊고 이런 망발을 내뱉을 수 있나, 나는?

게다가 '그 말'은 단지 이 남자의 화를 풀어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너무나도 가벼이 놀려댄 것이기도 했다.

바보 같긴. 생일파티 대신 술판을 열려던 계획은 며칠 전부터 구상했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불편한 상황 좀 피해보겠다 쓴 알량한 내 수법에 내가 걸려버렸다. 그러니까 내가 내 계획을 잡아 먹어버렸단 소리다. 어떻게든 이 남자에게 술판 약속은 받아내고 싶었는데! 망했구나.

뜻하지 않은 불쾌한 그의 반응에 모두의 시선에 내게로 꽂혀왔다. 다들 우리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건지 심히 궁금하나 차마 이 남자에게는 물어볼 엄두를 내지 못하겠고 그저 내 입에서 콩고물이 떨어지기만을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미쳤다고 그 말은 내 입으로 하겠는가. 한 몸에 사람들의 기대를 받으며 나는 그저 하하하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심하다 싶을 만치 반짝거리는 레니의 얼굴 뒤로 보이는 파티장 모든 사람들의 귀가 내 쪽으로 크게 열려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건 내가 미친 거겠지. 그런데 그렇게 보인다. 정말로 그렇게 보인다.

"하, 하하하. 이, 이 계획은 나중에 라니가 신혼여행 갔다 오면 그때 다시 얘기하자. 하, 하하하. 라니야, 라랑떼로 간다고 했지? 조, 좋겠다. 거기 바다 무지 예쁘다는데. 바다가 글쎄 에메랄드빛이라지 않니. 하하하. 나도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야. 하, 하하."

헛소리로 말을 돌리려는 나를 레니가 못마땅하게 쳐다보았지만 그렇게 쳐다봐도 여기에선 절대 말해줄 수 없다. 나는 레니를 달래려는 듯 나중에, 라고 작게 속삭여주었다. 그제야 레니가 달콤한 생크림을 입에 머금은 것 마냥 방긋 웃는다. 내 비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아주 극소수의 사람 중 한명이 자신이라는 것에 대해 레니는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둥의 말을 전에 레니에게서 직접 들었더랬다. 내 사생활 얘기 대체 어디가 레니의 자부심을 높여줄 만큼 대단한 것인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본인이 그렇다는데 딱히 할 말은 없어서 그냥 그런가보다 내버려뒀다.

"술판을 벌이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군."

그런데 이 남자가 자꾸 삐딱선을 탄다?

나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술판을 벌이게 되면 술을 제공해줘야 할 대상이 이러면 곤란하다.

"당연하죠. 굳이 지금 결정을 내릴 필요 없는 거잖아요, 안 그래요? 공작성에 돌아가서 진ㅊ……, 크흠, 알아본 뒤에 확실해지면 그때 결정해도 되는 걸요."

내 작은 반박에 그가 무슨 말을 할 듯 하다 그냥 입을 다물어버린다. 그 모습은 내 말에 수긍했다기보다는 그냥 넘어가 준다는 뉘앙스가 강해 조금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더 따지지 않아준 것이 어딘가 싶다. 나는 걱정스런 기색으로 날 쳐다보고 있는 라니를 향해 싱긋 웃었다.

"알았지? 이 얘긴 네가 신혼여행에 갔다 와서 다시 하자. 응?"

"제 의견은 묻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그때 또 다른 복병이 나타났다. 가만히 우리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루이 토킨 경이 조금 심통 맞은 목소리로 내게 따지듯 입을 연 것이다. 그런 루이 토킨 경의 말에 당황한 라니가 손으로 그의 팔을 잡고 흔들어댔지만 토킨 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시선을 잡은 건 다른 것이었다. 나는 라니가 잡은 토킨 경의 팔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오호라, 저 정도의 스킨십은 이제 자연스럽다, 이건가?

음흉한 내 웃음에 레니가 내 시선을 따라가다 역시 나와 똑같은 표정이 되어 웃는다. 그런 레니와 내 웃음에 라니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졌다. 그러면서 토킨 경의 팔을 부여잡았던 손을 화들짝 떼어낸다.

"너무 구속해도 매력 없어요."

"네?"

"여자에게는 여자들만의 시간도 굉장히 중요하답니다."

"……."

레니가 제법 다부진 표정으로 충고하듯 입을 열었지만 아무도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심지어 페터 리제도 공자도 대꾸하지 않았다.

'음, 라니가 좀 약하게 나가는 걸.'

원래 남편은 초반에 제대로 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랬다. 누가? 우리 엄마가! 엄마는 결혼 초가 아니라 연애 초부터 아빠를 휘어잡았노라 말하며 당당하게 웃었다. 이 분위기대로라면 왠지 루이 토킨 경한테 라니가 잡혀 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내가 얼른 입을 열었다. 라니가 초반부터 잡혀 살게 된다면 라니에겐 영영 다음 술판이 없으리라. 그렇게 둘 순 없지!

"흠흠. 경, 이 피로연 준비한다고 제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시죠?"

"……감사합니다."

"그런 말을 듣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고요."

"……."

"혹 이 정원을 누가 꾸몄는지 기억하시나요?"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돌돌 말아가며 짓궂게 묻자 레니가 킥킥 웃어댔다.

"정원사 이름이 아문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맞아요. 잘 기억하시네요. 그런데 그 아문을 누가 데려온 건지는 혹시 기억하시나요?"

"……아가씨가 데려왔죠."

나는 고개를 주억거려댔다. 그리고 최대한 상큼한 표정을 유지하며 손가락으로 단상을 가리켰다. 정확히 말하면 단상 위 조명을, 그리고 단상을 꾸미고 있는 꽃 장식을.

"저 조명 누가 세팅했을까요?"

"……아가씨죠."

"저 단상 주위의 꽃 장식은 누가 했는지 아세요?"

"……아가씨입니다."

이번에는 주위에 잘 가꿔진 테이블을 쭉 가리켜보였다. 내 손가락을 따라 사람들의 시선이 함께 움직인다.

"다 누가 손썼을까요?"

"저것들은 새론이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새론을 누가 데리고 왔구요?"

"……아가씨죠."

"맞아요."

"……."

아, 재밌어, 재밌어, 재밌어.

……오해마라. 내가 한 말이 아니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사키 경 얼굴에 한가득 쓰여 있는 말이다. 아까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분명 있었던 사키 경과 젠 경 그리고 호세 경의 모습이 피로연장에선 보이질 않기에 어디 갔나 싶었는데. 무슨 일을 하고 온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 그 세 사람은 아주 흥미진진한 얼굴로 루이 토킨 경의 뒤에 서서 내 입만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사키 경의 얼굴은 나를 찬양이라도 해댈 듯 반짝거려댔다.

"마지막으로 라니랑 맺어준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누구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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