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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아름답다-113화 (113/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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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혹시 내 보물들에 무슨 이상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이상이 생기다? 레니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눈을 몇 번 깜빡거려보았다. 사람도 아닌 책에 딱히 이상이라는 것이 생길 수 있는 건가 싶어서. 그것도 아무도 건드릴 리 없고 탐내는 이도 없는 그런 책에 말이다.

"훼손되었다든가 버렸다든가, 버렸다든가……. 그래, 설마 버린 건 아니겠지? 응?"

그렇게 되묻는 레니의 목소리엔 짙은 염려가 깔려있었다. 누가 들으면 가족들 중 한 사람이 아픈 게 아닌가 여겨질 만큼 절실한 목소리였다.

"누가?"

"그야 나도 모르지! 너 공작성에 거주한 게 벌써 3달이 넘어. 3달 동안 별장엔 한 번도 안 갔었잖아."

"가보진 않았어."

별장은커녕 외출도 쉽지 않은 걸.

외출이 쉽지 않은 건 공작이 내 외출을 허가해주지 않아서가 아니다. 외출을 한다하면 따라붙는 그 남자의 사람들이 심히 부담스러워서다. 루이 토킨 공자를 스타트로 사키 경, 젠 경, 호세 경 등 이 4명 중 공작성에 있는 사람이 내 외출 시 호위를 맡았는데 그 어찌 불편하지 않을 수 있으랴. 바쁘다는 티 팍팍 내가며 호위하고 있는 그들의 호위 아닌 호위를 받고 있자면 아무리 나라고 할지라도 외출을 삼가게 된다. 그들은 죄다 서류를 들고 나를 호위 했던 것이다. 정말 체하는 줄 알았더랬다.

"설마 별장 시녀들이 내 책들에 손댔을까?"

한층 더 걱정스러워진 레니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야 나도 모르지."

정말이다. 정말 모른다. 책들의 안부 따윈 한 번도 고려해 보지 않았으니까. 그것들은 레니의 보물이지 내 보물이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레니가 사랑하는 그 책들이 난 맘에 들지 않았다. 그 책에 나와 있던 조언대로 따라했다가 좋았던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걱정되면 이제 슬슬 가져가지 그래?"

"헐. 지금 내 방에 있는 책들도 생명이 위험한데 무슨. 아빠가 다 버리라고 난리야. 리제도 백작 가(家)로 가져갈 생각도 말라고 얼마 전엔 소리까지 치셨다고."

하긴, 고지식하고 보수적인 롱아르 백작이라면 레니가 그런 책을 읽는 것이 아닌, 단순히 가지고만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펄펄 뛰어댈 사람이지. 하물며 백작 가(家) 레니의 서재에 비치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순수하고 깨끗한(?) 책들이다. 그럼 별장에 있는 책들은? 별장에 가져다 놓은 것들은 그것들보다 한 단계도 아닌 수십 단계 높은 소설들이다. 만약 그 소설들 중 한권이라도 롱아르 백작이 보게 된다면 백작은 결혼식을 올리기 전날까지 레니를 신전에 처박아 놓을 지도 모른다.

아, 신전 하니까 갑자기 그 신전이 생각나네. 몇 달 전 뜻하지 않게 머물렀었던 그곳이. 그날 밤 내게 친절을 베풀어주었던 얼굴도 가물가물한 그 신관은 잘 지내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러다 곧 생각을 지웠지만.

"유니시이나 영애?"

그때였다. 누군가 나를 부른 것은. 전혀 모르는, 어쩌다 들어본 적도 없던 목소리에 의아한 마음으로 고개를 돌리자 역시나 처음 보는 영애가 뒤에 호위기사로 보이는 기사를 한명 대동한 상태로 서 있었다.

"스잔나 노르젠 후작영애로군요."

다행이 그녀가 누군지 레니는 알아본 모양이다. 서둘러 인사를 건네는 레니의 모습을 곁눈으로 흘끔대며 나는 레니가 말한 그 이름을 곱씹어 보았다.

