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8 회: # 8 -- >
"제가 부리고 싶은 짜증 반의반도 못 내고 있거든요?"
"그러니 고약한 성질이지."
"그걸 이제 아셨어요?"
결국 나는 삑- 소릴 지르고 말았다.
아, 건방진 유니시이나. 그 누가 이 남자 앞에서 이렇게 거만하게 굴 수 있으랴. 하지만 이 남자 말대로 고약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 나는 가끔씩 내 주제를 망각할 때가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그게 좋은 거냐고? 말이라고 하나. 절대 좋지 않다!
왜냐하면 난 자아성찰이 빠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바그르르 성질을 부리고 난 뒤 바로, 그래 거의 바로 제정신을 차리곤 했기에. 그래서 무척이나 곤란한 상황을 맞이하고 마는 것이다. 차라리 시간이 조금이라도 지난 후 정신을 차리면 좋을 텐데……. 적어도 혼자 있을 때나 그럴 때.
"큼큼."
소릴 버럭 지르고 바로 그의 눈치를 살펴대는 내 모습은 내가 생각해도 참 처량한 것이었다. 재미있다는 혹은 기가 막힌다는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의 싸늘한 눈빛 앞에서 고양이를 앞에 둔 쥐의 심정이 무엇인지 절실히 깨달았다.
"큼큼, 놔, 놔주세요. 제 방으로 조용히 돌아갈게요."
그래, 도망가는 것도 전술의 한 방법이랬다. 누가? 우리 아빠가. 엄마 아빠는 화려하게 도망친 전적이 있으니까 그 말을 더 신뢰해도 좋을 거라는 뒷말도 덧붙였었다. 대체 어떤 도망을 쳤기에 화려한 도망이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게 아빠의 말은 진리나 다름없다.
"저는 이만 가볼게요."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양 손바닥으로 가슴을 밀어본다. 꾹, 꾹. 하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제법 강한 힘으로 낑낑 거려봤지만 그것도 아무 소용없었다.
"아이참, 좀 놔주세요."
그는 내 발악 아닌 발악에 코웃음을 쳐댔다.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재수 없었을 지도 모를 코웃음이 이 남자가 하니 그럴싸하게 잘 어울렸다. 원체 미모가 잘난 사람은 무얼 해도 잘나 보인다는 말이 사실인가 보다.
"좀, 놔, 달라, 고, 요."
"그만 좀 하고 가만히 있지."
"……저 그냥 제 방으로 돌아가면 안 될까요?"
은근슬쩍, 다시 한 번 내 뜻을 피력해 보았다. 그는 내 간절한 부탁에도 그저 얌전히 있으라는 듯 등에 두른 팔의 힘을 더하였다. 그 확고한 뜻에 나는 몸에 가득 주었던 힘을 풀어내고 기대다시피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하아."
숨 쉬기 불편해.
한숨의 뜨거움이 그의 가슴팍에 부딪혀 내 얼굴로 되돌아왔다. 무슨 메아리도 아니고. 그에 숨이 막혀 고개를 슬쩍 옆으로 돌려 기댔다. 그런 내 양상에 그가 피식 웃는다. 다행이도 기분 나빴던 건 조금 풀린 모양이다. 대신 한숨이 섞여있는 듯 했지만.
"텔 밭에서 잠들었다 하기에."
"예?"
그가 옆에 두었던 병을 집어 올렸다. 옆에 무언가가 있는지도 몰랐지만 그가 꺼낸 병의 모습이 신기해 나는 뚫어져라 그것을 바라보았다.
"호리……병?"
그랬다. 그것은 안이 보이지 않는 흰색 사기로 만들어진 일종의 호리병이었다. 잔도 있었네. 그가 잔 2개중 한 개를 내게 건네준다. 그에게만 신경 쓰고 있느라 다른 것이 있었는지는 정말로 몰랐더랬다. 나는 그가 꺼내놓은 물건들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호리병과 술 잔 2개. 단지 이것뿐이었지만 분위기는 끝내줬다.
"꽃밭에서 잠들었다기에 꽃주(酒)나 같이 하려고 가져왔지."
"꽃주(酒)요?"
꽃주(酒)는 또 뭔가? 말 그대로 꽃으로 담은 술이란 건가? 꽃으로 술을 담그기도 했던가? 궁금증이 마구마구 솟아난다.
그가 호리병 뚜껑을 열어 내 잔에 꽃주(酒)라는 것을 따라주었다. 쪼르르르. 그 경쾌하고 맑은 소리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무색이었다. 마치 투명한 물처럼 맑다.
"대체 무슨 꽃으로 만든 술이기에 이렇게 투명해요? 이름이 뭐예요?"
"백화주."
"백화주요?"
머리가 절로 갸우뚱 거려댄다. 백화라, 백화라. 그런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자기의 잔에도 백화주를 따랐다.
"백화라는 꽃이 있었나?"
세상의 모든 꽃을 다 알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술로 빚어 먹을 정도면 유명한 걸 텐데. 하지만 나는 백화라는 꽃을 떠올리지 못했다. 들어본 적도 없는 걸. 세상은 넓고 꽃의 종류는 많다더니 백화라는 꽃도 있었나보다.
"따로 백화라는 꽃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군. 백화주는 말 그대로 백 가지의 꽃으로 빚은 술을 의미한다고 한다."
"아하!"
