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8 회: # 8 -- >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기의 약혼녀 후보들을 언급하는데도 그의 표정과 말투는 시큰둥하기만 하다. 그 모습에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결혼한다면 너와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기억나지 않나 보군. 예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참으로 형편없는 기억력이야."
귓가에 속살거리는 그의 달콤한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다. 하지만 애써 어처구니없다는 듯 코웃음을 쳐보였다.
"저 사랑하세요?"
"뭐?"
"저 사랑하시냐구요."
조금도 설레지 않는 목소리로 또 조금도 기대하지 않는 목소리로 전에 물었던 질문을 다시 입에 담자 그가 빤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본다. 싸늘해 보이기조차 하는 그 시선에 파르르 몸이 떨려온다.
아아, 맞다. 당신은 이런 질문, 좋아하지 않지.
그렇다고 저렇게까지 불쾌해 하지 않아도 좋을 텐데. 이럴 때의 그는, 좀 무서우니까. 허리에 얹힌 단단한 손을 당장이라도 치우고 싶을 만큼. 하지만 정말 그랬다간 그의 기운을 더 냉랭하게 만들 뿐이라는 본능적인 깨달음에 나는 긴장으로 굳어지려는 몸을 애써 풀어내려 노력하며 최대한 장난스런 목소리를 내었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발랄하지 못한 목소리가 튀어나온 건, 내 노력부족 탓만은 결코 아니리라.
"전에도 말씀드렸잖아요. 저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고요."
"하?"
"비웃으셔도 어쩔 수 없어요. 그게 엄마 아빠의 소원이었으니까요."
이 남자가 사랑에 시큰둥하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그렇다고 나까지 사랑에 시큰둥한 것은 아니다. 그러기엔 내가 겪은 사랑은 크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더럽고 끔찍했던 배롤린 가(家)에서조차도 그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었을 정도로.
손가락으로 콧잔등을 긁어대며 가라앉은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띄워보기 위해 웃어보였다. 이 남자는 남의 결혼식장에 와서 왜 이렇게 어두운 오로라를 팍팍 풍겨대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뮤님께 사랑과 결혼이 하나의 공식을 이룬다는 것을 강요하진 않겠지만 저는 안돼요. 저는 그 공식을 따로 생각할 수 없어요. 무시할 수 없다고요."
"하. 그래서 넌 너를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결혼하겠다?"
서늘한 목소리. 평소와 다를 게 없는 것 같으면서도 그 안에 내포된 건 분명 차갑고도 차가운 기운이다. 소름이 온 몸에 돋아나 다시 한 번 몸을 부르르 떨어댔다. 이번엔 많이 무서웠다. 그가, 이 남자가.
"아직까지는 결혼에 뜻이 없답니다. 제 결혼은 훗날 뮤님이 저를 버리고 나면 그때 생각해 볼게요."
"……."
"그 전엔 꿈도 꾸지 않을 테니, 그만 역정을 푸시는 건 어떨까요?"
평소 잘 부리지도 않는 애교까지 부려보였건만 이 남자의 냉랭한 분위기는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재미있다는 듯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참는 모양새다. 그 웃음이 즐거워서 짓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허나 그 매력적인 모습에 주위 사람들의 나지막한 탄성이 울려 퍼졌다.
그래, 당신은 그런 뒤틀린 웃음조차 매력적이다. 그런 것조차 아름답다.
심장이 콩닥콩닥 뛴다. 무서워서 이리도 뛰어대는 건지 이 남자에게 두근거려 이리 뛰어대는 건지 이젠 나도 모르겠다. 그저 바보 같이 뛰어대는 심장을 필사적으로 다독거려줄 뿐.
그에게선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계속 되는 무거운 침묵에 나는 내내 그의 눈치를 살펴가며 불안한 마음을 달래야 했다. 심지어 내가 직접 맞춘 단상 위 조명 빛을 받으며 루이 토킨 공자와 라니의 감사 인사말이 울려 퍼지는 그 감동적인 순간에조차 집중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내가 두 손 두발을 다 들어보였다.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꾸중은 나중에 들을게요. 그러니까 제발 기분 좀 푸세요, 네? 다른 날이면 모를까 오늘은 라니의 결혼식 날이라고요. 기분 좋게 보내고 싶단 말이에요. 부탁해요, 네?"
"이기적이군."
"제가요? 어째서요?"
딱히 내가 잘못한 일이 없는데. 그런데도 먼저 사과까지 했다. 그런 내가 어째서 이기적이란 말인가?
"내가 기분 좋아지기 싫다면?"
