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0 회: # 7 -- >
"그래? 질문이 어려우면 다른 걸로 바꿀까?"
라니의 말에 레니의 얼굴이 확 피어올랐지만 나는 라니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필요 없어, 라니야. 그렇게 봐주지 마. 만약 네가 걸리면 레니는 널 사정없이 공격해 올 테니까."
"……정말?"
"응!"
"아니야, 라니. 안 그럴게.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게. 응?"
반드시 그럴 거라는 나와 절대 그러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레니의 공방전이 벌어졌다.
안 그러긴 개뿔. 레니 저 년은 나한테 그 남자가 내 안에 들어올 때 어떤 느낌이냐는 것까지 거침없이 물어댔던 응큼녀란 말이다! 라니가 당하게 둘 수야 없지! 라니는 내가 지키겠다!
우리 둘의 치열한 눈싸움을 지켜보며 생각에 잠기던 라니가 결국 내 손을 들어주었다.
"응, 그래. 그냥 그 질문으로 할게."
"헉! 라니야!"
레니가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라니의 동정을 구하려했지만 나는 잘했다며 라니에게 흐뭇하게 웃어주었다. 결국 레니의 분노의 화살은 내게로 쏘아졌다.
"너, 절대, 가만두지, 않겠어!"
"일단 내가 걸리고 나면 그 때 말하시지."
하지만 그 화살을 여유롭게 쳐내며 나는 웃었다.
"대답이나 얼른 하지 왜 자꾸 미적거리시나."
"으~ 으~."
어지간히도 분한 모양이다. 나는 그런 레니의 손에 잔을 쥐어주었다. 속 좀 풀라고. 벌컥벌컥. 참으로 터프하게 잔을 비운 레니는 마치 전장에 나가는 기사와도 같은 패기로 단호하게 말을 뱉었다.
"오묘해. 아픈데 좋아. 끝."
그 정확한 표현에 나는 감탄했다. 맞다. 저 말을 나는 백프로 이해한다. 하지만 완벽하게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나와 달리 라니는 그저 알고 있는 지식으로만 이해한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저렇게 대충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다.
"다시!"
복수심에 불탄 레니가 외쳤다. 그 외침에 나는 서둘러 해적왕을 다시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고 라니는 꽂았던 해적검들을 신속히 빼내었다. 그리고 우리의 룰렛은 라니부터 시작되었다. 원래 레니부터 시작인데 레니가 죽어도 먼저 하지 않겠다고 해서 다시 처음 순서대로 시작하기로 했다.
"어라?"
퓽!
"……."
이럴 수도 있지. 참으로 재수 없는 경우기는 하지만 첫 타자가 꼽자마자 해적왕이 튀어나오는 경우가 아예 없으리란 법은 없으니까.
라니가 걸렸다. 드디어 다른 사람이 걸리자 레니는 호기롭게 웃어댔다. 그 모습이 광기에 젖은 사람과도 같아 라니의 얼굴이 조금 질린 것 같다.
"움하하하하. 내가 질문해 주지. 각오해라, 라니!"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으로 라니를 가리키는 그 행동에 나는 언제쯤 저 버릇을 고쳐줘야 하냐 싶어 한숨을 내쉬었다. 라니는 제법 침착한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완벽히 긴장을 지우지는 못했다. 라니가 걱정하는 것이 무언지 뻔히 아는 나로서는 그 얼굴에 내심 씁쓸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저 아이에게 배롤린은 평생 그림자로 남을 것임을 알기에.
하지만 괜찮을 거다. 사실 그렇게 걱정은 되지 않았다. 레니는 철없이 보이지만 결코 철없는 아이가 아니니까. 물론 가끔은 정말 철없는 짓을 할 때도 있긴 있다. 그래도 레니는 가볍게 행동하는 듯 보이나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아이기도 하다. 그런 레니가 라니에게 상처가 될 만한 질문을 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레니가 의기양양하게 입을 열었다.
"라니! 네 첫 키스 상대가 누구야?"
