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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아름답다-105화 (105/206)

< -- 105 회: # 8 -- >

내가 피아노를 치고 있으면 쿤은 그저 가만히 나를 쳐다만 보았다. 마치 나를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이 조용히 한참을 그저 뒤에 서서 기다렸다. 그런 쿤의 모습을 몇 번은 웃음으로 지켜보던 엄마가 쿤의 기다림이 점점 길어지자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나를 불렀다. 그제야 나는 쿤이 왔음을 알고 피아노에서 손을 내렸다.

"안녕."

악보에서 시선을 떼고 쿤을 돌아볼 때면 쿤은 늘 두 가지의 얼굴을 가지고 내게 웃어주었다. 하나는 환한 기쁨의 얼굴이었고 또 하나는 어쩐지 조금 아쉽다는 얼굴이 바로 그것이었다.

"왔으면 왔다고 소리 좀 내라니까."

"미안. 하지만 피아노 치는 모습이 예뻐서."

"아이참. 쿤 네가 그렇게 오래 기다리면 내가 엄마한테 혼난단 말야."

전에도 쿤이 온 것도 모르고 계속 피아노 쳤다가 한참 동안 방치했었던 일로 엄마한테 꾸중을 들었더랬다. 사실 그건 내 잘못만은 아니었던지라 나는 무척이나 억울했었다. 그 때 혼났던 기억이 떠오르자 입술이 절로 삐죽거려댔다.

"미안해."

쿤이 사과했다. 쿤은 솔직하고 정직한 아이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쿤은 그랬다.

"어쩐 일이야?"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나자 내 곁에 다가온 쿤이 무언가를 내민다. 물끄러미 쿤의 손을 바라보기만 하자 쿤이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아 올려 그것을 내 손바닥 위에 놓아주었다.

"이게 뭔데?"

"향수."

"향수?"

그것은 작은 병이었다. 사과모양의 투명한 작은 병.

나는 쿤이 내 손에 쥐어준 병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실은 무척 마음에 들었더랬다. 어린 내 눈에도 향수라는 그 병은 무척이나 예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비싸 보이는 선물을 엄마 아빠 외의 사람에게는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받아도 되는지 무척이나 고민이 되었다. 끙끙거리며 고민하다 결국 나는 다시 그 향수를 쿤에게 건네주었다.

"왜? 마음에 안 들어?"

"아니, 마음에 들어."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자 쿤이 의아한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그럼 왜?"

"비싸보여서. 엄마 아빠한테 혼날 것 같아."

"내가 준 거라고 말씀드려."

"그래두. 그래도 혼날 것 같아. 그냥 안 받을래."

내가 단호하게 고개를 젓자 쿤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 지었다. 하지만 쿤은 그 미소조차 다정했다.

"그럼 오늘 밤에 부모님께 말씀드려봐. 그리고 만약 괜찮다고 하시면 내가 내일 다시 주러 올게."

"음……."

"그럴 순 있지?"

다정다감하게 설득하는 쿤의 말에 홀딱 넘어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으로는 나도 저 향수라는 걸 가지고 싶었으니까. 내 끄덕임에 쿤이 방긋 웃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내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었다.

"착하다."

동갑이면서도 쿤은 나를 여동생 취급하는 버릇이 있었다. 쿤에게 여동생이 있다면 몰라도 쿤은 외동아들이다.

"향기 맡아볼래?"

쿤은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뚜껑을 열었다. 뚜껑을 열자 그 곳에 코를 가져다대지 않아도 공기 중으로 상큼한 향이 퍼져 올라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과?"

"좋지?"

나는 마구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쿤의 손에서 향수를 빼앗듯 쿤의 손을 가져와 그 곳에 가까이 코를 가져다 대 보았다. 공기를 통해 전달받은 향보다 더 진하고 상큼한 향이코를 똑 쏘았다. 방긋 웃자 쿤도 방긋 웃는다. 가만히 내게 손을 대주던 쿤이 천천히 향수를 내 손목 부근에 문질러주었다. 똑 직접 손가락 끝에 향수를 묻혀 내 귓등에도 상큼한 향기를 발라주었다. 온 몸에서 이는 향긋한 냄새에 나는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아졌다.

"그냥 지금 가질래?"