나 원 참. 애 같기는. 이 말을 누가 들었을까 걱정될 정도다. 눈을 데굴데굴 굴려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다행히 우리 곁에 가까이 다가와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이 남자를 달래야 이 순간을 무난히 넘길 수 있을까? 난 외동딸이라 사람을 달래주거나 하는 건 잘 못하는데. 해본 적이 있어야지. 그렇다고 이 남자를 말로 설득하자니 그저 막막하기만 하고.
결국 난 한숨을 내쉬었다. 대놓고 지은 한숨이었다. 답답한 내 심정 좀 알아달라는 듯이. 당신 내 답답함 좀 들으라는 듯이 그렇게.
어디 테라스가 비어 있으려나? 아, 저기 비어있네.
사람이 없는 테라스 위치를 확인해보고 그쪽으로 발걸음을 놀렸다. 내 허리를 감싸고 있던 그가 당연하다는 듯 나를 따라 붙는다. 테라스로 나가 문을 닫고 남들이 보지 못하도록 커튼을 쳤다. 우리가 걸어가던 내내 끊이지 않았던 시선이다. 테라스에 나갔다고 알아서 시선을 돌려줄 친절한 사람들이 아니란 소리다.
테라스에 마련된 푹신푹신한 의자에 앉으며 나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참 잘생겼다, 이 남자.
"앉으세요."
툭툭. 옆자리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여기에 앉으라고. 그런데 이 남자, 다리가 얼어붙은 건지 가만히 서있기만 한다. 계속되는 그의 냉담한 시선에 조금은 침울한 기분이 되었다. 이제 저런 시선은 그만 받고 싶은데. 내가 몇 번이고 앉으라는 뜻을 내비쳤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목 아파요. 좀 앉아주세요, 네?"
다시금 옆자리를 손가락으로 툭툭 쳐대며 우울한 목소리로 권해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그대로일 뿐이다.
"계속 그러고 계실 거예요?"
그때 그가 내 얼굴로 손을 뻗어왔다. 조심스럽게 볼을 쓰다듬는 손길은 차가운 눈빛과는 다르게 마냥 따뜻하기만 하다. 그 따뜻함을 즐기며 눈을 감았다. 양 손바닥이 얼굴을 한가득 덮어온다. 곧이어 요 며칠 다정하게만 굴어댔던 그의 입술이 내게로 내려앉았다.
"으음."
그와의 키스는, 어떨 땐 무척이나 절박하게 느껴지곤 했다. 마치 내게 숨을 불어넣어주는 것 같다고나 할까. 기분이 우울하게 가라앉아있을 때나 라니의 일로 오만가지 걱정에 휩싸여 있을 때, 그의 다정한 키스는 내 날카로웠던 신경을 튼튼한 동아줄로 바꾸어주곤 했던 것이다.
"하아."
그래서 지금과도 같은 이 키스가 나는 정말 좋았다. 아주 많이많이 좋았다. 이렇게 그의 커다란 손이 내 볼을 완벽히 감싸 안고 하는 이 키스가. 내 망상에 불과한 것이겠지만 이렇게 그와 입술을 붙이고 있을 때면 마치 이 남자가 내게 매달리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곤 했다. 입술이 맞닿은 상태로 야하게 비벼대는 그 짜릿함도 설레고 좋다. 그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내 아랫입술의 터질 것 같은 아릿한 감각도 좋고, 모든 것을 흡입하겠다는 듯 강렬하게 숨결을 불어넣는 그 열정도 미치도록 설렌다.
조금씩 호흡이 빨라져갔다. 입술과 입술이 제법 오랜 시간 서로에게 머물렀다. 양 손이 찌릿찌릿 간지럽다. 그의 목에 두르고 싶어서.
두를까, 말까, 두를까, 말까?
고민하다 그만 두었다.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품 안으로 안겨들고 싶지만 그러면 키스가 더 길게 이어질 것 같아서 또 키스로 끝내고 싶지 않을 것 같아서. 아무리 좋다 할지라도 이곳은 밖이고 게다가 지금은 라니의 결혼식 피로연을 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공작성으로 일찍 돌아가고 싶지 않다.
끝이 보이지 않도록 이어지는 키스를 그의 가슴을 밀어내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그는 순순히 물러나주었다. 침으로 번들거리는 그의 입술을 보자 부끄러움과 동시에 엄청난 열락이 몸을 감싸 안는다.
살짝 몸을 뒤로 빼었다. 여기서 사고치고 싶지 않으면 이 남자와의 안전거리를 유지해야 안전할 거라는 생각에 웃음이 절로 나온다.
"그래서, 이제 좀 화가 풀리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