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1 회: #7-7 그 남자 -- >
막 결제하려던 종이 위에 잉크가 번지는 순간이 기점이었다. 그제야 뮤는 자신의 심기가 생각보다 더 나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종이에 번져나가며 조금씩 자신의 존재를 커다랗게 불려나가던 자국은 어느 정도의 크기가 되자 번식을 멈췄다. 그 모양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뮤는 피식 웃었다.
"그래서."
"네?"
"그래서 방금 전에 술을 더 가져다주었다?"
"네."
뮤의 책상 앞에 새론은 시녀라고 하기엔 다소 건방진 자세로 서 있었다. 새론이 일반시녀가 아닌 이 공작 가(家) 시녀장이라 한다 해도 그 자세는 분명 공손함과는 거리가 있는것이었다. 하지만 새론도 그리고 뮤도 그 자세에 대해 딱히 아무 지적도 하지 않았다. 아니 그것에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
새론은 그저 자신의 주군을 조금은 신기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알아차리지도 못할 아주 미묘하고도 작은 변화였지만 새론은 알 수 있었다.
주군의 심기가 좋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새론이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는 것을 뮤 역시도 알았지만 그는 또 개의치 않았다. 얼굴에 감정표현 한 자락 쉬이 내보이지 않는 저 목석같은 여자가 타인의 감정을 잘 알아차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 공작 가(家) 내에서도 비밀이었다. 새론이 단순한 시녀가 아니라는 것 역시 극비사항이.
생긴 것과 어울리지 않게 그녀는 집안일을 좋아했다. 단순히 집이라는 것을 좋아하는 걸지도 모른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시녀 일을 배우는 것으로 시작해 신분을 위장하고 싶다 먼저 제안한 이는 새론이었다. 새론이 어쌔신 출신이라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그녀의 취향은 독특하다 못해 경악스러운 것이었다.
"오늘 저녁엔 내 방으로 데려와."
누굴 데려오라는 건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를 수가 없지. 하지만 주군의 명에 새론은 생각을 더듬어야 했다.
"흠, 아가씨들 세분이 술기운에 잠드셨다 일어나신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만."
그 말은 즉 지금부터 다시 미친 듯이 놀 거라는 소리였다. 곧 있으면 다가올 저녁시간 내내 술 파티가 계속 이어질 거라는.
하여튼 정말 대단한 아가씨들이었다. 술판을 벌이고 8일째인 오늘까지, 그녀들은 진창 퍼마시고 그대로 잠들었다가 몸만 씻고 다시 술판을 벌이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식사를 안주로 대신해대는 바람에 새론은 식사대용으로 충분할 만한 안주를 그녀들에게 가져다주어야 했다. 방에 들어갈 때마다 풍겨져 나오는 지독한 악취와 귀족영애들이라고는 보기 힘든 그 늘어진 자세라니.
그런 그녀들의 모습을 다른 귀족들이 보았다면 기함할 만큼 굉장한 것이었지만 사실 새론은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와 격의 없는 대화를 들으며 같이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런 자신의 모습도 낯선 것이건만 어느새 저 안에서 함께 놀고 싶다는 생각이 문뜩 들어 더더욱 놀라고야 말았다. 그 생각은 찰나에 스쳐지나간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껏 별로 원하는 것이 없었고 딱히 어떤 것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 새론이었다. 그런 그녀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뜻밖이고 의아스러운 것임을 틀림없는 일이다.
"그냥 데려오지? 내가 그런 것까지 맞춰줘야 하나?"
주군의 입술 끝에 새겨진 것은 분명한 짜증.
새론은 즉각 간파해냈다. 주군이 신경질을 부리는 진짜 이유를. 그러고 보니 유나아가씨께서 공작성으로 들어오기 전, 그 2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에도 주군이 아가씨를 찾지 않은 날은 최대 10일을 넘지 않았었다.
아니, 딱 한 번 있군. 주군이 2주 넘게 아가씨를 안지 않았던 적이.
하지만 그 2주도 주군의 뜻이 아니었다. 주군이 다른 나라, 펠라폰의 외교 사절단으로 가야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때문인지 아니면 그 사절단에 유난히도 귀찮게 구는 인간들이 많았기 때문인지 2주 동안 주군의 심기는 매우 흉포했더랬다. 그랬다. 그때의 뮤는 매우 짜증이 난 상태였다. 2주 내내, 쭉. 지금보다 훨씬 더 날카롭게.
사실 주군이 원하기만 한다면 자발적으로 옷을 벗을 여자는 넘치고 넘쳤다. 여자를 구하는 건 전혀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한 여자가 두 번 다시 안겼던 적은 거의 없었고, 그 한 번마저도 지금의 유나아가씨를 만나기 고작 몇 번 뿐이다.
새론 그녀와 주군의 4명의 보좌관 그리고 주군과 유나아가씨만 알고 세상 사람들 모두가 모르는 일 하나.
