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6 회: # 7 -- >
술은 사람 사이를 친근하게 만들어준다. 아주 가깝게. 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도구란 말인가. 레니와 라니는 그 짧은 시간에 말을 놓게 되었다.
세상에, 라니가 말을 놓다니!
술이라는 매개체가 없었더라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리라. 아니 불가능한 일이라기보다는 말을 놓기까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술은 라니라는 단단한 벽을 물컹물컹 말랑말랑하게 만들어주었다. 술판을 벌인지 고작 3일 만에, 라니가 레니에게 백기를 든 것이다.
그리고 오늘이 술판 며칠 째인지는……모르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어쨌든 유능하고 똑똑한 새론 덕에 우리는 중간 중간 해장도 곁들어가면서 아주 순조로운 술판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 솜씨는 가히 감탄스러운 것이었다. 잠을 자고 오거나 혹은 잠시 졸고 난 후 일어나면 더러웠던 자리가 감쪽같이 깨끗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뿐이랴! 다음 술판을 위한 자리까지 완벽하게 세팅되어 있는 걸 보면 찬사를 보내고 싶을 지경이다.
"아가씨, 공작님께서 많이 참고 계세요."
가끔씩 새론이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넌지시 건네주었지만 술이 잔뜩 들어간 머리가 제정신일리 없다. 그래서 그냥 흘려들었다. 그저 속으로 투덜거렸을 뿐이다. 몇 날 며칠 원하는 만큼 술판을 벌이게 해주겠다고 말한 건 본인이면서 참긴 뭘 참느냐고.
"너, 너, 너어!"
기어코 레니는 라니에게도 손가락질을 마음껏 해댔다. 별로 좋은 버릇이 아니라고 그렇게 말해줬건만 레니는 저 포즈가 상당히 멋있어 보이는 걸로 여기는 모양이다. 또 무슨 이상한 소설을 잘못 읽은 모양이지. 하여튼 별장에 있는 책들은 쓰잘데기 없다. 레니 몰래 전부 불태워버리기라도 해야지.
레니의 손가락질을 담담하게 받아내는 라니의 얼굴은 술의 영향으로 붉게 물들어있었다. 코도 빨갛다. 눈도 좀 풀려있었다. 그 생소한 모습에 나는 히죽 웃어버렸다. 아마 내 상태도 만만치 않게 웃길 거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너어, 너! 딸꾹. 너어 생깍보다 딸꾹, 더 괘앤찮은 애잖아!"
레니의 박력 있는 동작에 라니가 풋 웃는다. 라니의 손에 들린 잔속의 술이 라니의 웃음 결에 찰랑이었다.
생긴 것만 보면 찔끔찔끔 마셔댈 것만 같은데 의외로 라니는 한번 술을 들이키면 거의 원샷이었다. 첫 샷은 원샷이라 우리도 그렇게 했지만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마시는 라니의 모습에 나와 레니는 경악을 금치 못했더랬다. 우리가 벌컥벌컥 마셔대도 거의 3번에 걸쳐 한 잔을 비우는데 반해 라니는 그런 찔끔찔끔 멈춤 없이 그대로 한 잔을 비워내는 것이다.
그 위대한 모습에 레니는 찬사어린 눈빛으로 라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또 그 모습이 멋있어 보였는지 라니처럼 따라 마시길 몇 번하더니 도무지 그렇게는 못 마시겠노라 두 손 두 발 다 들어버렸다. 사실 나도 몰래 따라해 보았지만……나도 힘에 부쳐서 그렇게는 못 마시겠다.
"딸꾹. 고오마, 딸꾹, 워."
