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7 회: # 7 -- >
"네가?"
"오오오오오. 딸꾹."
"어머! 딸꾹."
레니의 설명에 라니와 나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 놀란 표정을 짓다 동시에 딸꾹질을 해댔다.
그건 그렇고 레니가 먼저 덮쳤다고? 흠, 하긴 그 얌전한 리제도 공자가 먼저 덮쳤다는 건 어쩐지 상상이 안 되긴 한다. 물론 사람을 겉모습으로만 봐선 안 되는 일이지만.
사람은 화장실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가장 많이 다르다고 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사람은 침대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가장 많이 다르다. 먼저 건 대다수 사람들의 경우가 그러하고 뒤에 건 일부 사람들의 경우에 불과한 것이지만 그 일부 사람들의 변모는 참으로 경악스러운 것이다.
"어땠어? 딸꾹."
"뭐, 뭐가?"
가만히 레니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흐리멍덩한 눈으로 바라보던 레니가 조심스럽게 손을 맞잡아온다.
악수하자고?
아니, 내가 뭐 하러 너와 악수를 하겠니. 재촉하려는 거지.
나는 레니의 손을 잡고 마구 흔들어댔다.
"으악!"
덕분에 다른 손에 쥐어있던 레니의 술잔이 흔들리면서 사방으로 술 방울이 튀어 올랐다.
"말해봐아!"
마구 졸라댄다. 놀리려는 의도 따윈 전혀 없다는 듯 눈에 순수한 호기심만을 띠우고선. 물론 놀리려는 의도가 다분한 것이었지만 그대로 드러냈다가는 역공격당할 수도 있으니까.
"뭐, 뭘?"
"딸꾹. 시이작부터어 끝까지이, 딸국, 전부!"
"허헉! 딸꾹."
숨넘어가는 소리가 레니의 입에서 피토하듯 뱉어졌다. 동시에 머리칼 색만큼이나 달아오른 얼굴로 잔에 남아있던 술을 모조리 입속으로 털어 놓는 터프함을 보여주었다.
"야! 분위기이 안 잡혔다아! 이런, 딸꾹, 나 혼자 말 못해!"
혼자만 털어놓기 심히 억울한 모양이다. 쭉 뻗은 두 다리를 사정없이 흔들어대는 폼을 보아하니 그대로 밀어붙였다간 죽도 밥도 안 될 것 같다. 어쩔 수 없지. 달래줘야겠네. 일단 테이블 위의 병을 집어 들었다. 레니의 잔을 채워주기 위해서.
"어라? 딸꾹."
그런데 병이 비어있었다. 나는 또 다른 병을 집었다. 그런데 또 비어있다.
"라니?"
방금 전 라니가 우리들의 잔을 채워줬던 것을 기억하고 부르자 라니는 다 죽어가는 몸짓으로 고개를 저어댄다.
"딸꾹. 그으게에, 마지, 딸꾹, 마지막이었어어."
"그래에?"
벌써? 언제 이렇게 다 마셔버린 건지 모르겠지만 어느새 그 많던 술을 모조리 해치운 모양이다.
새로 물갈이(?) 할 시간이군.
나는 히죽 웃었다. 우리가 너무 대견스러워서.
고개를 휙휙 돌려 종을 찾는다. 아, 저기 있네. 그런데 꽤 멀리도 던져 놨네. 아까 아무 생각 없이 던졌었는데 그게 구석으로까지 굴러들어간 모양이다. 귀찮게. 흔들리는 바닥을 손으로 짚어가며 네 발로 기었다. 기어가는 모습이 상당히 웃길 테지만 어차피 이 방엔 레니와 라니 그리 나뿐이니 어떠랴.
몇 번의 헛손질 끝에 종을 들곤 마구 흔들었다. 귀 바로 옆에서 흔들었는지 그 시끄러움에 멍했던 정신이 조금은 제자리로 돌아오는 듯싶다. 저 멀리서도 레니는 시끄럽다고 손으로 코를 막고 있었다. 내 생각에 레니는 진짜 미친 것 같다.
오래지 않아 새론이 들어왔다. 새론은 들어오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는데 아무래도 냄새 때문일 거다. 술 냄새가 찌들면 그것처럼 고약한 것도 없다는 걸 1차 술판 때 롱아르 백작 가(家)의 시녀들을 보며 알 수 있었으니까.
새론은 술판 장소를 보다 내가 그곳에 없다는 걸 알고 날 찾듯이 방안을 휘휘 둘러보았다. 그러다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나를 발견했다. 안 그래도 표정이 드문 얼굴이 더 딱딱해 진다.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물끄러미 나만 쳐다보는데 술기운에도 무서울 정도다. 하지만 딱히 화난 얼굴은 아닌지라 나는 씨익 웃어주는 용기를 선보였다.
"하하, 딸꾹. 새로온! 안녀엉~. 딸꾹."
"……."
새론에겐 답이 없었다. 원래부터 말 수가 많은 편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내겐 늘 다정했던 새론이다. 이렇게 반응 없는 새론의 모습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내심 등 뒤에서 식은땀이 나려했다. 그래도 꿋꿋하게 입을 열었다.
"새로온, 수울 좀 갔다죠오. 딸꾹."
