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5 회: # 8 -- >
"아가씨, 그만 일어나세요. 식사 하셔야죠."
저 멀리 아득한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상냥하고 다정한 것이었지만 지금 내게는 귀찮기 그지없는 것일 뿐이다. 나는 건들지 말라는 듯 손사래를 쳐댔다. 고개도 마구 도리질 해댔다. 얼굴 가득 인상 써주면서. 식사보단 잠을 선택하겠다는 뜻을 전하듯이 강하게.
"어제 저녁도 안 드셨는데."
어제 저녁을 못 먹은 건 내 탓이 아니다. 나라고 식사를 거르고 싶었겠는가.
하지만 지금은 식욕보다 수면욕이 훨씬 더 강렬하다. 더는 방해하지 말아달라는 듯 고개를 침대 깊숙이 박았다. 그러자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물러가는 발걸음 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만족스런 미소를 짓고 다시 맘 편히 꿈의 나라로 빠져들었다.
그 뒤로 얼마나 더 잤을까?
내게는 한순간에 불과한 것이었으나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게 짧은 시간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또 다시 누군가 나를 깨우려는 듯이 몸을 흔들어댔다. 따뜻하고 익숙한 손길이었지만 지금 내게는 그토록 짜증스러울 수 없었다.
"싫……어."
건들지 말라는 의미로 내가 몸을 사납게 비틀어댔다. 강한 내 거부에 나를 흔들던 손길은 금세 떨어져나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한 건 아닌 모양이다. 잠시 후 들려온 목소리는 잠기운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던 나를 한순간에 멀쩡한 정신으로 돌아오도록 만들었다.
"대체 언제까지 잘 생각이지? 이제 그만 일어나."
푹신한 침대 한쪽이 내려앉았다. 얼굴로 흘러내린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 올려주는 손은 내게 무척이나 익숙한 것이었다.
"잠꾸러기가 따로 없군."
그 목소리는 내가 어느 정도 잠에서 깰 수 있도록 도와주었지만 나는 여전히 빈둥거리고 싶었다. 더 자고 싶기도 했고. 게다가 많이 잔 것 같아도 몸은 여전히 피곤했다. 그랬다. 그건 다 이 남자 때문이다. 그러자 더 일어나기가 싫어졌다. 나는 베개를 내 얼굴 위로 올려 시야를 깜깜하게 만들려 했다.
더 잘 거야! 깨우지 마!
하지만 그런 시도는 내 손에서 베개를 빼앗은 그가 저 멀리 베개를 던져버리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
"그만 일어나라. 벌써 점심시간이다."
"우우. 구박하지 말아요.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요."
베개가 없어도 빛을 가리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그 중 가장 간단한 것은 고개를 침대 바닥에 박아버리는 거다. 덕분에 눌린 목소리가 윙윙거리듯 진동음처럼 들려왔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예쁜 목소리는 애초에 글렀다. 잠기운에 목소리가 심하게 가라앉아있었기 때문이다.
"누구 때문인데?"
정녕 모르겠다는 그의 뻔뻔한 대꾸에 나는 뜨기 싫었던 눈을 억지로 뜨고 고개를 슬쩍 돌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깔끔한 정장을 입고 침대에 걸터앉아있는 그의 모습은 금욕적인 사람처럼 한없이 곧아 보였다.
핫! 금욕적? 누가? 저 남자가? 말도 안 돼.
금욕이란 단어가 저 남자와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단어진지 세상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자부하는 내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다 하다니. 이래서 외양은 중요한 건가 보다.
"괴물."
진지하고 객관적으로 그를 평가하자면 그는 괴물에 가까운 남자다. 아니, 내 눈에 이 남자는 이미 괴물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엄청난 체력을 설명할 수 없을 테니.
불쾌할 수도 있었을 내 말에도 그는 화내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내게 조금은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이렇게 내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원인이 이 남자와 아예 무관하다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근 몇 주 동안, 그는 매우 바빴다. 물론 그는 항상 바쁘다. 하지만 요 근래에는 특히나 더 바빴다. 황궁에 들락날락 거리기 일쑤고, 한번 황궁에 가면 늦게 돌아왔다. 그래서 오랜만에 함께 밤을 보낼 때면 그는 그동안 나를 안지 못했던 것을 한꺼번에 보상받겠다는 듯이 밤새도록 한시도 날 내버려두지 않았더랬다.
바로 어젯밤에도 그는 나를 사정없이 몰아쳐댔다. 평소의 여유로운 태도도 없었고, 거칠게 숨을 몰아쳐 대는 날 위해 쉬는 시간을 주었던 배려도 어제는 기대조차 할 수 없었다. 덕분에 온 몸 이곳저곳 안 아픈 곳이 없다. 밤새 물리고 빨렸던 가슴 꼭지는 가만히 내버려 두고 있는 지금까지도 찌릿찌릿 거려댔고 꼭지 주위로는 키스마크가 민망하리만큼 많이 새겨져 있었다. 다리 사이는 조금만 움직여도 쓰린 통증이 일었다. 이러니 괴물이라고 하지. 거짓말 안하고 오늘 아침까지 나는 괴물에게 혹사당한 것이다.
그래, 그건 혹사였어. 분명 난 이 방에 가득히 들어차는 햇살을 보며 잠이 들었거든. 어스름한 새벽 빛 따위가 아닌 진짜 햇살을 보며 잠들었었다고.