스잔나 노르젠 후작영애? 노르젠, 노르젠, 노르젠 후작 가(家)라……. 아! 혹시 그 남자와의 약혼이 가장 유력해졌다고 소문난 영애가 바로 그 노르젠 후작 가(家)였던가? 그리고 내 기억이 맞는다면…….

'언젠가 라니가 올라탔었던 그 마차의 주인이기도 하겠네.'

라니와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영애라는 생각에 나는 그녀에 대한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사람을 경계하는 라니와 친분이 있다라……. 그때 라니가 마차에 올라타는 것을 내 눈으로 보면서도 나는 그게 내심 신기했었다.

그런데 이 영애가 어떻게 내 이름을 아는 걸까?

"레니아 롱아르 백작영애로군요."

레니와 간단한 인사를 마친 그녀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돌아본다. 딱 봐도 고귀한 귀족 가(家)의 영애답게 그녀는 기품 있어 보였다. 마치 언젠가 그 남자의 부인이 되어야 한다면 이 영애를 그 곁에 세워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나는 절대로 흉내 낼 수 없는 그 자태에 찌릿, 심장이 조여 왔다.

"유니시이나 영애가 맞지요? 한번 뵙고 싶었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유니시이나라고 합니다."

내 소개를 할 때 배롤린의 성을 붙인 적은 단연코 단 한 번도 없다. 하지만 내가 배롤린 가(家)의 양녀로 들어가 있는 건 사실이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를 유니시이나가 아닌 배롤린으로 불렀다. 그도 그럴 것이 귀족들의 세계에서 이름은 쉬이 허락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곧 결혼을 앞둔 라니는 며칠만 지나면 배롤린 영애가 아닌 토킨 부인이라 불리겠지. 참 웃기는 일이다. 친 딸도 곧 벗어나게 될 그 성을 양녀인 나는 벗어나질 못하고 있으니.

그야 당연하지. 나는 그의 아내가 아닌 정부에 불과한 걸.

씁쓸한 아픔이 심장을 콕콕 찔러댔지만 오래 두진 않았다. 잡념은 잠시 접어두고 나는 눈앞의 영애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스잔나 노르젠 영애는 분명 나를 배롤린 영애가 아닌 유니시이나라고 불렀다. 대체 왜? 라니 때문인가? 만약 내가 배롤린의 이름을 혐오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배롤린 가(家) 핏줄을 정통으로 이은 자라면 허락지도 않은 이름을 멋대로 부른 건 큰 실례가 된다. 내가 처음부터 귀족 가(家)의 사람이 아님을 알고 일부러 저러는 건가? 날 모욕하기 위해서?

"……."

하지만, 하지만 스잔나 노르젠 후작영애의 눈빛 속에는 나를 향한 그 어떤 불쾌감이나 경멸 따윈 없어 보인다. 오히려 나를 보는 그녀의 눈빛은…….

'친근감.'

그래, 저 눈빛은 분명 친근감이다. 하지만 어째서? 왜? 나는 그녀에 대해 전혀 모르는데. 그리고 그녀 역시 나에 대해 아는 것이 없을 텐데.

라니가 그녀의 마차에 올라탄 것을 본 것이 내가 노르젠 영애와 관련된 것을 본 것의 전부다. 게다가 그때도 이 영애의 얼굴은 보지도 못했다. 단지 노르젠 후작 가(家)를 상징하는 가문패만을 본 것뿐. 그런데 그녀는 어째서 저런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걸까? 마치 나에 대해 너무나도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눈빛으로 말이다.

"라니 영애에게서 그동안 영애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답니다."

그런 내 경계심을 느낀 걸까?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스잔나 노르젠 후작영애가 입을 열었다.

"제가 갑작스럽게 말을 걸어 많이 당황하셨나 봐요. 그렇다면 사과드릴게요."