"……."
"그리고오 해에적룰레엣, 딸꾹, 갔다줘어."
"……."
술을 가져달란 말에 아무 표정 없던 새론이 해적룰렛을 가져다 달란 말에는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그래도 그냥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준다.
새론이 짧게 박수를 치자 밖에서 대기 중이던 시녀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모두 마스크를 한 상태였다. 그녀들의 손에는 첫날과 마찬가지로 깨끗하고 큰 쿠션들과 러그가 양 손에 가득 들려있었다. 엄청난 속도로 테이블을 정리하고 쿠션을 갈고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병들을 주워들고 흘린 술들을 닦아내고. 그 일사불란한 일처리에 레니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레니는 멋지다며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여주었다. 그것도 양손이나. 하지만 거기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래지 않아 자리는 처음 시작했던 것만큼이나 깨끗해졌다. 그 정리정돈에 히죽 웃으며 그곳으로 가기 위해 다시 바닥에 손을 짚고 기어갔다. 이번엔 라니와 레니 외에 다른 사람들도 많았지만 차마 두 발로 걸어갈 자신이 없었다. 술 취한 이가 제정신이 아닌 걸 알 테니 어느 정도 이해하리라 기대하며 기어가는데 그런 내 모습에 새론이 기어이 한숨을 내쉬고 만다.
"하아."
그 한숨소리와 동시에 몸이 일으켜졌다.
"어, 어."
얇은 팔뚝과는 다른 엄청난 힘으로 새론이 내 팔을 잡아 날 일으켜 세워준 것이다. 그러더니 자리까지 부축해준다. 이야, 공작 가(家)의 시녀장은 힘도 세야 하구나. 새삼 새론이 존경스러워졌다.
"술은 곧 가져올게요. 그때까진 얌전히 계세요. 아셨죠?"
"딸꾹. 으응."
"그리고 앞으론 그러시면 안돼요. 그렇게 행동하시면 안돼요. 절대로요. 공작님이 아시면 저 죽을지도 모릅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종 흔들지 마시고 그냥 제 이름 부르세요. 충분히 들을 수 있으니까요. 네?"
"딸꾹. 으응."
새론의 말에 나는 그저 헤헤 웃어보였다. 어쨌든 술을 가져다준다니 얼마나 고마운 말인가.
남아있는 시녀들에게 몇 가지 지시를 더 내리고 밖으로 나갔던 새론은 오래지 않아 몇 명의 시녀들과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우리들은 한 시녀가 끌고 들어오는 카드 속에 담긴 술병들을 보며 히죽히죽 웃어댔다. 물론 카드 속의 병들을 보며 가장 행복해 한 사람은 누가 뭐라 해도 레니다.
새론은 한손에는 내가 말한 해적룰렛을 다른 한손에는 작은 병 3개를 들고 왔다. 그 병의 정체에 의아해하기도 전에 새론이 우리들 손에 병을 하나씩 쥐어준다.
"포션이에요. 드세요."
"으응? 포오셔언? 딸꾹. 그런거어 피일요없어어어."
레니가 손사래 치며 거부했지만 새론은 강경한 목소리로 운을 떼었다.
"공작님 명이십니다."
"딸꾹."
공작의 명이란 말에 레니가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문다. 아, 그 남자의 카리스마는 만취한 사람들한테도 통용되는 구나. 새롭게 깨달은 사실에 감탄하고야 말았다. 새론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포션을 마셔야 했다. 안 마신다고 버텼다간 술판 접으라고 할까 그게 가장 걱정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모두 얌전히 포션을 마시자 새론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병을 회수해 나갔다.
"그럼 재밌게 노세요, 아가씨들."
상큼하게 인사도 하면서.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우리는 잠시 멍한 채로 앉아있었다.
"흐음. 이럴 순 없어."
레니가 억울하다는 듯 먼저 입을 열었다.
"맙소사. 술이 아깝게."
그 뒤를 내가 이었다.
"포션……굉장히 비싼 거 아니야?"
마지막으로 라니가 중얼거렸다. 라니의 말에 레니는 그제야 자신이 마신 것이 포션임을 다시 상기하며 신음성을 흘려댔다.
"미안해, 유나. 전에 네가 숙취로 포션 마셨을 때, 미쳤다고 욕한 거 사과할게."
"……그 사과 받아들일게."
"내가 미쳤지. 포션이 얼만데 저걸 한입에 털어 넣냐, 그래."
"포션 맞구나. 정말 그 비싼 포션이 맞구나."
그래도 레니는 내가 포션을 숙취 따위로 날린 걸 본 적이 있었기에 그렇게까지 충격을 받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라니는 상황이 달랐다. 라니는 자신이 마신게 정말 그 비싼 포션이라는 것을 알고 경악해하고 있었다.
"비싼 게 맞지. 봐. 술 때문에 멍했던 머리가 순식간에 산뜻해지고, 도무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던 지긋지긋한 딸꾹질도 안 해. 게다가 혀도 멀쩡해졌어. 제 멋대로 말려대던 것이 이젠 멀쩡해. 안 말린다고. 이것 봐."
그렇게 말하며 혀를 쭉 내밀어 보여주는 레니는 아직도 취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