"빚은 꽃의 개수가 정확히 백 개라는 것은 아니다. 그저 온갖 꽃을 다 넣어 만드는 걸 백화라 칭한다고 하더군. 그 중에서도 하얀 꽃만을 취급하고. 증류주이긴 하나 발효주에 증류주를 첨가해서 빚은 술이니 너도 마실 만 할 거다."
"그래요?"
그의 설명에 나는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계속해서 말해달라는 내 뜻에 그가 피식 웃는다.
"더 말해주고 싶어도 말해 줄 것이 없군. 게다가 꽃에 대해서라면 나보다는 네가 더 잘 알지 않은가? 하얀 꽃으로만 만든다 했으니 하얀 꽃이 무엇 무엇 있는지는 스스로 생각해보지?"
그의 말에 나는 하얀 꽃을 떠올려보았다.
"하얀 꽃이라. 일단 찔레꽃이 있고, 초롱꽃, 산수유, 매화, 은방울꽃, 연꽃, 잔털제비꽃, 해당화, 바람꽃, 개별꽃……. 음, 너무 많네요. 백 가지는 족히 넘기겠어요. 그렇구나, 흰 꽃들로만 엮어서 술을 만들면 이렇게 투명한 색이 나올 수 있겠구나."
어떻게 만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향도 그윽하고 딱 내 취향에 맞아 나는 제법 진한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찔레꽃 향이랑 해당화 향이 다른 것에 비해 좀 짙게 나네요. 찔레꽃차 드셔보셨어요? 아주 맛있어요. 향이 그윽하고 달콤해서 마시기 참 좋아요. 원래 찔레꽃 내음이 굉장히 상쾌하거든요. 몸을 해독해주는 작용이 있어 건강에도 좋대요."
백화주가 너무 마음에 들었나보다. 어느새 나는 쫑알쫑알 쉴 새 없이 그에게 수다를 떨어대고 있었다.
"다음에 제가 찔레꽃차 타 드릴게요."
별 기대도 없이 한 말이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가 내게 대답해 주지 않겠는가.
"기대하지."
방긋, 웃음이 나온다. 절로 고개가 주억거려댔다. 역시 혼자 말하는 것보다는 누군가와 함께 말하는 게 더 좋다. 찔레꽃차 타주는 거야 어렵지 않은 일이니 기대한다는 대답이 부담스럽지 않다.
그건 그렇고 정말 향긋하구나.
무지무지 만족스러운 향과 맛이다. 과일로 담근 와인들도 좋았지만 지금 이 순간, 와인은 백화주 발뒤꿈치에도 따라오질 못하리라.
"하아."
바람도 선선하고 모든 것이 사랑스럽다. 즐거운 기분은 고스란히 얼굴 위로 떠오르고 입술 끝은 하늘로 솟구친다. 나는 히죽히죽 웃어대며 백화주를 찔끔찔끔 나눠 마셨다. 원샷은 첫잔이 아닌 이상 잘 하지 않는다. 몸이 힘들기 때문에. 그리고 백화주는 첫잔이라고 해도 벌컥벌컥 원샷하기에는 술판에서 즐겼던 와인들 보다 도수가 좀 많이 높다. 즉, 원샷은 힘들다.
라니라면 이 백화주도 원샷하려나?
슬그머니 솟아나는 호기심에 입가에 다시 웃음이 번져나갔다.
"꽃밭에서 꽃주라……. 생각지도 못한 면도 있으시네요."
"생각지도 못한 면이라……. 그게 대체 어떤 면인데?"
내 말투를 따라하며 그가 묻는다.
그는 한 다리는 쭉 펴고 다른 다리는 구부린 채였는데 구부린 다리 위에 뻗은 팔을 올려놓고 더없이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 팔 끝에는 나와 똑같은 백색 사기로 만들어진, 와인 잔에 비하면 터무니없을 만큼 작은 잔이 가볍게 쥐어져 있었다.
아무렇게나 주저앉은 꼴은 나와 같은데도 왜 이렇게 다른 그림인 걸까? 털썩 주저앉은 꼴은 똑같은 건데.
두 손으로 잔을 잡고 힐끔거리며 그를 훔쳐보았다. 텔을 바라보고 있는 건지 그냥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건지. 오늘따라 이상하게도 몽환적으로 느껴지는 그의 에메랄드 빛 눈동자는 그가 마치 이 세계를 초월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 현실감 없이 눈부시다. 바람결을 따라 휘날리는 아름다운 백금발의 머릿결을 바라보며 나는 그 아름다운 모습을 안주 삼아 몰래몰래 그의 모습을 감상했다.
콩닥콩닥.
그 동안 애써 가라앉혔던 심장이 다시 뛰어대기 시작했다. 이 남자의 얼굴을 보지 않으면 견딜만했던 심장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미쳐가는 것 같다. 가끔은 보지 않아도 그저 생각만으로도 들뜬 가슴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심장아, 뛰지 마라. 심장아, 뛰지 마라. 저 남자한테는 안 된다. 심장아, 뛰지 마라. 네가 그렇게 무책임하게 뛰어대면 결국 상처받는 건 나란 말이다. 왜 하필 사랑 따위는 믿지도 않고 우습게 여기는 남자한테 넌 움직인 거니? 응? 왜 하필 저렇게 어려운 사람에게. 적어도 나는 제대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랑할 줄 아는 사람과 더불어 살고 싶은데. 그러니 심장아, 제발제발 뛰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