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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아름답다-111화 (111/206)

< -- 111 회: # 8 -- >

그가 배롤린 남작에게 어떤 식의 압박을 주었는지 모른다. 직접적인 것이었든 간접적인 것이었든. 다만 그 효과는 무척이나 대단한 것이어서 배롤린 남작은 딸의 결혼에 관해 그 어떤 간섭도 하지 못했다.

그 덕분일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추이를 지켜보던 난 배롤린 남작의 얌전한 행동에 다소 안심할 수 있게 되었다. 라니의 결혼 날짜가 다가올수록 신경이 알게 모르게 많이 날카로워져있던 것이다. 마치 언제라도 손톱 발톱을 다 세워 누군가의 얼굴을 사정없이 긁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나는 전투태세에 가까울 만큼 사납게 굴어댔다. 그런 내 상태를 가장 싫어한 사람은 당연히 그 남자, 나의 정부다.

잠자리에서조차 계속 칭얼거려대며 집중하지 못하고 짜증만 부려대자 한번은 하던 도중 그가 그냥 나가버린 적도 있었다.

쾅! 거칠게 닫힌 문을 보며 나는 저 비싼 문에서도 저런 큰 소리가 날 수 있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아무리 내가 세게 닫아봤자 쾅 소리는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닫히기 직전 살짝 멈추며 매끄럽게 닫혔던 문이 저 문이다. 그 때는 부드럽게 닫히게 하는 마법이라도 걸어놓은 건가 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다. 다음날 새론이 말해줬는데 빠르게 문이 닫힐 경우 누군가 다치게 될 위험이 있어 닫히기 직전 멈추게 해주는 장치가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그 세심한 작업에 난 감탄했더랬다. 그런데 그런 쓰잘데기 없는 것에 감탄한 나머지 그 남자의 상태를 잠시 잊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다음날 저녁, 그는 배롤린 남작이 그 어떤 행패도 부릴 수 없으며 그 어떤 방해공작도 하지 못한다고 내게 말해주었다.

"예?"

"배롤린 남작은 라니 배롤린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자기 목숨 챙기기도 바쁠 테니까."

그러니 그만 내게 집중해!

그렇게 말하는 그는 한 마리의 야수가 으르렁거리는 것 마냥 사나웠다. 그리고 전날 밤에 대한 보상까지 한꺼번에 받겠다는 듯 아프고도 거칠게 날 안았다. 중간 중간 내가 몇 번의 도리질을 해댔지만 그는 본 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이제 며칠 뒤로 다가온 라니의 결혼식과 피로연을 위해 루이 토킨 공자와 라니가 살게 될 저택에 와 있다.

이 저택은 토킨 가(家)의 정식 후계자가 된 루이 토킨 공자의 형이 사주었다고 한다. 결혼 축하 선물로. 그리고 얌전히 후계자의 자리에서 물러나준 것에 감사하는 의미로.

새로 재건축 된지 얼마 되지 않아 깨끗하고 널찍한 이 저택은 새 건물이 갖는 장점과 동시에 당장 있을 급한 행사를 준비하기에는 준비할 것이 너무 많다는 단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만약 별다른 일이 없었다면 살기 아무 문제없었을 테지만 이제 곧 결혼식이 여기서 진행된다. 때문에 파티를 준비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손을 걷어붙였다. 하지만 여전히 일손은 부족하기만 했다.

라니의 일인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지!

당연히 나도 돕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저택을 청소하는 일이라던가 음식을 준비하는 일이라던가 그 외 기타 잡일 등등을 내게 시킬 수는 없었나보다. 덕분에 나는 상당히 애매한 상황을 맞이해야만 했다. 그래도 포기할 내가 아니었으나 복병은 너무 강력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여기저기 기웃기웃, 이런 일 저런 일을 하려하면 어디선가 루이 토킨 공자가 짜잔~하고 나타나 그런 나를 제제해댔던 탓이다.

"안 바쁘세요? 저는 알아서 일하게 내버려 두고 루이 토킨 공자 할 일 하세요."

내가 아무리 나를 그냥 내버려달라, 나는 괜찮다 그리 말해보아도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가씨께서 이런 일을 하시도록 둘 수는 없습니다. 주군께서, 공작님께서 아신다면 노하실 겁니다. 정 돕고 싶으시다면 차라리 다른 일을 찾아봐 주십시오."

그러니까 그 다른 일이란 것이 대체 뭐냐고요, 네? 대체 이런 상황이 몇 번째란 말인가.

그렇게 한참을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서 있다 결국 찾아낸 작업은 바로 조명 일이다. 나름 중요한 일이나 아직 아무도 손대지 않은 일. 내가 굳이 나서서 힘 쓸 필요 없이 지시만 내리며 할 수 있는 일. 물론 전문가가 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지금은 전문가를 부를 여유도 아님 조명을 제법 만져본 노련한 시녀가 조명에까지 신경 쓸 여력도 없었다. 다른 급한 일이 비하면 조명일은 사소한 것에 불과할 테니. 그러니 이건 딱 내 일이군.

"라니야, 잠깐 저기 위에 좀 서볼래?"

"응?"

이것저것 빠진 것 없나 체크하고 있는 라니의 손목을 잡고 피로연 단상 위로 끌고 갔다. 곧 있을 결혼식의 주인공답게 라니는 무척이나 바빴다.

"다행이 네가 빛을 잘 받는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어서. 바쁘겠지만 조금만 시간을 내줘. 잠깐 거기 서 있어. 응, 거기."

