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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아름답다-112화 (112/206)

< -- 112 회: # 8 -- >

단상에서 내려오는 라니에게 레니가 활짝 웃으며 다가갔다. 라니가 고개를 젓는다.

"괜찮아. 오히려 즐거워."

그렇게 말하는 라니는 정말 즐거워 보였다.

"그래도 잠시 쉬자. 내가 사람들 많이 데려왔으니까 너는 잠시 쉬면서 차 마셔도 될 거야."

레니가 애교를 부리듯 라니의 손을 잡아끈다. 레니의 그런 막무가내에도 라니는 그저 웃으며 받아준다.

"그래, 우리 잠깐 쉬자."

그런 둘을 바라보다 나는 마법구를 조정해준 시녀에게 다가가 방금 전 다시 고쳐야 했던 부분들을 일러주었다.

우리는 그나마 제일 정돈이 잘 되어있는 응접실로 갔다. 쓱 둘러보니 소파니 장식이니 있을 건 다 있다. 조금 썰렁해 보이긴 해도 이정도면 다른 곳에 비하면 무난하지.

"아~ 좋다."

소파에 그대로 널브러진 레니의 모습은 지금까지 일을 한 나와 라니보다 더 피곤해보였다.

"왜 그래?"

"응?"

"완전 죽을상."

"아. 아빠가 신부수업 스케줄을 너무 빡빡하게 잡아서. 정말 죽겠어."

다 죽어가는 목소리를 보아하니 신부수업이라는 것이 레니에겐 맞지 않는 모양이다.

"페터 오빠도 괜찮다는데 왜 자꾸 억지로 시키는 건지 모르겠어. 정말 필요한 거면 나도 그러려니 할 텐데, 이것저것 별로 쓸모없을 것 같은 것도 막 시키니 그게 짜증나."

"그래도 나름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안 그래?"

"아무래도……그럴 수밖에 없어서."

그렇게 말하는 레니의 얼굴은 어쩐지 좀 쓸쓸해 보였다. 그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기에 나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작 영애와 백작 부인은 엄연히 그 무게가 다른 법이다. 레니가 결혼식을 올리면 더 이상은 롱아르 백작 영애가 아니게 된다. 리제도 백작 부인이 되지. 그러니 백작부인에 걸맞은 역할을 싫어도 익혀야겠지. 페터 리제도 공자는 리제도 백작 가(家)의 유일한 후계자니 레니가 백작부인이 되는 건 이미 정해진 사실이다. 리제도 공자가 백작이 되는 그 날부터 레니는 롱아르 백작 여식으로써 누렸던 게으름이라든가 제멋대로의 방랑은 더 이상 꿈도 꾸지 못하게 되리라. 그에 대한 책임은 고스란히 백작 가(家)로 되돌아 올 테니 아무리 천방지축 레니라 할지라도 전처럼 함부로 굴 수는 없을 테지.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는 어른이 되어가는 구나. 지금은 이렇게 함께 있다지만 우리의 어깨에 짊어져야 할 무게는 각각 다르다. 한없이 가벼웠던 분위기가 순간 내려앉았다. 아직 어리다고 말하고 싶은 우리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다고만 말할 수 없는 무게가 나를, 레니를, 그리고 라니를 감쌌다.

야옹~.

그때 어두운 분위기가 싫다는 듯 애처로운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슬쩍 열리는 문에 널브러졌던 레니가 히힉! 이상한 괴성을 내지르며 재빨리 자세를 고쳐 앉는다.

"실례하겠습니다, 영애들."

루이 토킨 공자였다.

"죄송합니다. 노크를 하긴 했지만 듣지 못하신 줄 몰랐습니다."

정중하게 사과를 건네는 그의 품 안에는 텔이 안겨있었다. 루이 토킨 공자는 재빨리 일어나 그에게 다가서는 라니에게 텔을 건네주었다.

"텔이 찾더군요."

"그래요?"

공자의 말에 라니가 텔을 받아 안는다. 텔은 예의 그 귀여운 표정으로 라니의 가슴에 얼굴을 비벼댔다. 그 애교 넘치는 행동에 라니의 얼굴에 그리고 루이 토킨 공자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진다.

"피곤해 보입니다. 아가씨들과 잠시 쉬세요."

"저는 괜찮아요. 공자야 말로 많이 피곤하실 텐데……."

"전 괜찮습니다."

"……."

"……."

그 둘을 반짝반짝, 부담스런 눈으로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나와 레니 때문일까? 아니면 아직은 어색할 수밖에 없는 사이이기 때문인 걸까?

두 사람의 대화는 매끄럽지 못했다. 마치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 마냥 주저주저, 쭈뼛쭈뼛 거린다.

나는 슬쩍 레니를 쳐다보았다.

음, 부담스러울 만 하겠군.

두 손을 맞잡은 채 무언가 달콤한 사건을 잔뜩 기대하고 있다는 노골적인 레니의 얼굴은 그 누구라 해도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라니의 귀불이 조금 붉어진 것도 같다. 레니를 등지고 선 라니까지 레니의 시선을 눈치 채고 수줍어 할 정도면 대체 얼마나 노골적인 시선이란 말인가.

나 역시 궁금한 건 레니와 다를 바 없었지만 그래도 일단은 두 사람이 친해지는 것이 급선무다. 여기서 우리는 방해꾼에 불과하단 말이다. 특히나

'제발 무슨 말이라도 해주세요, 그 어떤 행동이라도 보여주세요.'