첫 키스 상대라니. 킥킥. 귀여운 질문이네. 이 정도면 무난하지. 나는 붉게 달아오르는 라니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레니는 빨리 대답하라며 라니를 보채댔지만 나는 경계심 많고 타인에게 쉽게 곁을 주지 않는, 아니 곁을 주지 못하는 라니를 잘 알기에 아직 라니가 첫 키스를 하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라니의 대답에 놀란 건 레니가 아니라 나였다.
"루이 토킨 공자."
"꺄악~!"
"뭐, 뭐라고?"
뭐야? 누구? 루이 토킨 공자? 그, 그 루이 토킨?
눈이 동그래지고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방금 누구라고? 진심으로 놀란다. 정말 진심으로. 키스를 했다는 사실에 놀라고 그 상대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라는 것이 놀라고.
"아니, 어디서? 어떻게? 둘이 그런 사이였어? 언제부터 그런 사이였는데? 아니, 루이 토킨 공자는 그런 말 없었는데."
"음, 질문은 하나만이지 않아?"
몸이 파르르 떨려왔다. 너무 놀라 나는 내 술잔이 넘어져 술이 테이블 위로 흘러내리는 것도 알지 못했다.
아까운 술! 레니가 소릴 지르며 급히 내 술잔을 세웠지만 이미 다 쏟아진 뒤였다. 나는 나를 향해 작게 미소 짓는 라니의 얼굴을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쳐다보았다.
"음, 그러니까 몇 달 전이었을 거야. 노르젠 후작 가(家)에서 열리는 파티에 초대 돼서 갔었거든. 그런데 그 때 내 몸 상태가 별로 좋질 않았어."
그렇게 서문을 시작하는 라니의 얼굴은 어쩐지 조금 어두웠다. 그 어둠의 원인은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분명 집안과 관련된 일이겠지. 그곳엔 사람이 숨통을 틀 여유조차 주지 않고 사건을 터트리는 사람이 있으니 말이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둘이나 있다.
"그래서 사람 없는 응접실을 찾아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그만 깜빡 잠이든 모양이야. 그래도 완전히 안심하고 잠들지는 못하는 버릇 때문에 반수면 상태로 그렇게 한참을 있었던 것 같아."
라니가 깊은 잠을 청하지 못한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그런데 언제부턴가 나는 푹 잘 수 있게 되었다. 대체 언제부터? 글쎄. 하지만 분명한 건 배롤린 가(家)를 나오고 난 후라는 것.
"그 때 누군가 응접실로 들어왔어. 나는 빨리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 거야. 굉장히 당황했지. 보통은 재깍재깍 잘 일어나는 편이거든. 들어온 사람도 나를 봤는지 멈칫하는 게 느껴지더라고. 그런데 그 사람이 내 쪽으로 다가오는데 솔직히 무서웠어."
"으으. 나라도 무서웠겠다. 나쁜 사람이면 어떻게 해?"
레니가 눈을 반짝이며 추임새를 넣었다.
"게다가 그 사람은 남자였거든."
"헤헥! 정말? 근데 어떻게 알았어?"
"숨소리. 숨소리로 알 수 있었어. 그런데 다행히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 그렇게 잠든 내 모습이 무척이나 불편해 보였는지 나를 깨우려고 그러더라고. 그때 날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그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지."
"그 사람이 바로 루이 토킨 공자였구나."
내가 말했다.
"응. 그가 몇 번이나 나를 불렀었는데 그런데 참 이상하지. 그날따라 도무지 일어나질 못하겠는 거야. 마치 가위에 눌린 것처럼. 왜 그렇게 몸이 무거웠던 건지 지금도 모르겠어."
"그래서? 그래서? 응? 키스는 어쩌다 하게 된 거야?"
레니가 달려들 듯 라니에게 재촉해댔다. 방금 전 내게 쏘아대던 분노는 어느새 전부 사라지고 없다. 그 모습에 나는 웃어버리고 말았다. 내 저럴 줄 알았지.
"몇 번을 불러도 내가 못 일어나니까 그는 내가 깊이 잠들었다고 여긴 모양이야. 꽤 오랫동안……나를 쳐다보고 있더라고."
"오오오오오~~~."