그것은 젠이 주군의 명령에 의해 아무도 모르게 루벤스 제국으로 돌아와 주군이 있는 펠라폰까지 유나아가씨를 모셔왔다는 것. 그 말은 즉, 주군이 루벤스 제국을 떠나고 유나아가씨를 펠라폰으로 데려온 그 기간이 정확히 2주라는 거다. 사절단 명단에 적혀있지 않았던 아가씨의 존재는 꽁꽁 감싸이고 감싸여 펠라폰 왕국 사람들조차 그 사실을 알아내지 못했다. 그렇게 아가씨의 존재를 철저히 감췄던 이가 바로 새론 자신이었다.
"알겠습니다."
뮤의 짜증에 새론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야했다. 아가씨들이 그토록 즐기고 있는 술판이란 것을 며칠이나마 더 연장해 주기 위해선, 아무래도 주군의 꼬인 심사를 먼저 풀어주어야 가능할 것 같다. 그 사실을 넌지시 일러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새론은 뮤의 집무실에서 나와 공작 가(家) 내에 마련된 의료실로 갔다.
사람들은 상상조차 못 할 것이다. 공작 가(家)의 의료 시스템이 얼마나 획기적인 것인지를! 공작 가(家)의 의료진은 제법 체계적으로 되어 있어 웬만한 의원보다 그 수준이 높았다. 단순히 '좋다'의 정도가 아니다. 그건 월등함의 차이다. 의료진 옆 건물에는 공작 가(家)에 속한 마법사들이 머물고 있었다. 덕분에 의료진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는 즉시 마법사들의 마법에 의해 긴급한 순간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 힐링 한 방이면 다급한 순간은 어느 정도 면할 수 있어 치료하기 더욱 수월해진 덕이다.
알브레히트 가(家)의 무서움이 세상에 알려진 것보다 알려지지 않은 것이 더 대단하다는 것을 안다면 아마 루벤스 제국의 황실이라 할지라도 단단히 긴장해야 할 것이다. 물론 지금도 예의주시하고 있는 꼬락서니가 경계심을 가득 세운 맹수 같지만. 하지만 다행이 뮤는 황위에 대한 욕심 따윈 없었다. 관심조차도 없었다. 그러니 괜히 황실에서 알브레히트 공작 가(家)를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오히려 세상 그 무엇보다 든든한 칼과 방패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오셨어요? 요즘 자주오시네요. 또 포션을 가지러 오셨나요?"
의료진에서 근무 중인 루인나가 새론의 등장에 반색하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말에 새론이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새론의 성격을 워낙 잘 알고 있는지라 루인나는 새론의 무뚝뚝함에도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고 냉큼 일어나 포션을 보관하는 서랍을 열었다.
"1병이면 돼."
아가씨들이 술판을 벌이고 있는 중이라는 것은 이 공작성 내에서 엄청난 화제였다. 물론 유나아가씨가 들어오고 난 후부터 아가씨의 행동 하나하나가 화제가 되었지만.
꼬박꼬박 3병씩 챙겨갔던 것을 기억하고 3병을 꺼내려던 루인나의 모습에 새론이 입을 열었다.
"1병만 있으면 된다고요?"
술판이 끝났다는 소식은 못 들었는데.
"유나아가씨 것만 있으면 되니까."
"아, 네."
순간 루인나의 얼굴에 궁금증이 일었지만 그녀는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 궁금증을 새론에게 묻는 등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아가씨들의 소식은 지금 이 성내 사람들에게 엄청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니만큼 금세 왁자지껄 퍼질 거다. 그러니 순간의 호기심을 달래고 그저 가만히 있어도 머지않아 원하는 소식을 들을 수 있을 터. 물론 지금 당장 알 수 있다면 무척이나 좋겠지만 대상은 다른 누구도 아닌 새론이었다. 차마 물어볼 용기는 루인나에게 없었다.
루인나는 의료장부에 새론이 포션 1병을 가져갔다는 등의 내용을 기록하고 새론에게 펜을 건네주었다. 새론은 펜을 건네받고 그 옆에 루인나가 써 놓은 내용을 인정한다는 듯 간단한 싸인을 하고 나서야 포션을 건네받을 수 있었다. 별거 아닌 일이었지만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체계인지 겪어보지 않은 이들은 모른다. 새론 정도가 되니 그냥 사인만 하고 가져갈 수 있지 아마 다른 사람이었다면 절차가 매우 까다로울 것이 분명하다.
새론은 복도를 걸으며 이미 어두워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마법구들이 복도를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아가씨의 방 근처에 다다르자 안쪽에서 까르르 웃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즐거움이 가득 베인 소리에 새론이 덩달아 피식 웃고는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들어섰다.
새로 술판을 벌인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아직까지 술 냄새는 그리 심하게 진동하지 않았다. 그녀들은 새론이 들어온 것도 모른 채 쫑알거리며 쉴 새 없이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럴 줄 알고 그냥 들어온 것이다. 몇 번의 경험이 새론에게 말해주었다.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다는 것을. 그것을 깨달은 새론은 예의상 노크 한 번만 한 뒤 그냥 들어오곤 했다.
가만히 아가씨들을 지켜보던 새론이 그들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제야 그녀들의 시선이 새론에게 머무른다.
"각자 방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방으로 돌아가셔서 푹 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