레니의 칭찬에 라니가 싱긋 웃는다. 그런데 그 모양새에 나는 웃겨죽을 것 같다. 애써 꼿꼿하게 앉아 있는 듯 했지만 사실 라니의 자세는 이미 풀어질 대로 풀어진 자세와 다름없었으니까. 즉 쿠션에 몸을 한껏 기댄 채 거의 누운 상태였던 것이다. 그 상태에서조차 말을 또박또박 바르게 하려 애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리현상으로 나오는 딸꾹질은 어찌할 방법이 없다. 그 우스꽝스런 모습에 레니와 내가 웃음을 터트리자 라니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결국 덩달아 따라 웃었다.
"라니야아, 딸꾹. 그냥 혀어 꼬아서어 마알해. 응? 딸꾹. 그냥, 딸꾹, 혀 꽈아. 편하게. 딸꾹."
레니는 웃겨 죽겠다며 여기저기 마구 뒹굴 거려댔다. 나는 레니가 내 쪽으로 굴러올 때마다 발로 차댔지만 아쉽게도 계속 헛발질이었다. 그 헛발질에 반대편으로 보내버리고 싶은 레니는 멈춤 없이 내 쪽을 향해 데굴데굴 굴러 오는데 정작 내 몸이 뒤로 넘어가버린다.
아이쿠. 하지만 사방에 깔린 쿠션님이 우리의 몸을 보우하사 그 든든함에 나는 마음껏 뒤로 넘어가주었다.
"움하하하하. 조오타아!"
멋지게 술 한 잔을 비워낸 레니가 컵을 뒤집어 머리 위에서 빙빙 돌려대며 걸쭉한 목소리로 소리쳐댔다. 하긴 레니는 첫잔을 비워냈을 때도 저랬다.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그렇게 좋아 죽겠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술이라 그저 안타까울 뿐이지.
"너, 너, 너!"
이번엔 내 차롄가?
레니가 내게 긴 손가락을 쭉 뻗었다. 저 못된 버릇이 습관으로 변했다가 나중에 리제도 백작 가(家)에서 해대지 않을까 심히 걱정스럽다. 미리 좀 고쳐줄까 싶은 마음에 레니의 손가락을 물어버릴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와중에 레니가 재빨리 손가락을 내 시선에서 치워버린다. 아니 정정한다. 치운 것이 아니라 레니의 몸이 뒤로 넘어가 버렸다.
"딸꾹, 대답! 딸꾹."
"왜?"
목소리에 퉁명함이 가득가득인데도 뭐가 저리 좋다고 웃어대는지. 그런데 어쩐지 그 웃음이 거슬린다?!
그 때 쪼르르르 내 잔에 황갈색의 술이 채워진다. 나는 내 손에 들린 술잔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잔속에 술이 채워지는 장면은 묘하게 섹시하다. 왜 그렇게 생각된 건지 이해할 수 없지만 어쨌든 그랬다. 담겨지는 술을 보다 나는 술병을 쥔 사람의 손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라니네. 언제 비운 건지 모르겠지만 비어있는 내 잔에 라니가 술을 따라주고 있었다. 그 모습에 레니가 또 씩씩하게 웃으며 라니에게 잔을 호기롭게 내민다. 그러자 라니가 레니의 빈 잔에도 술을 따라주었다. 나름 침착하게 굴고 있지만 라니 역시 취한 상태였다. 그래도 술을 따르면 반 이상 잔이 아닌 테이블에 떨구는 나나 레니보단 훨씬 깔끔한 솜씨리라.
"딸꾹, 라아니야아아아~."
"으응?"
"너어, 재미있느은 딸꾹, 이이야기이이 해줄까아아? 딸꾹."
"으응?"
레니의 음흉한 웃음. 저 기집애 또 시작됐구나!
고개를 갸우뚱거려대는 라니와 다르게 나는 단번에 레니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이미 한번 당해본 사람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법. 저 앙큼한 것이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암만 취했대도 라니 앞에서 나와 그 남자의 밤 생활을 아무 생각 없이 나불거릴 만큼 나는 미치지 않았단 말이다. 하지만 레니 저것은 미쳤다. 미친 게 틀림없다. 나는 레니를 들쳐 업고 창문 밖으로 내던져버리고 싶은 욕구를 강하게 느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차라리 내가 먼저 공격해 주리라 그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너어! 누우가아 먼저, 딸꾹, 덮쳤어?"