"굉장히 불편했다고. 자고 있는 사람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다니. 그런데도 몸은 움직여지지 않지, 나는 꽤 답답했었어. 얼굴이 간지러운 것 같아 긁고 싶기도 했는데 눈썹하나 찡그려지지도 않고. 그런데 한참을 그렇게 내 얼굴을 들여 보던 그가 다가왔을 때는……그 땐 정말……."
그 뒷말을 듣지 않아도 충분히 유추해 볼 수 있는 내용이었다. 레니가 오글거린다는 듯이 양 주먹을 쥐머 꺄악~ 소릴 내질러댔다.
"그렇게 안 봤는데, 루이 토킨 공자. 음흉하잖아~~! 자는 영애에게 기습키스라니! 역시 남자는 겉모습만 보곤 알 수 없다니까. 페터 오빠도 그렇게 순진하게 생겨선 은근히 밝히더니 루이 토킨 공자도 무뚝뚝하게만 보였는데 뒤에서 앙큼한 짓이나 하고!"
……알아서 자기 무덤을 파는구나, 레니야.
원래대로라면 루이 토킨 공자의 행동은 욕을 쳐 먹어도 할 말이 없을 만큼 비겁하고 또 무례한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일을 말하는 라니의 표정에 은근히 떠오른 저 설렘……. 그래 저 설렘이 있기 때문에 지금 이 분위기가 로맨틱하게 여겨지는 거겠지. 만약 저 얼굴이 아니었더라면 절대 가만두지 않았을 텐데.
평소와는 다른 라니의 상기된 모습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나는 라니가 루이 토킨 공자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도둑키스를 자신의 첫 키스로 셈하지는 않을 테니까.
루이 토킨 공자는 분명 라니를 사랑하고 있노라 내게 말한 적이 있다. 다행이야. 이 두 사람은 잘 될 거다.
루이 토킨 공자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라니에 대해서는 잘 안다. 그리고 루이 토킨 공자가 뮤아르노와, 그 남자가 말한 만큼의 남자라면 이 둘은 아름답게 잘 살 수 있으리라.
"자, 내 대답은 여기까지. 다시 판을 돌려야지?"
그렇게 말하며 귀엽게 눈을 찡긋하는 라니의 애교는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더욱 가치 있는 것이었다. 레니와 나는 시선을 맞추고 한번 웃은 다음 다시 씩씩하게 판을 돌렸다.
라니가 걸렸기 때문에 라니부터 다시 시작했다. 한번 걸리고 난 후라 더욱 신중해진 라니는 해적검을 들고 어느 구멍에 넣을지 고심하다 제일 아래쪽 구멍에 검을 찔러 넣었다. 잠잠했다. 그리고 내가 해적검을 찔러 넣었다. 내게 망설임 따윈 처음부터 없었다.
"후후. 오늘의 나에겐 행운이 따르려나본데?"
해적왕께서는 잠잠하시었다.
쳇! 레니가 그런 내게 못마땅함을 표현하며 신중한 태도로 해적검을 찔러 넣는다.
"움하하. 나도 통과다!"
라니는 검을 고르는 것조차 진지했다. 아마 나와 레니가 해적검을 찔러 넣는 그 시간의 두 배,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을 소요하는 듯 했다. 하지만 나도 레니도 그런 라니를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주었다. 그 진지한 모습이 보기 좋았던 탓이다. 정말 심각한 사건으로 인해 진지해져 버린 것이 아닌, 고작 게임 따위에 진지해진 그 모습에 어쩐지 가슴 뭉클해질 만큼 복받쳐왔다.
신중한 고민 끝에 라니가 해적검을 찔러 넣었다.
"하아."
라니도 통과다.
"라니야. 그렇게 신중하게 해도 걸리는 곳이면 장소면 걸리고, 막 찔러 넣어도 함정이 아닌 곳이면 괜찮다니까. 그러니까 그냥 나처럼, 이렇게-,"
그렇게 말하며 나는 마치 이렇게 편하게 하라는 듯 아무데나 해적검을 찔러 넣었다.
퓽!
"……찌르면 안 되겠구나."
그리고 바야흐로 내가 닦달 당할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