멋모르고 단상에 올라선 라니가 살포시 미소 짓는다. 근래 들어 웃는 얼굴을 자주 보이는 라니가 그렇게 예뻐 보일 수 없다.

"조명 맡았어?"

"누가 내게 맡기겠니. 그냥 내가 하는 거지."

이 홀 안에 마법구는 이미 다 켜져 있는 상태다. 피로연을 여는 그날도 지금처럼 밝을 테지. 그렇다면 안 그래도 환한 이 연회장에서도 단상을 가장 돋보이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곰곰이 궁리해본 결과 빛은 섞일수록 투명해진다는 원리를 생각해냈다. 그러니까 밝은 홀에서 어느 한 부분만을 더 눈에 띄게 하게 하기위해선 어둠을 선택해야 하는데 그렇다고 주인공을 어둠 속에 밀어 넣을 수는 없지 않는가. 그래서 모색해 낸 방법이 바로 단상 주위에는 검은 마법구를 빙 굴러 설치하고 단상 한 가운데만을 스포트라이트 받을 수 있도록 홀에 있는 마법구보다 훨씬 밝은 색의 마법구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나름 괜찮은 생각이었기에 내심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는 김에 단상 주위를 꽃으로 가꿔주는 것도 해주리라 마음먹었다.

"1번부터 8번까지 마법구, 천천히 불 꺼보세요."

내 말에 저 멀리서 마법구를 작동하고 있는 시녀가 천천히 불을 껐다.

"3번, 4번, 5번은 좀 더 짙은 검은색 구로 다시 설치해야 좋을 것 같아요. 그렇게 체크해주시구요."

"12번 마법구 켜 봐요. 음, 여기는 너무 허옇게 뜨네. 각도를 조금 바꿔야겠어요. 오른쪽으로, 조금만 더. 아니, 너무 갔다. 다시 조금만 왼쪽으로."

남들이 보면 전문가인줄 알겠지만 사실 나는 조명 맞추는 일을 처음 해본다. 대부분 이런 일은 연회장을 많이 맡아본 능숙한 시녀들이나 진짜 전문가들이 하니까.

"음, 나머지는 괜찮고. 라니야, 잠깐 내 쪽을 봐볼래?"

"이렇게?"

"응. 두 팔을 양쪽으로 벌려봐. 천천히."

내 말에 라니가 얌전히 두 팔을 양쪽으로 벌려 보인다. 흐음. 라니의 몸에 닿는 빛에 딱히 거슬리는 실루엣은 없는 것 같다. 나는 라니에게 오른쪽으로 조금 이동해 달라는 듯 손으로 오른쪽을 향해 살랑거려주었다. 그런 내 손짓을 금세 알아차리고 라니는 착실하게 오른쪽으로 이동한다. 그러자 라니의 왼쪽 어깨가 어둠으로 내려앉았다.

"4번 블랙구가 너무 안쪽으로 들어왔네요. 4번을 조금 바깥으로 빼주세요. 조금만 더, 조금만 더……거기까지! 예, 좋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이번에는 라니에게 뒤로 조금 물러서 줄 것을 요구했다. 역시나 라니는 내 말에 얌전히 따라주었다.

"어라? 뒤로 너무 많이 빠졌는데? 라니야, 몇 걸음 뒤로 갔어?"

"음, 한 5걸음?"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와 다시 뒤로 가는 걸음을 세며 라니가 대답한다. 저게 몇 번 구였더라? 나는 천장에 달린 마법구를 1번부터 세어보며 조절해야 하는 마법구가 몇 번인지 확인해 보았다.

"7번이구나. 저기요, 7번 마법구는 너무 바깥으로 빠져있어요. 빛을 조금만 안쪽으로 당겨주세요. 예, 좋아요. 거기까지."

그리고 라니를 왼쪽으로 옮기고 다시 앞으로 옮기고 등등 몇 번의 같은 동작을 반복하니 얼추 꽤 그럴싸한 조명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하다 보니 참 재밌다.

"오오. 완전 전문가 같은데?"

등 뒤에서 장난스런 목소리가 들린다 싶어 고개를 휙 돌려보자 레니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전문가는 무슨. 흉내만 내고 있는 거지. 언제 왔어?"

"사실은 조금 아까."

"근데 왜 이제야 인사하는데?"

"아, 새론한테 내가 데려온 시녀들을 넘기고 왔지롱."

아이고, 이 착한 것. 일손 부족해 죽겠다고 내가 푸념한 것을 전해 들었나보다. 기특하게도 백작 가(家)의 시녀들을 데리고 강림하셨다.

"나 잘했지?"

레니가 뻐기듯 말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정말 잘했기 때문에 나는 아낌없이 칭찬해주었다.

"잘했어, 잘했어."

사실은 나도 공작성에 있는 시녀들을 데리고 오고 싶었더랬다. 하지만 공작성 시녀들은 내가 마음대로 어찌할 수 있는 이들이 아니었기에 그러질 못했다. 공작한테 부탁해볼까 했지만 이상하게도 며칠 전부터 무슨 바쁜 일이 있는지 황궁에 자주 가서 늦게 돌아오는 바람에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래도 말해보면 허락해 주겠지, 자기의 보좌관 일이니 어느 정도는 살펴주겠지 싶다.

일단은 공작성에서 내가 제일 많이 믿고 의지하는 새론 하나만 몰래 데려왔다. 내 제안에 새론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줬다. 오히려 내가 혼자 가려고 했다면 알아서 따라갔을 거라고 말해줘 나를 기쁘게 하기도 했다.

"라니야 많이 바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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