그 말은 즉 이 남자 역시 그 시간까지 잠을 자지 못했다는 거 아닌가?
그런데 참 이상하다. 저나 나나 똑같이 잠 못 잔 건 매한가진데 이 남자는 이토록 멀쩡한 반면 나는 꼴사납게 망가져있다. 그러니 내 어찌 부아가 치밀어 오르지 않겠는가. 당신은 그렇게 밤을 새고도 어떻게 이리도 멀쩡할 수 있나. 오히려 찬란하기까지 하다.
"이제 조금은 익숙해진 모양이군."
"예?"
볼을 가만가만히 쓰다듬는 그의 손길에 기분이 절로 들떠버렸다. 늘어졌던 몸은 노릇노릇하게 바뀌고. 얼굴 위로 드리우는 그림자를 따라 올려보니 어느새 가까워진 그의 얼굴이 보였다. 눈빛 속에 일렁이는 남자의 욕망이 가슴 속의 열기를 지피 운다. 그의 입술이 내 입술 위로 가만히 내려앉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기운에 눈을 감았다. 밤새도록 징그럽게 해댔던 키스건만 참 신기하다. 똑같은 키스에도 매번 몸이 달아오르는 걸 보면.
"흐음."
모든 게 다 다정했다. 내 치아를 쓰다듬는 그의 혀도 맞닿은 숨결도.
"네 몸이 내게 많이 익숙해졌다."
"……그런 말은 대놓고 하지 말아주실래요?"
그런 말은 민망하다. 창피하고. 이제 겨우 18살밖에 안됐는데, 남자에게 익숙해졌다는 말 같은 거 별로 듣고 싶지 않다.
"부끄러운 건가?"
쀼루퉁해진 내 얼굴에 그가 웃었다. 날 어린애로 보는 것 같은 그 얕잡음에 기분 나빠진 나는 내게 가까워진 그의 상체를 밀어대며 입을 삐죽거려댔다.
"그런 말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실 만큼 연세가 많으셔서 좋으시겠어요."
딱히 그를 자극할 심산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그저 심술이 났을 뿐. 웃는 모양 그대로 나를 빤히 쳐다보는 그의 시선에 나는 이 주둥아리가 또 사고 쳤음을 깨달았다.
그는 그와의 나이 차이가 많다고 강조하는 말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사실 우리는 남들의 눈치를 볼만큼 나이차가 많이 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런 말들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죄송해요. 말실수했어요."
심술이고 심통이고 뭐고, 일단 잘못에 대해선 재빠르게 사과하는 것이 좋다. 그건 만고불변의 진리지. 암, 그렇고말고. 입을 열어 채 불쾌함을 표하기도 전 서둘러 사과를 건네는 내 말에 그가 피식 웃었다. 그는 나를 혼내는 대신 다시 고개를 숙여 입술을 맞붙여왔다.
"으음."
사실 그의 말이 틀린 것만은 아니다. 그와의 키스에 익숙해진 건 사실이니까. 봐라. 내 팔이 자연스럽게 그의 목을 감고 있지 않은가. 이 정도면 익숙해 졌다는 말에 부인할 수 없으리라.
비스듬히 일으켜진 맨 등을 단단하고도 뜨거운 그의 손이 받쳐주고 있었다. 그 손에 맘껏 기대었다. 손 하나에 온 몸을 맡겼음에도 일말의 불안감도 들지 않았다. 기대는 것에 망설임도 없다. 한 팔로도 내 몸무게 정도는 거뜬히 소화해 내고도 남는 괴력이 이 남자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란 동물은 참 신기해. 어떻게 그런 힘을 키울 수 있는 건지.
어쨌든 나는 나를 받쳐주는 그 손에 편하게 몸을 의지하고는 그가 주는 황홀감을 즐겼다.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그에게 전해질까 조금 걱정되었지만 키스하는 중이니 그저 그 때문이라 여겨주겠지 싶다.
아, 거기는 아픈데.
그때 그의 다른 손이 한쪽 가슴을 움켜쥐었다. 물컹물컹 부드럽게 주물러주었지만 간밤의 흔적이란 건 엄청난 것이어서 몸이 절로 찌릿찌릿 움찔거려댔다. 내가 많이 아파하고 있단 걸 알았는지 오래지 않아 그가 가슴에서 손을 떼 준다.
"마나가 전보다 늘었어."
그의 목소리는 조금 가라앉아있었다. 그것이 나 때문이라는 사실이 퍽이나 흡족하다. 나는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바보 유니시이나. 그렇게나 많이 했는데 아직도 키스할 때 숨 쉬는 법도 모르고.
"열, 열심히 훈련했으니까요."
"그래."
"그래도 아직 멀었죠?
툭. 그의 목에 둘렀던 손에 힘을 풀자 팔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아직도 멀었냐는 말은 질문이 아니다. 이미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열심히 해."
그는 부족하다는 식의 말은 하지 않았다. 언제나 열심히 하라고 한다. 하지만 그게 아직 많이 빈약하다는 내 말을 긍정한 것임을 내 어찌 모르랴. 눈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자 그가 피식 웃으며 잠결에 헝클어졌을 것이 분명한 내 머리를 가지런히 쓸어주었다.
"샤워 준비를 하라 해야겠군."
"됐어요. 혼자 하는 게 편해요."
온 몸에 흔적이 장난 아닐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