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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아름답다-116화 (116/206)

< -- 116 회: # 8 -- >

"샤워 준비를 하라 해야겠군."

"됐어요. 혼자 하는 게 편해요."

온 몸에 흔적이 장난 아닐 텐데.

"점심 먹고 곧바로 나가봐야 해."

그 말은 곧 빨리 샤워하고 나와서 점심 먹자는 소리렷다.

나는 두말하지 않고 새론에게 몸을 맡겼다. 샤워 시중은 새론 외에도 2명이 더 들었는데 그들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나를 씻기고 치장시켜주었는지 절로 감탄이 일었다. 그 중에서도 새론의 손은 거짓말 조금 보태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방에서 먹을 줄 알았는데 식당으로 내려오란다. 1층 개인용 식당으로 내려가자 이미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식당엔 손님용과 개인용이 테이블이 각각의 방에 따로 놓여있는데 개인용은 말 그대로 공작 개인을 위한 것이다. 개인 테이블이라고 해도 다섯 사람 이상은 너끈히 먹을 만치 컸지만 손님용에 비하면 아담하다.

그의 앞에 마주 앉자 기다렸다는 듯이 뜨거운 수프가 나왔다.

모락모락 이는 김. 가만히 그 김을 보고 있자니 시원한 이곳이 뜨거운 사막처럼 숨 막히게 느껴져 왔다. 도무지 못 먹겠다. 나는 수프를 치워달라는 손짓을 보냈다. 시녀 한명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정말 치워도 되냐는 눈짓을 보내온다.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수프를 떠먹다 말고 그가 내게 물었다.

"아, 뮤님은 드세요. 저는 왠지 뜨거운 음식이 안 내켜서요."

"음식은 뜨거운 것이 좋다면서? 오히려 어쩔 때는 너무 뜨겁다 싶은 것만 찾더니?"

"음, 원래는 그랬지요. 그런데 저번에 땡볕에서 일했었잖아요. 아무래도 그때 더위를 먹은 것 같아요."

엊그제부터 라니의 예비 저택에서 정원손질 일을 시작했더랬다. 야생의 느낌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정돈된 느낌을 주기 위해 하루 종일 땡볕에 쭈그려 앉아 일했더니 온 몸에 근육통이 생겨버렸다. 특히 종아리와 허벅지가 마비될 정도다. 허리는 한동안 피지도 못할 정도로 심하게 굳어버렸다. 쭈그려 앉아 일하는 바람에 내가 정원에 있었다는 것을 몰랐던 시녀들은 루이 토킨 공자가 흙과 땀을 뒤범벅된 나를 찾아내기 전까지 발만 동동 굴렸다고.

모자를 쓰고 햇볕에 살이 타지 않게 하기 위해 긴팔을 입고 있었던지라 다행히 피부는 다치지 않았지만, 열기는 피할 수 없었다. 원래 땀을 잘 흘리는 내가 아닌데 그날은 땀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상태가 그 지경까지 되다보니 이제는 열기보다 갈증과 현기증이 더 큰 문제가 되어버렸다. 나를 찾아내 내 기막힌 몰골을 확인한 루이 토킨 공자의 얼굴은 가히 볼만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이 남자는 밤늦게 공작성으로 돌아온 주제에 곤히 자고 있는 나를 거칠게 깨워댔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바보 같은 짓을 하면 가만두지 않겠노라고 으르렁거렸지.

"그럼 공작 가(家) 사람들 좀 빌려주시던가요! 다른 사람 일도 아니고 뮤님 보좌관 일인데."

누구의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 이었던지라 냉큼 그렇게 말하자 그는 진짜 바보를 보는 것 같은 시선으로 한동안 나를 노려보았다.

"네가 알아서 데려가."

"정말이죠? 나중에 딴 소리 하지 마세요."

그래서 그 다음날, 나는 공작 가(家) 사람들 무려 스무 명을 데리고 라니네 저택으로 쳐들어갔다. 얼마나 뿌듯했는지 신만이 아시리라. 루이 토킨 공자가 꺼멓게 변한 얼굴로 이래도 되느냐고, 공작님께 허락은 받은 거냐고 물어댔지만 그 얼굴이 너무 재미있어서 그 남자가 허락해 주었다는 둥의 말은 끝까지 하지 않았다. 흐흐.

어쨌든 더위 먹은 것 같은 내 증상은 엊그제 있었던 땡볕 아래에서의 정원 일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런 내 변명에 이 남자의 얼굴이 다시금 삐뚤어졌다.

"오늘도 정원 손질을 할 셈인가?"

"얼마 안 남았어요. 아주 멋진 정원이 만들어질 것 같아요. 이 공작성 못지않은. 반은 제 작품이라고요."

자랑스럽게 고개를 주억거리자 그가 혀를 차댄다.

"공작성보다 멋진 정원을 만들든 그렇지 않든 난 네가 직접 그 일을 할 거냐고 물었는데?"

그렇게 묻는 그의 시선은 정확히 내 손을 향하고 있었다. 찔리는 것이 있었기에 슬그머니 손을 오므려 그의 시선으로부터 손가락을 보호했다. 정확히 말하면 손가락 끝을 보호했다. 이미 깨끗이 치료했음에도 불구하고 본능적으로 그리 한 행동이다.

"……아문 시킬 거예요."