라고 외치고 있는 레니는 이미 방해꾼의 경지를 넘어선 것이렷다. 나는 우악스런 손길로 레니의 손을 잡고 응접실 밖으로 끌었다.

"앗! 너 뭐하는 거야?"

"조용히 해, 이 기집애야. 어서 나오기나 해. 라니야, 차는 이따 마시자. 우리는 홀로 다시 나가볼 테니까 너는 조금 쉬었다 나와. 루이 토킨 공자도 좀 쉬세요. 서로 괜찮다고 말하지만 제가 봤을 때는 둘 다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둘이서 잘 쉬다 이따가, 이-따가 나오세요오~."

"유, 유나!"

라니의 당황스런 목소리를 장난스런 웃음으로 대꾸해주고, 필사적으로 나가지 않으려 온 힘을 다해 버팅 기는 레니의 등짝을 사정없이 손바닥으로 내리쳐주었다. 찰싹찰싹 소리가 차지게도 울린다. 제법 따가웠는지 레니가 버럭 소릴 질러댔다.

"왜 때려!"

"눈치도 없긴. 기집애야. 눈치 좀 키워라, 응?"

"그래도 궁금한 걸 어떡해!"

끝까지 지 잘못한 거 없다는 듯 고함을 쳐대는 레니를 향해 나는 쯧쯧 혀를 차주었다. 그리고 집게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레니의 눈앞에 얄밉게 흔들어준다. 마치 넌 어려, 라고 말해주듯이 아주 얄밉게.

"야, 야. 네가 그토록 사랑하는 로맨스 소설 속에서 눈치 없이 구는 여주인공 친구를 보며 막 욕했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기억 안 나니?"

"아, 아니 그건 그거고. 이건 현실이잖아!"

"웃기네. 소설이든 현실이든 재수 없는 건 재수 없는 거고, 추한 건 추한 거야. 툭하면 눈물 질질 짜는 여자와 사사건건 남자의 앞길을 가로막는 여자와 행동하는 족족 귀찮은 사건을 터트리는 여자가 짜증나는 건 소설이든 현실이든 똑같은 만고불변의 진리인 거라고. 알간?"

"쳇!"

꽤 강한 펀치를 날려주자 레니는 더는 아무 토도 달지 않았다. 자기도 자기가 꽤 눈치 없이 굴었다는 건 알긴 아는 모양이다. 그래도 민폐를 끼치는 여주인공 친구까지는 아니라고 쫑알거려대긴 했지만.

"그래그래, 너는 그런 민폐 여주인공 친구 캐릭터까지는 아니야. 그러니까 배려 좀 해주자, 응? 아직까지 저렇게 어색해 죽으려고 하는데 저 두 사람이 하루라도 더 빨리 친해져야 하지 않겠니?"

"쳇쳇. 혼자 배려심 많은 척 하기는."

맘 상한 레니가 끝까지 구시렁구시렁 거려댔다. 속이 좀 상한 모양이다.

"어허! 저 두 사람이 진도를 빨리빨리 나가야 나중에 우리가 라니에게 닦달해 내서 얻어낼 수 있는 정보도 그만큼 많아진다는 걸 몰라? 다음 술판을 위해서라도 저 두 사람에겐 당분간 우리의 배려가 시급하다고."

"다음 술판?"

"또 안할 거야?"

"하고 싶지. 당연히 또 하고 싶지. 그치만……."

"어허! 포기하지 마. 포기하지 않고 기회를 노리다 보면 언젠간 또 술판을 할 수 있지 않겠어? 그리고 그때는 라니의 속사정을 사정없이, 낱낱이, 속속들이 캐보자고. 흐흐흐."

"흐으응~, 엉큼하긴."

그렇게 말하는 레니의 눈꼬리는 상당히 의미심장해 보여서 나는 네가 더 엉큼하다고 쏘아주었다. 물론 속으로만.

응접실에서 자발적으로 쫓겨난 우리는 바깥 정원으로 나왔다. 다른 곳은 정신없이 이것저것 꾸미고 손본다고 다 어질러져 있을 테니까. 일손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기에 굳이 시녀에게 차를 가져오라는 둥의 말은 하지 않았다.

바람은 신선하고 날은 따뜻하다. 어지러이 피어있는 꽃들은 사람의 손을 탄지 오래되었다는 듯 여기저기 흐드러져 피어있었다. 하지만 야생화는 야생화 나름대로의 운치가 있는 법이다. 하지만 귀족 가(家) 저택에는 어울리지 않겠지. 내일부터는 정원 일에 손대볼까 고심하면서도 사실은 이런 자연스런 광경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너 별장에는 안 들려?"

"응?"

이곳을 어떻게 꾸며볼까 고민하고 있는데 나른한 목소리가 그런 상념을 깨운다. 고갤 돌려보니 맥없고 몽환적인 얼굴의 레니가 보인다.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레니의 시선 끝엔 졸음기가 묻어나오고 있었다.

"별장?"

"응. 거기에 내 소중한 책들이 다 있잖니."

"아하."

책들의 안부가 염려되신 모양이군.

절로 음흉한 미소가 입가에 떠오른다. 내가 그렇게 웃고만 있자 초점이 흐릿했던 레니의 눈동자가 순간 선명해지며 날카롭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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