"딸꾹. 에엥? 딸꾹."
벼락같이 뛰어든 내 질문에 두 아이들의 시선에 내게로 쏠린다. 그 시선을 즐겨 받으며 나는 도전적인 눈빛으로 웃어보였다. 그 불길한 웃음에 레니의 눈동자가 번뜩이었다. 그래봤자 풀린 눈이라 무섭지도 않지만.
"너랑 딸꾹 공자 중에서, 누가, 딸꾹, 먼저 덮쳤어? 응?"
네가 먼저 날 공격하려 한 이상 자비는 없다, 레니아 롱아르.
나는 제멋대로 돌아가려는 혓바닥을 쫙쫙 피려 애쓰며 말해라, 말해라, 말해라 주문처럼 외워댔다.
라니는 아직 무슨 질문의 요지를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다. 순진한 것. 두고두고 생각하는 거지만 저 아이가 배롤린 남작의 딸이란 건 기적이요 정말 세상에 이런 일이다. 아니면 이렇게 노골적인 얘기를 해본 적이 없어 감히 그런 쪽으로 상상도 못하고 있다거나.
"딸꾹. 딸꾹. 술이나, 더 딸꾹, 마시자. 딸꾹."
레니가 잔을 들어 올리며 화제를 전화시키려는 듯 발악을 해댔지만, 말했다시피 네가 먼저 그 요망한 입을 나불거리지 않았더냐. 일단 시도를 한 이상 판은 계속 굴려야지. 물론 그 대상을 레니로 바꿔서.
레니가 살려달라는 듯 날 쳐다보았지만 절대 봐주지 않을 거라는 확고한 눈빛을 마주 보내며 나는 푸헤헤헤헤 웃어 젖혔다. 마녀의 웃음이었다.
"응? 마알 딸꾹 해봐아. 너어, 리제도오오 공자와아 처음, 딸꾹, 할 때에에, 누가 먼저어어 덮쳤냐구우우? 응? 딸꾹."
순진한 라니를 위해 그리고 레니가 빼도 박도 못하게 만들기 위해서 나는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친히 문장을 만들어 다시 물어주었다. 내 질문에 라니와 레니의 얼굴이 동시에 달아올랐다.
"야! 딸꾹. 너!"
레니는 슬쩍 라니를 쳐다보고 나는 노려본다. 기가 막하고 코가 막힌 얼굴이다. 그러니까 누가 먼저 공격하랬니?
"딸꾹. 말해봐아."
물러서지 않고 계속 재촉해대자 레니가 붉어진 얼굴로 씩씩거려대더니 곧 체념한 얼굴이 되었다. 자기 머리를 스스로 쥐어박아대는 걸 보니 제 잘못이 뭔지 알긴 아는 모양이다.
"내가, 딸꾹, 덮쳤어."
푸하하하. 하여튼 웃겨 죽겠다니까. 물어보면 화를 낼지언정 대답은 잘 해준다. 그게 바로 레니였다. 나는 키득키득 웃으면서도 조심스럽게 라니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혹시 이런 얘기를 싫어하면 어쩌나 걱정되었기 때문에. 하지만 다행이도 라니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레니를 쳐다보고 있을 뿐, 그 속에 혐오감이라든가 다른 불쾌한 감정은 없는 듯 보였다. 하긴, 레니와 페터 리제도 공자는 이미 약혼까지 한 사이니 그들의 그런 관계가 딱히 욕먹을 만한 것은 아닐 터.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네가?"
"딸꾹. 응. 반응이, 딸꾹, 순진해서 왠지, 딸꾹, 놀리다가 딸꾹, 그렇게 됐어. 딸꾹딸꾹."