내 멋대로 혼자 일했던 그날 그 사건의 파문은 생각 외로 컸다. 가까스로 햇볕으로부터 내 피부는 지켰지만 굳은 땅과 거친 흙으로부터 내 손톱은 지키지 못했던 탓이다.

하지만 원래 정원 일을 하다보면 손은 어쩔 수 없이 다치기도 하고 거칠어지는 법이다. 천천히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했다면 그렇게까지 심하게 다치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라니네 정원을 가꾸기엔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덕분에 내 손은 인정사정없이 망가져 버렸고.

갈라지고 망가진 손톱과 쩍쩍 찢겨나간 손가락 끝 살덩이를 본 그는 심기 불편한 내색을 전혀 감추지 않으며 포션을 가지고 와 그 비싼 것을 내 손에 마구 뿌려댔다. 이 공작성의 포션은 왜 이렇게도 시시한 일에만 사용되는지 모르겠다. 이젠 포션에게 민망한 감정을 넘어 미안하기까지 할 지경이다.

더위를 먹은 것 같다는 내 말이 전해졌는지 주방에서 시원한 것들을 서둘러 만든 모양이다. 화채를 비롯한 냉채류 음식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하. 그런데 이걸 어쩐담?

그 경이로운 속도엔 감동했지만 나는 난처한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왜?"

어색하게 웃음을 뱉어내는 내 모습에 그가 또 맘에 들지 않는다는 뉘앙스를 팍팍 풍기며 날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중에서도 오이냉채를 보며 나는 인상을 가득 찌푸렸다.

"더위 먹은 것 같다 하지 않았던가?"

"그건 그렇지만요……."

"그런데?"

기어코 그가 먹고 있던 식기를 내려놓았다. 탁. 갑작스럽게 중단된 식사에 테이블에 음식을 내려놓던 시녀들의 손동작이 그대로 멈춰 섰다. 분위기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시녀들은 어찌해야 좋을 몰라 서로의 눈치만 보며 안절부절 못한 채 서 있었다.

"말."

"음, 그러니까요, 제가 몸이 좀 차서요."

그가 계속말해보라는 듯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몸이 차서 땀은 어지간하지 않으면 잘 안 흘리는데 반해 조금만 추워도 체온은 금방 내려가거든요. 찬 음식을 먹으면 속이 뒤집히기도 하고요. 후덥지근하지 않은 날씨에 찬 걸 먹으면 바로 배탈 나고요. 과일도 찬 과일은 잘 못 먹는걸요. 아주 가끔, 정말 가끔 땀을 흘릴 정도로 날이 더울 경우에 아이스크림은 먹기도 하지만요."

조심스럽게 말하며 나는 그다지 가깝게 놓여있지도 않은 오이냉채를 더 멀리 치워버리고 싶다는 듯 밀어냈다. 정말 오이는 쳐다보기도 싫었다.

"특히 오이는 먹으면 바로 속이 뒤틀려요. 그래서 어렸을 때 우리 집에서 오이는 절대 금물이었어요."

"……."

"물도 레니나 라니는 얼음을 넣어 마시는 반면 저는 그냥 마시는 편인 걸요."

그는 내 앞에 수북이 놓인 찬 음식들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다 치워."

짧지만 단호한 그 말에 손에 들고 있던 다른 찬 음식들은 테이블 위에 내려지지도 못한 상태에서 그대로 물려져야 했다. 그리고 내 앞에 놓였던 음식들도 재빠르게 치워졌다. 식탁에 내려지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였다.

나는 다시 무난한 음식들을 내오는 시녀들을 향해 조금 미안한 마음으로 웃어보였다. 이번엔 차가운 것은 아예 먹지도 못한다는 말이 금세 또 주방으로 전달된 모양인지 차갑지 않은 그렇다고 뜨겁지도 않은 것들이 나왔다. 더는 투정부리면 큰 일이 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이번엔 얌전히 음식을 들었다. 한동안 내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그가 군소리 없이 먹는 내 모습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쿠. 잔소리가 길어지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가 다시 식사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잔소리.

요금 그의 입에서 자주 튀어나오는 말들. 그것은 분명 잔소리다. 아무도 믿지 않았고, 심지어 그의 보좌관들 역시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았지만 그건 잔소리가 맞다. 예전 엄마가 아빠한테 해댔던 그런 잔소리 말이다.

"왜 아무도 내 말을 안 믿어주는지 모르겠어요."

내 말을 들은 새론은 재밌어 죽겠다는 듯 입을 실룩거려댔다. 이 정도면 새론의 입장에서는 정말 크게 웃음 셈이다. 평소에 짓는 웃음이란 게 한쪽 입술 끝이 희미하게 올라가는 것이 전부인 새론에게는 말이다. 나는 실룩거려대며 웃어대는 새론에게 잔소리가 맞다, 분명하다, 내가 장담할 수 있다 주장하며 그 잔소리 때문에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라고 하소연 해댔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그는 바로 황궁으로 갔다. 나는 정원에 가득 심어진 텔꽃을 뿌리가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뽑으라고 말하고 그것들을 라니의 저택으로 가져갔다. 루이 토킨 공자는 내가 직접 나서지 못하게 감시라도 하려는 듯 열심히 지시를 내리는 내 곁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 남자한테 한 소리 들은 모양이다.

"공자, 할 일 없으세요?"

"많습니다."

"그럼 가서 다른 일 보세요."

"새론을 저 대신 여기로 부르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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