"아, 아니에요. 조금 놀라긴 했지만 괜찮습니다."

천천히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레니와 라니에게 사용하는 그런 말투를 사용할 수는 없었기에 말을 고르는데 조금 머뭇거려야 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떠본다. 그러자 방금 전보다 좀 더 침착해진 마음으로 그녀를 마주할 수 있었다.

"훗훗. 전 유니시이나 영애와 친하게 지내고 싶었어요. 라니 영애와 격의 없이 지내는 것 같아서 그동안 많이 부러웠거든요."

살포시 웃으며 말하는 스잔나 노르젠 후작영애의 얼굴엔 한 치의 거짓도 없다는 듯 아름다운 것이었지만 그 겉모습을 무조건 믿어버릴 만큼 난 순진하지 않다. 그러기엔 공작이라는 그 남자에게서 배운 것이 많다.

게다가……, 게다가 라니와 이렇게 가깝게 지내게 된지는 불과 몇 주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이 영애는 알고 있을까? 그 전까지의 라니와 나는 세상에서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멀었던 사이었다는 것을.

"스잔나 노르젠 후작영애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영광입니다."

"아이참. 그렇게 부르지 말아주세요. 전 친하게 지내고 싶다 했잖아요. 그냥 스잔나라고 불러주셨으면 좋겠어요."

이름을 불러달라고? 이름을?

머리가 띵하다. 이 호의를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좋을지 모르겠다. 이 호의가 진심인지 의심되는데. 또한 이런 식의 사교활동은 해본 적이 없었기에 부드럽게 거절하는 법도 모르겠다. 당황한 얼굴로 레니에게 도움을 청하는 눈빛은 보내자 내 눈빛을 받은 레니가 사르르 웃으며 내 곁으로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건 그렇고, 스잔나 노르젠 후작영애께서는 이곳에 어쩐 일로 오셨나요?"

나긋나긋한 레니의 목소리는 평소의 그것과는 많이 다른 것이었다. 진짜 귀족영애 같은 그런 목소리.

"아. 라니 영애의 얼굴을 본지도 오래되었고 또 결혼식 준비로 많이 바쁘다는 말을 전해 들어 제가 직접 찾아왔답니다."

"그러셨군요."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두 영애께서도 이곳에 계셨네요. 참 반가워요. 뜻하지도 않았던 날에 새로운 친우를 사귈 수 있게 되어 참 기쁘네요."

스잔나 노르젠 영애의 말에 레니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살랑거렸다.

"스잔나 노르젠 후작영애께서는 말을 참으로 어여쁘게 하시네요."

"호호호. 무슨 그런 과분한 말씀을."

하지만 레니의 말이 싫진 않았는지 노르젠 영애가 웃음을 터트린다. 그녀는 웃음소리까지 예뻤다.

"스잔나 노르젠 후작영애?"

다급한 목소리, 이건 라니의 목소리다.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조금은 당황한 표정의 라니가 서둘러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라니의 품에 안겨있던 텔이 발버둥 쳐댄다. 라니가 채 우리에게 닿기 전 라니의 품에서 빠져나온 텔은 정원 어딘가로 뛰어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쫓다 다시 라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가까이서 본 라니는 당혹스런 표정을 가리지 못한 채 스잔나 노르젠 영애와……그리고 나를 섬세하게 살펴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불안정한 표정은 곧 갈무리 하고 노르젠 영애에게 인사를 건넨다.

"영애께서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미리 기별을 넣어주셨다면 마중을 나갔을 텐데요."

"우리 사이에 그런 복잡한 예의를 따질게 뭐있나요? 편한 친구처럼 대해달라고 했잖아요."

"영애."

노르젠 후작영애의 말에 라니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어보였지만 그 웃음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스잔나 노르젠 영애는 분명 편히 대해 달라 말했지만 그 말을 들은 라니는 한층 더 그녀를 어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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