유혹하듯 쿤이 향수를 내게 내민다. 방금 전보다 더 심각하게 나는 고민에 빠졌다. 정말로, 진심으로 지금 당장 저 향수를 가지고 싶었다.

"음, 음."

하지만 역시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엄마 아빠한테 혼나는 건 싫었다. 나는 부모님의 말을 제법 잘 듣는 착한 딸이었고 부모님이 하지 말라는 일은 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딸이었으니까. 하지만 향긋한 향이 맘에 들면 들수록 나는 우울해졌다. 아주 많이 가지고 싶은 만큼 당장 가지지 못하는 지금 상황이 짜증났기 때문에.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부모님을 설득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막무가내로 떼써보고 그래도 허락해 주시지 않으면 그냥 울어버려야지.

"허락해 주시지 않아도 괜찮아."

내 얼굴을 바라보던 쿤이 쿡쿡 웃어댔다. 나는 쿤의 웃는 모습을 좋아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그것이 얄미울 때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역시 얄밉다.

내가 가지고 싶어 하는 줄 뻔히 알면서 허락해 주지 않아도 괜찮다는 건 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막상 자기도 향수 냄새를 맡아보더니 내게 주기 아까워서 그러나싶어 나는 쿤을 째려보았다.

"허락해주지 않아도 너 줄게."

"엄마 아빠가 허락해 주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그걸 가져?"

짜증이 났다. 나는 쿤을 외면하듯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자 쿤이 나를 살살 달래준다. 착한 쿤은 내가 아무리 짜증내도 외면하는 법이 없었다. 끈질기게 내 곁에 붙어 끝까지 나를 달래주고 내 짜증을 받아주고 화를 풀어주었다.

"매일 만나면 되잖아. 내가 매일 가지고 나올 테니까. 응? 매일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꼭 챙겨서 가지고 나올게. 가지고 나와서 지금처럼 네게 뿌려줄게. 그럼 되지 않아?"

"아!"

그런 방법도 있었구나.

터무니없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기발한 방법을 제안한 쿤이 새삼 다시보이기 시작했다. 정말 멋진 방법이다. 나는 왜 이런 생각을 해내지 못하는 걸까?

"음, 생각해 보니까 그게 더 좋은 것 같아. 그럼 유나 네가 한 번이라도 먼저 날 찾아올 지도 모르니까."

"내가 먼저 날 찾아간 적이 없다고? 정말? 흐음, 그럼 앞으로는 내가 먼저 찾아가지 뭐!"

쿤의 집이 먼 것도 아니니 어려울 건 없었다. 게다가 이 상쾌한 향기를 매일 뿌릴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찾아갈 의향도 있다. 하지만 별거 아닌 내 말에 쿤이 잠시 날 쳐다보더니 곧 눈이 휘도록 환하게 웃었다.

"응, 네가 날 찾아와 준다면 정말 기쁠 것 같아."

사실 난 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적이 많다. 방금 이 말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왜냐하면 쿤은 나를 보기 위해 매일같이 우리 집에 왔다. 나는 당연한 듯 그런 쿤을 기다렸고. 그렇게 매일 매일 얼굴을 보는 건 똑같은데 내가 먼저 찾아간다는 것이 뭐가 저렇게 기쁜 일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가끔 쿤을 이해할 수가 없어."

"나를?"

"응."

그리고 내 말을 증명하듯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쿤을 쳐다보았다. 그런 내 눈빛에도 쿤은 그저 덤덤히 미소 지을 뿐이다.

"쿤한테 조금 미안한 기분이 들지만, 그래도 솔직히 말하면 쿤이 조금 어려울 때가 있다고 해야 하나?"

"아마 달라서 그럴 거야."

"응?"

내가 반문했다. 쿤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어쩐지 방금 전보단 훨씬 기운 없이 보였다.

가만히, 쿤이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두 손으로 내 손가락 끝을 살짝 잡는다. 다른 아이들과는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잡고 뛰어논다. 물론 그 중엔 남자아이들도 있다. 내가 먼저 잡을 때도 많았다. 그게 아무렇지도 않았다. 우리들은 아직 어렸고 그렇게 놀 나이였으니까. 하지만 쿤은 다른 아이들과는 늘 달랐다. 쿤은 함부로 내 손을 잡지 않았다.

"아마 어른들도 절대 이해하지 못할 거야. 내가 어떤 마음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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